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남북 고위급 접촉 합의가 이뤄진 이후 동아시아 정세가 급격히 움직이고 있다. 김양건 북한 노동당 비서가 남북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대화 분위기를 이어 가겠다는 뜻을 밝혔고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 전승절 기념 열병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남북이 군사적 대치를 이어가던 상황에서 북한의 최룡해 비서도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기 때문에 이후 우리 정부의 외교 행보에 대한 여러 전망과 제언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다.

조선일보는 28일 1면 <靑 “대화 이제 시작” 北 “합의 준수”> 제하의 기사에서 우리 정부가 ‘낙관론’을 경계하면서도 남북 대화 국면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북한도 ‘합의 준수’와 ‘대담한 관계 개선’을 공식 언급하면서 본격적인 대화 국면이 조성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3면에 박근혜 대통령이 다음달 2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9~10월의 한·미·중 3국 간 연쇄회담을 추진하는 등 하반기 정상외교에 나서고 있다면서 “정부는 특히 이번 연쇄 정상회담을 한국 주도의 대북 공조 체제를 구축하는 발판으로 삼겠다는 전략”이라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외교 당국은 중·미와의 연쇄 정상회담을 앞두고 남북 간 ‘준 전시’ 군사 대치 상황이 결과적으로 호재가 됐다고 보고있다”면서 미국 및 중국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 문제를 주요하게 다뤄 동아시아 외교전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발언도 전했다. 미국, 중국, 일본을 모두 끌어들여 북핵문제 해결에 대한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는 국면이 열린다는 것이다.

▲ 조선일보 28일자 3면 기사

중국이 미국, 일본과 대립하는 구도가 펼쳐진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전승절 참가가 미국, 일본에 부정적인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날 중앙일보는 이러한 우려 역시 우리 정부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취지로 보도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3면 <열병식 참석 발표 전 “한·미 동맹” 10차례 강조>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외교부가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30~31일 미국 알래스커주 앵커리지에서 열리는 북극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발표하며 유난히 ‘한·미동맹’을 강조했는데, 그 직후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열병식 참석 사실이 공개됐다며 이를 우리 정부가 미국을 배려한 결과로 해석했다. 중앙일보는 중국 전승절 기념 행사에 일본이 참가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이 참가하는 것을 두고 일본 내에서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우려가 나온다면서도 ‘운용의 묘’를 발휘해 일본을 배제시킨다는 신호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전문가의 발언을 전했다.

▲ 중앙일보 28일자 사설

중앙일보는 사설에서도 이번 중국 전승절 열병식 참가를 박근혜 정부가 ‘호기’로 삼아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미국과 일본이 불편해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열병식에 참석하기로 한 것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다는 확신 때문”이라면서 “이번 방문에서 원했던 걸 챙기지 못한다면 안 가느니만 못했던 꼴이 된다”고 지적했다. 중앙일보는 중국이 북한을 제어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면서도 미국, 일본의 우려를 불식시켜야 하고 최룡해 비서를 적절한 인사가 만나는 것으로 남북관계의 진전도 모색해 외교적 성과를 챙겨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 동아일보 28일자 5면 기사

박근혜 대통령의 전승절 열병식 참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동아일보도 마찬가지였다. 동아일보는 5면에 <60년전 김일성 섰던 자리…박 대통령, 시진핑과 나란히 선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배치하고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 대해 “가까워진 한중관계와 얼어붙은 북-중관계를 극병하게 대비시키는 장면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면서 열병식 당일 시진핑 국가주석이 박근혜 대통령을 자신의 바로 왼쪽 자리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오른쪽 자리에 배치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과거에는 박근혜 대통려이 설 것으로 예상되는 자리에 주로 북한의 지도자가 배치됐기 때문에 달라진 한중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계기기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 동아일보 28일자 사설

동아일보는 이날 <한중 정상회담, 한미중 ‘북핵 공조전략’ 이끌어내야>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앞서 중앙일보와 유사한 지적을 내놨다. 동아일보는 “장고 끝에 악수가 되지 않으려면 박근혜 정부의 외교 역량이 총동원돼야 한다”면서 “한중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이 시 주석으로부터 북한을 겨냥한 비핵화 경고를 이끌어내고 10월 한미회담에서 이를 발전시킨다면 북핵 공조의 한미중 창조적 교량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피력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미국이 박근혜 대통령의 전승절 열병식 참석에 대해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일본과 북한 대응에 협력을 다짐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라면서 “미국과 동맹인 한국이 인도처럼 미중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편다면 양쪽에서 전략적 불신을 받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확고한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미국과의 안보협력에 관한 신뢰를 강화하면서 한중 정상회담으로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심화시켜 한국의 전략적 위상을 높여주기 바란다”고도 지적했는데 한미동맹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수준까지 중국에 경도돼서는 안 된다는 우려를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사실 동아일보의 이런 태도는 보수언론 전체가 처한 딜레마를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과 사드(THAAD)배치 문제가 ‘양자택일’의 선택지처럼 제시되던 시기만 해도 보수언론들은 이를 ‘친중외교’의 실패인 것처럼 묘사했다. 이후 한일관계의 개선이 요구될 때나 북한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의 개발 징후를 보였을 때, 중국이 일본과 관계 개선을 위한 행보를 보일 때 등에서 보수언론은 어김없이 ‘친중외교’를 주도한 외교라인의 교체를 요구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남북관계를 실질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고 미국, 중국, 일본 사이에서 외교적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행보를 본격적으로 이어가려는 상황에서 보수언론의 선택은 하나같이 장밋빛 전망을 전하는 것이라는 게 이날 지면에서 드러났다. 여기서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은 보수언론이 한미일 동맹을 중시하는 기존의 태도를 버린 것인지 여부다. 한미일 동맹의 강화를 요구하는 것은 보수언론의 ‘관점’에 속하는 것일텐데, 이날의 지면은 결국 정권의 성공을 위해 ‘관점’을 포기한 것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이 전승절 열병식에 참가한 이후 제대로 된 외교적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보수언론은 또다시 한미일 동맹의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우리 정부는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의 고착화라는 외교적 ‘함정’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런 구도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보수언론 스스로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한미동맹의 강화를 외치는 보수언론의 목소리는 자기 자신조차도 완전히 믿지 않는 ‘도그마’로 기능하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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