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국가에서 극우주의자 쯤 되는 게 뭐가 문제냐고 항변하는 말은 들어봤어도 아예 극우주의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는 오랜만이다.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를 두 번이나 지내고 이번에 KBS 이사회 이사로 다시 나타난 차기환 변호사가 지난 7일 조선일보에 기고한 <‘종북’은 있고 ‘극우’는 없다>는 칼럼은 그런 의미에서 나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종북과 극우가 실제로 한국사회에 존재하느냐의 무성의한 쟁점을 넘어서 이 칼럼의 존재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 조선일보 7일자 칼럼

차기환 변호사의 ‘종북론’은 전형적인 것이므로 따로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소 복잡한 논리를 제시하고는 있으나 결국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미군 철수, 평화협정 지지, 연방제 통일 등을 주장하면서 선군정치나 3대세습 등을 비판하지 못하는 것을 ‘종북주의’라고 부르겠다는 건 앞뒤야 어찌됐든 그의 입장에서 합리성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간 기득권이 ‘종북주의’라는 ‘레이블링(labeling·낙인 찍기)’을 마구잡이로 적용해 많은 부조리를 낳아 왔다는 사실은 일단 논외다. 심지어 이런 행위는 위의 기준에 벗어난 사람들에까지 영향을 미쳐 과연 선진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를 의심케 하는 사건들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차기환 변호사의 독특한 점은 그의 ‘극우론’에서 나온다. 그의 규정에 따르면 극우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의 ‘파시즘’을 지지하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은 한국엔 없고 오직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대외 개방, 자유민주주의, 법질서 준수 및 법치주의 강조, 폭력 배격”을 주장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한다. 전후 맥락을 보건대 이는 그간 극우주의자로 비난받았던 자신에 대한 일종의 변호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종북은 북한체제를 지지하는 것이고 극우는 파시즘 체제를 지지하는 것’이라는 1차원적 논리를 이제는 뛰어넘어볼 때도 됐다. 조물주가 인간을 창조할 때에 고맙게도 몸뚱이 위에 커다란 머리를 얹어준 것은 이 존재들에 복잡한 사고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물주가 선사한 인간의 지적능력은 특히 ‘종북’이나 ‘극우’와 같은 논제를 다룰 때에 동원돼야 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어떤 개인이 머릿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대해 우리 사회가 염려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늘 문제는 이 ‘생각’이 외부로 표출되었을 때 어떤 효과를 거두느냐에서 비롯된다. 건강한 현대사회가 ‘극단주의’를 늘 우려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극단주의의 신봉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종종 남에 대한 어떤 종류의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극우과 종북이라는 두 개념을 굳이 문제 삼는 것에는 모두 어떤 종류의 극단주의를 우려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다. 차기환 변호사가 ‘종북’, 그러니까 북한에 종속된 어떤 사람들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극단주의가 일반화된 북한의 체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관점이라면 ‘극우’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염려를 해야 하는가는 명확하다. 즉, 극단주의의 폐해를 우파적 관점에서 실제로 실현하고자 하는 걸 극우주의로 본다면 그것을 추종하는 인사를 우리는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26일 오후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찾아 박 대통령 영전 앞에서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예를 들면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희생자 유가족들과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단죄하겠다고 주장하며 나타났다. 서북청년단이 과거 ‘종북주의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무조건 마구 때리고 죽였던 역사를 볼 때 이걸 재건하겠다는 게 무슨 의도인지를 파악할 수 없다면 그는 앞서 언급한 조물주의 소중한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본인들 입장에선 반쯤 장난스런 의도라지만 어쨌건 특정 인터넷 사이트에 호남과 여성에 대한 혐오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이들 역시 분명한 극우주의자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탑승한 탱크가 5·18 희생자들의 시신을 밟고 달려가는 합성물을 만들어 유포하는 것이나 ‘홍어 택배’라는 비유로 5·18 희생자들을 모욕한 것 등은 이들의 극단주의적 욕망을 드러내는 사례이다. 그들이 말하는 ‘김치녀’에 대한, 눈뜨고는 차마 봐줄 수 없는 온갖 괴이하고 폭력적인 주장과 표현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이 끔찍한 것은 이들의 기행이 특정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을 용인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인준함으로써 사회를 기득권에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극우주의가 이미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점한 전례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태생적으로 ‘반공주의’의 폐해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한국사회에서의 극우주의는 반공주의의 극단화된 표현이다. ‘멸공’을 국시로 내세운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이 주장한 바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써 별로 저항할 힘도 없는 사람들에게 공권력을 동원한 무자비한 탄압을 가해 극우주의를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 이러한 극우주의에 편승해 기득권으로 성장한 사람들의 다수가 오늘날까지 사회적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들 중 그나마 사회적 영향력을 바라는 만큼 충분히 획득하지 못한 일부는 경상북도의 어느 지역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신(정확히는 반인반신)으로 모셔야 한다는 다소 그로테스크한 전근대적 퍼포먼스에 남아도는 힘을 쏟고 있다. 이런 판국에 무슨 한국사회에 극우주의자가 없다는 소리를 하는가.

조물주의 선물을 최대로 활용해야 하는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가 이런 현실을 잘 알면서도 한국에 극우주의자가 없다는 황당한 주장을 공적지면에 펼쳐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엔 두 가지 중 하나의 이유가 작용하였을 수밖에 없다. 본인이 극우주의자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것이거나, 이 나라가 극우의 나라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위해 침묵하는 것이거나.

그런 면에서 차기환 변호사가 공영방송 이사를 세 번째 맡고 있다는 건 어떤 경우든 매우 부적절하다. 차기환 변호사가 건실한 극우주의자라면 공정성과 공공성이라는 공영방송의 소중한 가치가 그의 극단주의에 오염될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가 된다. 차기환 변호사가 극우주의자들에게 알랑방귀나 뀌는 기회주의자라면 이런 사람을 세 번이나 기용함으로써 ‘직업적 공영방송 이사’라는 비아냥까지 듣게 한 이 체제가 문제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가장 비극적인 건 공영방송 이사 중 이런 사례에 해당하는 사람이 차기환 변호사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연 지금이 기껏 강당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우스꽝스런 소리나 하는 종북을 걱정할 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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