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속 개인에 초점을 맞춘 게임

지뢰 폭발로 안타까운 젊음들이 다쳤고, 그로부터 시작된 긴장이 한반도와 주변을 둘러쌌다. 정전이 아닌 휴전 상태로 60여년을 지낸 한반도는 다른 나라보다 확실히 높은 전쟁위협을 가진 곳이다. 다행히 위기는 위기로만 머물렀지만, 순간적으로 올라갔던 긴장도는 많은 이들에게 전쟁 발발이라는 상황을 가정하게 만들었다.

혹시나 전쟁이 정말로 발발한다면 어떻게 될까? 전략게임 <워게임: 레드 드래곤>은 한반도 위기 상황을 가정한 현대전 모델을 보여주면서 주변국가들의 참전을 포함한 상황을 시뮬레이션으로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전쟁의 국면이라는 것이 꼭 거시적이고 국가적인 차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당장 전쟁위협도가 높은 한반도에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상정하는 전쟁 상황은 나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 <워게임: 레드 드래곤>의 한국전쟁 시나리오. 6.25 전쟁 때와 비슷한 배치를 보여준다.

전쟁을 다루는 게임의 시도는 다양하다. 위에서 언급한 <워게임>과 같은 전략 단위에서의 접근도 있고, 각종 FPS게임이 보여주는 군인 시점에서의 전투 묘사도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전쟁위기가 실존에 가깝게 다가왔을 때 그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오는 게임도 존재한다. 오늘 소개할 전쟁 속 민간인의 삶을 담은 게임, <디스 워 오브 마인>이다.

폐허 속 생존을 위한 처절한 일대기

인상 깊은 헤밍웨이의 문구로 시작하는 게임은 인트로 문구 그대로의 삶이 벌어지는 전쟁 속의 현장을 그려내는 데 집중한다. 동유럽 어디쯤으로 추정되는 배경 도시는 내전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으며, 플레이어는 모든 인프라가 마비된 도시에 갇힌 생존자들을 휴전협상이 타결되는 순간까지 생존시켜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모두를 생존시키면 굿 엔딩, 누군가 죽거나 전멸하면 배드엔딩이다.

생존의 조건은 단순하지만 까다롭다. 일단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면 배고픔에 기운이 빠지다가 굶어 죽는다. 은신처를 제대로 수리하고 나름의 방어수단을 갖추지 못하면 심야에 몰려드는 약탈자들의 습격에 다치거나 약탈당해 위기에 빠진다. 점점 쌀쌀해지는 날씨에 맞추어 은신처의 온도를 맞추지 못하면 병에 걸려 앓다 죽는다. 부상이나 질병을 치료해야 하지만 당연히도 의약품은 희귀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나마 안전한 밤에 밖으로 나가 각종 자원을 구해야 하는데, 이 와중에 다른 생존자 그룹이나 군대와 맞닥뜨려 다치거나 죽기도 한다.

문제는 모든 자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식량은 당연히 구하기 힘들고, 그나마 안전한 밤에 몰래 나가 구할 수 있는 식량과 재료는 혼자 들고 오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효율적인 계획 없이 무작정 플레이하다 보면 서서히 줄어드는 물자와 그에 따른 상황 악화를 맞이하며 배드엔딩이 다가옴을 느낄 수 있는 형태를 게임은 가지고 있다.

상황을 타개하려는 플레이어 앞에 게임은 달콤하고 쉬운 방책 하나를 제시하는데, 바로 약탈이다. 밤을 틈타 폐허를 뒤져 보지만 당연히 식량이나 약품은 다른 생존자들도 수집하므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품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생존자 그룹의 아지트에 침입해 그들의 물건을 빼앗아 온다면 상황은 보다 쉽게 나아질 수 있다. 하지만 약탈은 물리적 충돌을 부를 수 있고, 실패할 경우 다치거나 죽는 일도 발생한다. 설령 약탈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만만찮은 또 하나의 과제를 던져 주는데, 바로 윤리의 문제다.

