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에서 존재감이 상실된 남과 북

‘피 말리는’ 무박 4일 43시간의 남북협상이 끝났다. 그만큼 긴장이 고조되고 하루하루가 매우 긴박했다는 의미이다. 이번 협상결과를 놓고 승패를 따지는 것 자체가 부질없고 무의미하지만 말 많고 탈도 많은 한국사회에서는 꼭 따져야만 직성이 풀린다. 경쟁과 성공과 승리의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대방이 북한이지 않는가.

협상결과에 대한 평가도 난무하다. 대부분의 회담이 평가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어렵지만 남북회담의 경우는 아전인수격 평가가 특히 심하다. 일단 이번 과정에서 전쟁에 광분하여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총무장하여 초전박살을 내겠다는 냉전주의자들이 머쓱해졌다. 그래도 보수세력의 안보결집효과를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여론조사전문기관인 '알앤써치'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난 23일의 대통령 지지율이 50.0%를 기록해 19일의 지지율 34.3%보다 15.7% 크게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명박 정부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이 정도면 성공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최고 존엄'인 박근혜 대통령이 원칙을 고수한 승부수가 먹혔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그 원칙이란 것이 ‘확실한 사과’라고 분명히 밝혔는데, 합의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 대목에서 보수언론들의 논조가 꼬여버렸다. 그래서 합의서 2항의 유감표명을 이례적이라면서 실질적인 사과라고 의미부여를 했다. 과거 북한이 수차례 표명했던 유감은 진정성없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지만 이번의 유감은 박근혜의 뚝심 앞에 굴복한 의미있는 사과란다. 북한의 체면을 생각하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진정성없는 아베의 사과에 대해서 정면 비판을 삼가는 이유는 뭘까? 정말 박근령씨의 말대로 일본 총리에게 계속해서 사과를 요구하는 게 창피해서일까?

북한의 최고 존엄인 김정은의 노림수에 당했다는 평가는 과도하다. 대북확성기는 중단했지만 자신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한미합동군사훈련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담을 수 없었다. 북한의 대화에 임하는 적극적인 자세와 ‘유감’ 표명의 굴욕적인 모습을 연출한 것은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이다. 합의서 내용의 많은 부분이 북한의 요구에 대한 남한의 양보로 채워진 듯 보이지만 박근혜 정부에게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대통령으로서 박근혜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긍정적으로 기록되기는 어렵지만 지지층의 높은 충성도를 유도하고 중간층을 확장할 힘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남은 임기 동안 지지율을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군사적 긴장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적었지만 서해안과 비무장지대는 상시적 국지분쟁 지역이 되었고 지배세력들이 전쟁을 합리적 선택영역으로 사유하고 있기 때문에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이 그 어느 때 보다 소중한 것이다.

전쟁의 가능성이 낮다는 것은 전작권이 없고 의지도 박약한 박근혜 정부와 그 뒤에서 팔짱 끼며 희번득거리고 있는 미국이 두려워 무모한 도발은 공멸을 불러오기 때문에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 없는 김정은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번 남북대화의 배경을 놓고 많은 설이 난무하지만 필자의 좁은 식견으로 볼 때는 동북아시아에서 남과 북 모두가 존재감을 상실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서로 체면과 명분을 존중하면서 활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무관심에서 관심의 대상으로

현재 동북아시아는 5개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1개의 전체주의 국가가 3 vs. 3 스트리트 파이터의 대결구도를 형성하면서 2인 3각 경기를 펼치는 복잡한 공간이다. 북중러의 삼각관계를 보면, 지난 2013년 3차 핵실험 강행 이후 최대 후견국이자 혈맹이었던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북한으로서는 든든한 우방이 절실해졌다. 시진핑이 김정은보다 박근혜를 먼저 만난 것은 충격적이었다. 특히 장성택 숙청은 북러관계를 신밀월시대로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다. 북한은 대외무역의 9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파트너가 필요했고 러시아를 선택하여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은 올해를 ‘북러 친선의 해’로 정하고 경제·군사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2014년 4월에 경제공동회의가 열려 북한의 채무 110억불 중 90%인 100억불을 탕감해줘서 양국간 경제협력이 정상화되었다. 이는 푸틴의 신동방정책과 맞아 떨어지기도 하다.

