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비준를 둘러싸고 벌이는 정치권의 행태가 유치하기 짝이 없다. 집권세력은 한국 국회가 먼저 비준해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압박한다며 서둔다. 선제공격을 통해 미국 내에서 거론되는 재협상론에 쐐기를 박는다는 전략이란다. 노무현 집권시 반대를 소리조차 못 내던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으로 탈바꿈했다고 아무런 책임의식도 없이 조기비준 결사반대를 외친다. 그 틈을 비집고 FTA 선본장인 노무현 전임 대통령이 재협상론을 들고 정부-여당을 공격하고 나섰다.

▲ 12일자 조선일보 5면.
미국이 금융위기로 직격탄을 맞았지만 여전히 세계유일의 초강대국이다. 그 미국이 한국이 FTA를 먼저 비준하면 외교적 압박감을 느껴 비준에 나선다니 무슨 허황한 소리인지 모르겠다. 미국은 지금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에 처해 있다. 경제체제를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할 긴박한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외에도 북한, 이란, 이라크 등 외교적·군사적 난제가 산적해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미 FTA는 우선순위에 낄 당면현안이 아니다. 미국은 값싼 수입품으로 저물가의 혜택을 입었다. 수출국의 저임금이 소득이전의 효과를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제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켜 고용감소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집단도산을 예고하고 있는 자동차 산업이다. 그 탓에 산업계·노동계에는 보호무역주의가 팽배하다. 오바마 당선자가 유세 중에 반복적으로 FTA에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맥락에서 민주당 정부는 FTA를 포함해 통상정책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한다는 판단이 옳다.

정치일정을 보더라도 FTA 조기비준은 불가능하다. 의회가 임기말 회기를 연다고 하더라도 FTA가 긴급의안이 될 수 없다. 새해 들어서는 새 대통령 취임, 새 의회의 원 구성에 이어 고위직 인사청문회를 갖는다. 여기에다 경제현안에 대한 논의가 긴박하다. 한국은 동의안을 찬반으로 결정하나 미국의회는 90일간의 청문회를 거쳐 비준에 들어간다. 체결순위에 따라 콜롬비아, 파나마가 한국에 앞서 기다리고 있다. 한국이 아무리 설쳐도 내년 하반기에도 비준을 기대하기 어렵다.

경제 살리기로 서둔다니 몰라도 너무 모른다. 한·미 FTA를 단순히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철폐하는 역내교역의 자유화로 이해하니까 이런 소리가 나온다. FTA만 발효하면 당장 대미수출이 급증할 것으로 잘못 아는 것이다. 미국의 평균수입관세율은 0~3%이다. 관세장벽이 거의 없어 관세를 철폐해도 수출증대 효과가 미미하다. 무엇보다도 경기침체로 수입수요가 감퇴하여 수출증대를 기대하기 어려운데 웬 난리인가?

한·미 FTA는 포괄적 경제통합으로서 한국경제의 미국 종속화를 의미한다. 협정에 맞춰 법령체계를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 수십개의 관련법을 개폐해야 하고 이에 따라 경제제도·사회체제에 일대변혁이 일어난다. 비준동의안 문서가 무려 2526쪽이나 된다. 이 방대하고 난해하며 전문적인 내용을 얼마나 파악했는지 모르겠다. 이 중에는 국민경제·사회생활에 파괴적인 악영향을 미칠 독소내용이 수두룩하다. 투자자국가제소권만 해도 미국투자자에게 한국법의 초월적 지위를 부여한다. 미국기업이 국가정책을 간섭하고 국제분쟁으로 가져가면 사법권마저 침해한다.

많은 국민들은 구체적 내용을 잘 모른다. 노무현 정권이 국민적 논의도, 국회와 협의도 무시한 채 졸속·밀실협상을 추진하여 그 내용을 기밀에 부쳤기 때문이다. 영문으로 된 협정문의 일부를 그것도 소수의 국회의원에게만 잠시만 열람을 허용했다. 복사도 필기도 금지했다. 국민은 물론이고 국회에게도 알리지 않고 협정을 체결했던 것이다. 그리곤 내용을 단순화해 소비자 혜택이 는다느니 중소기업 수출이 증가한다느니 하는 따위의 기만적인 홍보에 무려 165억원을 퍼부었다. 반면에 반대광고와 반대시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왔다.

그런데 그가 무슨 낯으로 재협상을 말하는지 참으로 뻔뻔하다. 전경의 곤봉에 맞아 선혈이 낭자한 농민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니 하는 말이다. 먼저 통상절차법을 제정하라. 한·미 FTA는 불평등 협정이니 미국이 폐기한다면 따르는 게 국익이다. 아니면 재협상을 통해 독소적 내용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피해가 예상되는 분야·산업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 졸속협상으로 내용도 잘 모르면서 졸속비준을 서둘면 나라 망신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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