생존의 조건에는 의식주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조용한 집’의 물건을 약탈할 때 노인은 저항하지 않고 다만 음식만 남겨달라고 사정한다. 아랑곳않고 약탈하면 며칠 뒤 노부부는 굶어 죽는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은 약탈을 선택한 플레이어들에게 약탈의 결과를 담담하게 보여 준다. 대표적인 경우가 게임에 등장하는 건물 “조용한 집”이다. 여기 사는 노부부는 약탈에 대한 방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무단침입해서 물건을 약탈해도 그저 식량만이라도 남겨달라고 하소연할 뿐인데, 식량과 약품과 같은 희귀품이 넘쳐나 초중반의 위기를 손쉽게 넘길 수 있는 기회의 장소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렇게 노부부 집의 식량을 털어 가면, 며칠 뒤 재방문하면 굶어죽은 노인들을 보게 된다.

나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식량을 빼앗는 비윤리적 행동을 수행하는 것은 두 가지 갈등을 불러오는데, 첫 번째는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의 윤리 갈등이다.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플레이하는 게이머는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서 그동안 체득해 온 윤리적 규범을 벗어난 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갖는다. 설령 그 부담을 넘어선다 하더라도 게임은 두 번째 갈등의 장치를 마련했는데, 바로 생존자 그룹의 사기 저하다.

게임 내에서 약탈을 하거나 민간인을 살해하는 등의 행동을 저지르면 생존자 그룹 전체의 멘탈에 금이 간다. 캐릭터마다의 성향에 따라 다르지만, 윤리적 성격의 캐릭터일수록 이른바 ‘멘붕’의 영향은 크다. ‘살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자문하는 캐릭터의 상태창에 표시되는 감정상태는 점점 내려가 ‘슬픔’, ‘우울’을 거쳐 ‘멘탈붕괴’에 도달하고, 결국 은신처를 벗어나 행방불명이 되거나 심지어 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게임 속에서 윤리는 멘탈이라는 부분과 강하게 엮여져 있어 반드시 관리해야 하는 요소인 것이다.

▲ 민간인을 약탈하거나 해치는 등의 비윤리적 행위는 생존자들의 멘탈을 해친다. 생존자 그룹의 사기가 심하게 떨어질 경우 자살이 발생하기도 한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의 메시지는 이 지점에서 강렬하다. 전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게임은 초반엔 분명히 식량과 탄약, 약품이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지만, 게임을 끝까지 플레이해 보면 게임이 제시하는 답은 멘탈, 곧 생존에 대한 의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멘탈의 중요성은 다른 여러 곳의 장치에서도 드러난다. 생존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게임 안에는 담배, 커피와 같은 생필품이 아닌 기호품이 등장하며 주요한 거래물품의 위치를 갖는다. 커피애호가, 흡연자 같은 속성에 따라 생존자 캐릭터는 자신의 기호품이 끊기면 불안해하며, 멘탈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우울한 동료가 있을 경우에는 다른 캐릭터로 사기를 북돋는 대화를 시도할 수도 있으며, 도시 건물들에서 수집할 수 있는 부서진 기타를 수리하면 기타연주로 사기 진작의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인간성: 살아남는 것과 인간으로 살아남는 것의 차이

게임은 이러한 멘탈을 단순한 생존의지로만 내버려두지 않고 윤리적 문제와 결부시키면서 한 차원 무거운 주제로 변주한다. 오직 나만이 살아남겠다는 생각이 생존 의지라면, <디스 워 오브 마인>에서 드러나는 윤리와 연결된 멘탈은 우리가 이른바 ‘인간성’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도덕적 의무감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게임 속의 여러 이벤트와 장치들을 통해 게임은 인간성을 집어던진 채 살아남는 것이 가능한지, 또 그렇게 살아남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묻는다. 플레이어는 여러 속성을 가진 캐릭터 중 탈영병 출신으로 전투에 능하고 약탈에 특화된 캐릭터를 이용해 약탈과 살인을 중심으로 생존 전략을 펼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플레이는 실제 플레이어에게도 윤리적 부담을 안겨주며, 게임 내에서도 비윤리적 행위로 인해 계속 떨어지는 사기를 관리해줘야 하는 페널티를 안고 가야 하는 방법이다.

게임의 주제가 전쟁 속 인간성에 대한 질문이라는 사실은 엔딩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게임을 어떻게 끌어왔건간에 엔딩은 그동안 플레이어가 겪어 온 생존 일지들을 천천히 보여주는데, 등장하는 주제들은 거의 대부분이 플레이어가 전쟁 속에서 그 인간성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다뤄 왔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조용하고 천천히 펼쳐지는 일지는 당신의 살인 기록이나 도움을 청하는 어린 아이를 매몰차게 내몰았던 사실을 담담하게 보여 준다.

