사실의 전달과 해석을 비판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언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언론에는 '전달'과 '해석'은 있지만 비판이 실종되는 경우가 많다. 언론인은 '남의 말'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차도살인'을 일삼는 비겁한 존재로나 묘사된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비판은 실종된다. 제대로 된 비판을 위해 가끔은 언론이 직접 자신의 의견을 공격적으로 드러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래도 진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를 우리의 말로 표현하고자 한다.

노동개혁이다. 노동개혁이라는 말을 다시 곱씹어보았다. 박근혜 정부는 노동을 개혁한 것이다. 이 정부에서 지금까지의 노동은 ‘문제’였다. 공공기관 노동자들이 먼저 철퇴를 맞았다. 코레일의 노동자들은 거의 ‘역적’ 취급을 받았다. 이제 박근혜 정부는 지금까지 임금과 고용관계의 원칙을 지탱해온 핵심 고리들을 하나씩 빼려고 한다. 임금피크제와 ‘쉬운 해고’는 비록 크기는 작아 보이지만 다른 모든 고리를 연결하고 있는 핵심이다.

정부와 보수언론은 노동개혁이 그리 위험한 게 아니라는 논리를 펴는데 골몰하고 있다. 일반해고 기준을 마련해도 법적 구속력은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쉬운 해고’라고들 하지만 일반해고 지침이 있다고 해서 사람을 마구 해고할 수 없으니 그렇게 부르는 건 잘못이란다. 다만 해고를 둘러싼 소송이 빈번하니 그 비용이라도 줄일 수 있게 ‘저성과자’ 등으로 해고사유를 명확히 하겠다는 게 박근혜 정부의 고마우신 마음 씀씀이다. 이러한 호의를 반영해 김대환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장은 징계해고를 당하는 것보다는 일반해고를 당하는 게 낫다는 취지의 말을 하기도 했다. 정확히는 “성과를 못내는 사람이나 조금 부진한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결국은 징계해고를 통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건 개인에게는 불명예이다”라는 발언이다.

▲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영상국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노동계는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슬로건을 빈번하게 내걸어왔다. 이들은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 이후 거의 습관적으로 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 구호가 습관이 된 이유는 창조적인 발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문제가 그만큼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간 잘려본 사람은 이게 무슨 말인지 안다. 징계해고보다 일반해고가 낫지 않냐는 이야기는 고통스럽게 죽는 것보다는 한 방에 끝내는 게 낫지 않느냐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어차피 죽는데 무슨 상관인가?

해고를 둘러싼 소송이 빈번하니 명확한 기준을 정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라며 퉁치고 넘어가려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정확히는 조선일보가 15일자 지면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 그러면서 조선일보는 일반해고 지침이 ‘쉬운해고’로 귀결될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 “정부의 지침 제정이 가져올 효과를 최대한 부정적으로 예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논리대로라면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과 시민사회진영은 그간 그야말로 세상만사 모든 것들에 대해 최대한 부정적으로만 예단해온 셈이 된다. 더 문제는 그 ‘최대한 부정적으로 예단한’ 것들이 상당 부분 맞아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참여정부시절 열린우리당이 중심이 돼 입안한 비정규직법 같은 게 그렇다. 당시에도 정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법을 만들었다고 선전하였다. 2년 이상의 근로계약이 유지될 경우 정규직 전환을 해줘야 한다는 내용이 핵심인 이 법에 대해 세상만사를 최대한 부정적으로 예단해온 진보정치세력과 시민사회는 2년이 채워지기 직전까지만 근로계약을 유지하고 사실상의 해고를 하는 사례가 빈번해질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런 사례가 아니면 불법의 영역에서 계약직의 지위를 유지한다. 이제 정부는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기에서의 2년을 4년으로 늘리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30세(청년실업의 현실을 반영해보았다)에 취업해 34세에 해고되는 구조가 고착화되는 걸로 귀결될 것이다.

일반해고 지침으로 소송을 안 해도 될 것이라는 논리도 황당하긴 마찬가지다. 노동자 입장에서 회사가 해고를 결정한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니 소송이 벌어지는 것이다. 즉, 소송은 노동자로서는 절박한 심정으로 지푸라기를 잡는 것과 같다. 정부의 일반해고 지침 마련은 노동자에게 내려진 해고 결정을 스스로가 잘 납득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취지다. 즉, 해고를 당한 노동자가 “이 해고는 부당하니 법원 판결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자”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 내가 해고를 당할 만 해서 당했구나”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게 정부와 보수언론의 논리다. 이게 왜 ‘쉬운 해고’가 아닌가?

재미있는건 이들이 임금피크제에 대해서는 좀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간 임금피크제 전면 실시 필요성을 주장하며 고령층에 들어가는 인건비를 절약해 청년층 고용을 늘리도록 하겠다고 단언해왔다. 그런데 이제 보수언론마저도 이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노동계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은 박근혜 정부가 임금피크제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 ‘호봉제’로 대표되는 임금체계를 무너뜨리고 싶기 때문이라고 분석해왔다. 보수언론은 이들의 이런 분석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는 걸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선일보가 “임금피크제는 임금 유연성을 확보하는 일부 방안일 뿐이다”라고 쓴 것을 보라.

▲ 15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에서 열린 '노동개악-노사정 야합 분쇄투쟁 선포 기자회견'에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삭발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런 상황에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최대한 부정적인 예단’이 아니라 ‘최대한 긍정적인 예단’이다. 정부와 보수언론, 지상파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이후 상황을 예단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노동시장이 유연해지면 경제가 발전할 것이고 소득이 늘어날 것이며, 이 과정에서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 정부는 실업급여 지급 기간을 늘리는 등 사회안전망을 확충할 것이며, 근로시간은 단축돼 이제 집에서도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며, 출퇴근 과정에서의 사고도 산재로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게 이들이 그리는 ‘장밋빛 미래’의 내용이다. 경제가 발전해봐야 재벌이 자기 주머니에만 돈을 넣으면 소용이 없으며, 실업급여 관련 예산은 볼모로 잡혔고, 근로시간 단축은 불안정 일자리의 증가일 뿐이라는 비판은 이들이 보여주는 미래 속에 없다.

백번 양보해서 이 ‘장밋빛 미래’가 진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인정해볼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보수정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노동자 여러분의 고뇌에 찬 결단이 결코 희생을 강요하고 쉬운 해고를 강제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배은망덕한 우리는 가끔 박근혜 정부를 ‘독재’에 빗대왔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가 이토록 노동자를 위하고 있고 수많은 서민들도 기꺼이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있으니 남은 결론은 단 하나다. 대한민국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체제였던 것인가?

러시아에서 혁명을 일으킨 레닌은 정치가의 임무를 사슬을 이루는 고리로 비유한 바 있다. 손에 거머쥐었을 때 사슬 전체를 이끌 수 있는 핵심고리를 찾아내 움켜쥐고 놓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박근혜 정부의 임금피크제와 일반해고 지침에 대한 ‘집착’을 보면서 이 비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렇다. 물론 박근혜 정부가 그 사슬을 어디로 이끌 생각인지는 명확하다. 이를 막을 힘을 갖춘 세력은 없다. 제1야당은 내전에 휘말렸고 진보정당은 진흙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노동운동은 사실상 조로사(早老死)를 앞두고 있다. 절망이 너무 크면 사람은 차라리 웃게 된다. 이 글은 그 웃음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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