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은 찬성’하고, ‘환경단체’는 반대하는 설악산 케이블카

지난 8월 28일, 환경부의 국립공원위원회는 환경부차관 주재로 회의를 열어 강원도 양양군이 제출한 ‘설악산 국립공원 오색 케이블카 설치 공원계획 변경’ 안건을 심의했다. 국립공원위원회는 이날 회의를 통해 제출된 안건을 ‘탐방로 회피 대책 강화’, ‘산양 문제 추가조사 및 멸종 위기종 보호대책 수립’ 등 7가지 내용의 이행을 조건으로 가결했다.

▲ 설악산 오색 케이블카의 계획이 가결되던 그날 TV의 뉴스는 여러개의 꼭지로 해당 뉴스를 다루었다. 그 뉴스들은 대부분 “지역주민은 환영하고, 환경단체는 반발”한다는 프레임을 활용해서 뉴스를 보도했다.

이 놀라운 결정이 내게 더 놀랍게 다가온 까닭은 관련된 갈등의 주체를 해석하는 방식으로부터 확인되는 우리 사회의 욕망 구조 때문이다. YTN은 “지역 주민은 ‘환영’...환경단체 ‘반발’”이라는 제목으로 케이블카를 둘러싼 갈등의 내용을 조망했다. 다른 언론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 결정을 반대하는 측은 언제나 ‘환경단체’이다. 한겨레신문이 당일 발행한 속보기사(「[속보]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심의 ‘통과’」 (2015.08.28.)에서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은 환경단체들이 국립공원 훼손을 들어 거세게 반발하는 가운데...”라는 언급으로 갈등의 내용을 정리했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프레임이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지나갈 수 있지만, 나는 이 익숙함이 우리 사회가 맞이한 결정적인 한계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케이블카를 반대하는 주민’은 없는가? 지역의 개발이슈에 찬성하는 사람을 우리는 ‘주민’이라고 호명하는 것인가? 지역사회의 지속가능성과 지구적 한계, 그리고 개인과 마을의 미래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녹색시민’은 존재하는가? 이 존재여부에 대한 판단을 중심으로, 지금 활용되는 갈등 주체의 프레임이 언론과 중앙정치가 만들어낸 작위적인 프레임의 문제라면 그 프레임을 두고 싸워야 할 것이고, 그 프레임이 실제로 우리 사회의 어떤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실재하는 이 프레임을 어떻게 깰 것인가 연구해야 할 것이다. 비단 설악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 그리고 우리의 삶에 경제적 이득을 증폭시킬 것으로 기대되는 개발 이외에 다른 판단의 판단기준이 있는가 함께 묻자. 합의된 다른 가치 기준이 없다면,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다시 묻자.

지구를 위해 숲을 사 모으는 억만장자의 이야기

이런 경험을 하고 보니, 지난 해에 한차례 한국 언론을 통해 소개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던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HEAD의 회장 요한 엘리아쉬(Johan Eliasch)의 이야기가 오버랩된다. 2007년 환경보호 단체인 ‘쿨어스(Cool Earth)’를 만든 그는 사실 2005년 사비로 수백만달러를 들여 아마존 메데이라(Medeira) 강 유역의 열대우림 1600제곱킬러미터를 현지 벌목회사로부터 구입했다.(1600 제곱킬로미터는 서울과 경기도를 합친 정도의 면적이다.) 숲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숲을 사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지금 사회에서 기업과 국가의 개발논리에 맞설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사실 상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자본의 증식을 가장 최우선 가치로 하는 기업은 그렇다치고, 국가의 공공성마저 그는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그렇다면 요한 엘리아쉬 같은 ‘착한 거부’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개인, 시민, 주민은 언제나 개발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개발주의자’가 되고, 정작 거대한 자본을 소유한 환경주의자가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이 구도를 기대해야하는가?