▲ 엔딩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상황마다 마주했던 윤리적 선택의 결과를 담담하게 읽어 주는 화면을 만난다. 무고한 민간인을 죽인 일들, 아픈 환자를 보살핀 일들과 같은 윤리와 도덕에 얽힌 이야기들이 천천히 지나가는 엔딩을 보면서 플레이어는 무엇을 느낄까.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행위가 각 캐릭터의 것이었다면, <디스 워 오브 마인>의 엔딩이 보여 주는 윤리적 행동의 결과는 플레이어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이기에 부담감의 수준이 남다르다. 제3자의 악행을 관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직접 윤리적 부담감을 걸머지고 선택의 기로에 섰던 자신의 기록을 돌아보는 것은 게임이 제공하는 인간성에 대한 성찰의 새로운 접근 방법이며, 플레이어에게 새로운 체험을 제공한다.

생존을 위해 정말 도덕을 저버릴 자신이 있는가?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한반도에 만약 전쟁이 난다면 어떻게 될까? 식량과 물을 챙기고 안전한 은신처를 생각하겠지만, <디스 워 오브 마인>을 경험해 본 사람은 또 하나의 질문에 다다를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 왔을 때 나는 주저없이 인간성을 저버릴 수 있을 것인가? 평화롭고 안정된 시기에 다져진 윤리적 의무감의 무게는 정말 생사를 알 수 없는 폐허 속에서 쉽게 벗어던질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만약 모든 도덕과 윤리를 집어던진 선택을 했다면 살아남은 뒤에도 그 과거의 행동이 이후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있는가? 게임을 통한 일종의 간접 체험은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게임은 애써 앞의 물음에 대한 답을 피하려 한다. 게임 속 카메라는 인물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상세한 표정을 제공하지 않으며, 흑과 백을 중심으로 한 어두운 화면 톤은 단순히 전쟁의 음울함을 표현하는 것 이상으로 게임이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가치판단을 배제하려는 느낌을 준다. 윤리적 선택지를 열어 두지만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 별다른 칭찬도 비난도 없이 그저 선택의 결과 자체만을 보여주는 최종 엔딩은 플레이어에게 정답없는 질문만을 던지고 지그시 바라보는 게임의 표정이다.

전쟁의 무서움은 물리적 파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인간은 오랜 시간동안의 사회화를 통해 나름의 윤리적 체계를 갖춘 주체이고, 그 모든 의무감을 집어치우고 자신의 생존만 바라보겠다는 생각은 실제 상황에선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평생의 트라우마를 갖는 PTSD 환자 같은 사람들의 아픔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디스 워 오브 마인>이 던지는 물음이 결코 판타지가 아님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에 답변하는 일은, 제발 그저 게임 안에서만 머물렀으면 좋겠다.


<Play the Game>

#01- 비욘드 어스, 인류는 어느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는가

#02- MMORPG의 장르적 특성과 워크래프트의 세계관 그리고 WOW

#03- 게임 속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04- 게임에도 정당해산 따위는 없다

#05- 스타크래프트, 윙코맨더3...우주를 다룬 최고의 게임은?

#06- 상호작용의 매체, 게임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07- 나의 삼국지는 그렇지 않아!

#08- 맞고만 치던 당신, 설날 고스톱 스코어는 얼마?

#09-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이 되어가는 이야기, XCOM

#10- 새마을운동 게임으로 정신과 이념을 교육한다굽쇼?

#11- 시뮬레이션 게임의 개척자 <심시티>를 통해 본 게임의 재현력

#12- 캐쉬템의 문제, 게임 아이템은 소유 가능한 물건인가?

#13- 아이 위해 쓰여진 이야기 같은 게임, ‘LOOM’의 우화

#14- 천만 직장인의 웃픈 블랙코미디, ‘내 꿈은 정규직’

#15- 오락실의 유산① 게이머에 대한 편견의 시작을 찾아서

서평- <제국의 게임>, 게임으로 인간을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사례

#16- 오락실의 유산② 동네고수에서 대도서관까지, ‘보는 게임’의 역사

#17- 오락실의 유산③ 한국 문화의 역사적 유물로서의 '오락실'

#18- 고립된 인간의 표정이 말하는 것들, 워킹데드

#19- 영화 ‘픽셀’, 영화로는 풀어내기 힘들었던 픽셀의 향수

#20- 게임이 무서운가? 근거 없는 게임 포비아 넘어서기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