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고에서 나는 굉장히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한국 사회의 빈약한 합의 구조 위에서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는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을 것이란 예상이었다. 어떠한 반전도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고, 현재까지는 예상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개특위를 바라보던 시민들의 기대는 그 크기에 비례해 실망으로 바껴가는 중이다.

정개특위는 의원정수와 비례대표 의석수, 농어촌 대표성 문제를 놓고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27일 열린 공직선거법심사소위원회에서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벌써 세 번째다. 새누리당은 28일 지역구 의석수에 대한 당론을 정하기 위해 의원총회를 연다. 이 결과에 따라 여야는 31일 열리는 정개특위에서 의원정수와 의석수 배분 문제를 처리한다는 계획이다.

▲ 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공직선거법심사소위에서 여당 간사인 정문헌 소위원장(오른쪽)과 야당 간사인 김태년 의원이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변화를 원하는 유권자 입장에서 희망과 낙관의 근거를 찾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여야의 논의가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처럼 진행될 경우, 선거제도는 현행대로 두고 선거구만 조정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농어촌 지역 의원들의 항의가 정개특위 때마다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개인적으로 최악의 시나리오라 생각하는 비례의석 축소까지도 가능하게 만들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지난 24일 정의당 광주시당, 노동당 광주시당, 광주녹색당과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은 새정치민주연합 광주시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새정치민주연합이 합의한 ‘의원정수 300명 고정'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 권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수용을 촉구하며, 현재의 정개특위 논의 방향은 양대 정당 독식 구조의 ‘현상유지’라 꼬집었다.

이어 25일에는 전국 250개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2015 정치개혁시민연대'를 발족했다. 이들은 의원정수 확대,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실시 외에도 ▲18세로 선거연령 하향 조정 ▲사전투표소 설치 확대 ▲투표시간 9시로 연장 ▲정당설립 요건 완화 ▲지역구 30% 이상 여성공천 의무화 등을 주장했다. 올해 초 정개특위가 구성될 때 기대했던 선거제도 개혁 과제를 총망라한 것이다.

26일 오전에는 강원지역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실시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연이어 27일에는 경남지역에서 새정치민주연합까지 포함한 야4당이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했다. 정개특위의 논의에서 빠진 가장 중요한 부분을 소수야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소수정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의 공동행동은 늦었지만 환영할 만한 일이다. 우선 거대 양당의 이해관계보다 더 큰 차원의 논의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수렁에 빠진 정개특위의 논의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인지 환기해 볼 수 있는 계기도 마련해준다. 마지막으로 이번 정개특위 논의의 마지막 균형점이 어디쯤일지 예상해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먼저 정개특위 내의 쟁점을 살펴보자.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비례대표 의석수에 대한 문제고, 둘째는 농어촌 지역구 의석수의 문제다. 의원정수를 300으로 고정하겠다고 여야가 합의한 순간, 이 두 문제는 하나의 문제가 되었다. 현재의 지역구 의석수를 고정한 상태로 헌재의 판결에 따라 선거구를 조정하면 인구가 적은 농어촌 지역의 의석수는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농어촌 지역구 의원들이 농어촌 대표성을 근거로 지역구 의석을 늘려 농어촌 지역 의석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고정된 의원정수 때문에 비례대표 의석수의 축소를 가져온다. 제로섬(zero-sum) 게임이다.

질문이 농어촌 지역구 의석과 비례대표 의석이 서로 경쟁하는 제로섬 게임으로 주어지니, 이해당사자들 간에 합의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질문을 살짝 바꿔보면 어떨까? 사실 질문 전체를 바꿀 필요도 없다. 질문에 주어진 전제 하나만 바꾸면 합의에 접근할 길이 생긴다. 이제 시민사회단체들의 요구 중 하나에 귀기울여 보자. 만약 의원정수를 360으로 늘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일단 정개특위에서 문제가 되는 두 가지 쟁점 모두 선거제도를 고민함에 있어 충분히 고려할 만한 가치라고 볼 수 있다. 유권자의 의사를 의석에 비례시키는 것과 상대적으로 소수인 농어촌 지역의 대표성을 유지하는 것 모두 한국 사회에 필요한 일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만 아니라면, 둘 다 우리 사회에 필요하고 중요한 가치임을 인정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여야 합의로 고정시켜놓은 의원정수만 풀면 된다. 의원정수를 고정하는 것이 선거제도의 비례성과 대표성을 높이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면, 의원정수를 확대하고 이 문제를 풀면 된다. 비례성과 대표성 중에 하나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 둘 모두를 살리는 방향으로 문제를 바꾸면 된다. 제로섬(zero-sum)이 아니라 윈윈(win-win)으로 가는 길이다.

반론이 들린다. ‘국민정서법' 위반이라는 것, 국민들은 의원정수 확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여론조사 결과가 이미 잘 말해주고 있다는 것. 나는 앞에서 했던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과연 제대로 된 질문을 국민들에게 한 적이 있는지? 유권자들에게 ‘내 표가 사표가 되어도 좋습니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는지? 의원 수를 늘려서 사표 문제와 농어촌 대표성 문제가 일정하게 해결 가능하더라도 의원정수 확대에 반대하는지?

정개특위는 전후반을 거쳐 연장전까지 마무리되어 가는 모양새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글을 쓰는 내내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누군가의 노래 가사와 “상이한 문제설정은 상이한 대답과 상이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누군가의 글귀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좋은 질문을 들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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