국정감사를 앞둔 시기, 새정치민주연합이 갖고 있는 입장이 모호하다. 안건이 가결된 그날, ‘아쉬운 결정’이라는 논평을 낸 이후, 어떤 입장도 명확히 드러내고 있지 않다. 당 소속인 최문순 도지사의 숙원사업이라는 고려도 있겠지만, 결국은 ‘지역여론’을 의식하는 것이다. 지역발전에 대한 강원도 주민들의 요청을 외면할 수 없다는 입장이 있을 것이다. 이 상황이야말로 우리 경험에서 전혀 놀랄만한 사건이 아니다. 포괄정당 정도의 정체성을 가진 ‘야당’의 사안에 대한 판단 기준은 언제나 ‘국민이 원하면’으로 귀결되어 왔다.

이는 ‘풀뿌리’라던지, ‘Bottom up’을 ‘착한 것’과 같은 정도의 도덕적으로 상위에 있는 가치로 여길 때 우리가 쉽게 빠지게 되는 함정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풀뿌리’가 중요하다고 외침과 동시에 지역사회와 주민, 이른바 풀뿌리 영역에 대한 이중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주민’에 대한 막연한 불신이다. 기존의 주민을 이해관계에 첨예하게 움직이고 지역개발을 부추기는 존재로 가정하고 대상화하는 것이 익숙하다. 분명 이러한 판단은 어떤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근거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틀린’ 판단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판단에서 우리가 어떤 전략과 과제를 설정하고 실천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요한 엘리아쉬 같은 구세주를 기다릴 것인가, 혹은 국가와 중앙으로 규제의 권한을 묶어두는 정치를 만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지역사회의 주민사회를 새롭게 구성할 ‘녹색 시민’을 조직화하여 다른 토론과 갈등의 장면들을 만들어낼 것인가. 각각의 전략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전략이 될지 판단해봐야겠고, 그래서 우선순위의 결정 같은 것이 필요하겠지만, 나는 역시 가장 마지막에 언급한 내용을 목표로 우리의 전략과 과제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답이 정해진 질문이지만, 답이 정해진 질문일수록 목표와 전략의 합의는 중요하다.

마을의 ‘공공성’에 대해

서울시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가 2013년에 작성한 보고서 「마을은 형성되고 있는가? :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의 현황과 가능성」를 보면,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언급하고 개선되어야 할 사항의 하나의 키워드로 ‘공공성 확보’를 언급한다. 마을공동체 운동(혹은 사업)이 갖는 배타적 주민성을 확대할 가능성에 대해 인식한 시기적으로 필요한 평가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이 ‘공공성’에 대한 정의가 조금 이상하다.

“여기서 말하는 공공성은 극히 일부 주민을 위한 마을사업이 아니라 다수의 주민이 사업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마을은 형성되고 있는가? :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의 현황과 가능성」 중 발췌)

여기서 이야기한 공공성은 사실 개방성에 가까운 의미인 것 같은데(실제로 바로 뒤에서는 ‘개방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개방성이 곧 공공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개방성이 공공성의 하나의 키워드일 수는 있다.

다수의 주민이 찬성하는 케이블카는 만들어져야 하는가? 다수의 주민이 찬성한다면 도심의 숲은 개발되어야 하고, 다수의 주민이 찬성한다면 핵발전소는 더 지어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더 치열하게 토론해야 한다. 녹색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그 관계를 설명하는 철학에 대해, 그 철학을 실천할 수 있는 전략과 과제에 대해 더 많은 현장에서의 도전과 실험을 토대로 한 토론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설악산 케이블카에 대한 이슈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스스로의 과제가 더 선명해지는 경험을 했다.

누군가 내게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의 가장 큰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제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개발 이슈를 지구의 한계 내에서 생각하고 성찰할 수 있는, 지구의 미래와 나와 사회의 미래를 동일선상에서 검토할 수 있는 더 많은 주민과 녹색시민을 만나고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태영 / 서울녹색당 정책위원장

30대 초반, 지역활동가이자, 녹색당원. 풀뿌리사회지기학교와 신촌민회, 체화당이 어우러진 신촌의 일터에서 활동하고 있고, 서울녹색당의 정책위원장으로 역할하고 있다. “조직되지 않은 사람들을 조직한다.”는 목표로 2014년 지방선거에 녹색당 서대문구의원 후보로 출마, 낙선했다. 아직 그 목표는 유효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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