군사협력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북한은 러시아를 통해 낙후된 재래식 무기를 현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북한이 구입하기 원하는 러시아 첨단 무기는 방공망을 강화하기 위한 S-300 지대공 미사일, 미그-29와 수호이-35 전투기, 4천톤 급 이상의 대형 군함과 T-80탱크, T-90탱크 등으로 알려졌다. 사실 북한의 핵기술과 장거리 미사일 원천기술은 구소련에서 들어왔고, 금년 봄 실험에서 성공한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에 사용된 부품도 일본 무역상을 통해서 들어왔지만 소련제라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러시아와의 군사교류는 역사가 깊다. 올 가을에는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서구 제국주의의 우려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북한이 재래식무기를 현대화하고 핵무기 개발 노하우까지 알아낼까봐 우려하면서 북러관계를 ‘위험한 관계’라고 한다.

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러시아는 북한에게 계륵같은 존재다. 러시아가 장기적 전략을 가지고 북한에 접근하는 반면 북한은 러시아가 얻는 만큼의 경제적 전략적 이익을 얻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양측의 경제협력 규모가 1억달러도 채 안 된다. 전체 교역규모가 너무 작기 때문에 북한의 경제난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며 따라서 서로 신뢰할 만한 경협 파트너가 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중국과의 관계 회복이 절실하지만 속도가 너무 느리다. 최근 중러간 신밀월이 북한에 긍정적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지만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중러합동군사훈련은 미일합동군사훈련에 맞대응하는 것으로 동북아 불안정요인의 핵심이 될 것이다. 미국의 의도적 무시 또한 북한의 어려움을 호전시키기에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남한과의 경제협력을 통해서 북한 경제의 활로를 모색하는 실리적 선택을 한 것이다. 북한이 이번 접촉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 중단은 요구하지 않으면서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를 거론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한미일 관계에서 한국의 존재감 상실은 진작 시작되었다. 일본의 재무장을 추구하고 있는 아베가 지난 4월 28일 미국을 방문하여 상하의원 합동연설을 한 것은 패전 70주년에 맞춰 2차대전 전범국가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가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를 지지하면서 한일간의 역사갈등에서 일본의 입장을 두둔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베의 왜곡된 역사인식에는 미국의 지지에 의해 가능해 진 것이다. 박근혜가 임기 초반에는 일본과 북한에 대한 단호한 태도로 국내 지지율에서 재미를 많이 봤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짝사랑의 상대인 미국은 아베를 치켜세우며 격려해 주라고 당부했다. 그럴 때 마다 상대의 잘못을 탓하는 것으로 자신의 무능을 덮었는데, 이제 그 시점도 지나가고 있다. 그렇게 박근혜 정부는 왜소해 진 것이다. 북한 문제는 다음 ‘도발’을 기다리는 것 이외에 하는 일이 없었는데, 절묘한 시점에 긴장을 고조시켜 남북대화가 성사되었다. 당분간 남북한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남과 북이 관심을 받고 싶으면 관계 개선을 통해 교류협력을 활성화해서 동북아를 평화의 공간으로 재창출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박근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미국의 정책적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또한 일본에 의해 촉발된 동북아시아 지역의 갈등과 긴장이 완화되려면 미국의 입장을 변화시켜야 한다. 미국은 이제라도 일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나아가 일본으로 하여금 한일문제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진정한 반성과 사죄의 뜻을 표명할 수 있도록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것이 동북아시아가 평화의 공간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첩경이다. 하지만 이 또한 부질없는 잔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아무튼 전쟁의 공포에서 해방은 되었다. 그런데 경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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