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중심 자유주의는 개인을 자신의 이익을 합리적 절차를 통해 추구하는 자아라고 파악했다. 존 롤스(John Rawls)가 대표적 인물 아닐까 싶다. 여러 명이 피자를 가장 공정하게 나누어 먹는 방법을 롤스는 묻는다. 답은 명료하다. 가장 나중에 먹을 차례가 오는 사람이 나누면 된다. 개인이 합리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권리중심 자유주의는 공동체에 무관심하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합리적 절차에 의해 이익을 추구하는 자아만을 강조할 일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공동체적 관계에서 자아를 형성해가는 일이 더 바람직하니 그런 자아를 강조해보자는 반박이다.

공동체 자유주의자인 마이클 왈쩌(Michael Walzer)가 대표적으로 그런 주장을 폈다. 그는 사회 공동체를 이루는 각 하위 영역을 규정한 다음, 그 하위 영역 각자에는 어울리는 정의의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경제 영역에는 부의 축적, 정치 영역에서는 권력, 교육 영역에는 명예, 예술 영역에는 창조성 등이 각 영역의 정의로운 가치다. 각 영역에서 형성된 법과 규칙을 준수하며 가치를 획득하는 일은 결코 정의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 구본홍 YTN 사장ⓒ송선영
영역과 영역 사이에는 높은 담장이 있단다. 하나의 가치가 그 담장을 넘지 않고 자신의 영역 안에 머무를 때 사회적 정의는 실현된다. 한 영역에서의 가치를 다른 영역으로 이전시켜 가는 일은 전제(專制)다. 잘 생긴 외모의 학생이 선생의 사랑을 더 받고자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학교는 외모를 따지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본홍 낙하 사건. 왈쩌 식으로 말하자면 이는 전제다. 권력이 모든 가치에 다 군림하려는 사건이다. 사회적 가치의 다양성은 소멸하려는 전제적 기획이다. 정치에서의 가치가 언론에서의 정의적 가치를 압도하는 일은 공동체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언론은 어디까지나 공정해야 하고, 그를 통해 사회적 가치의 다양성이 준수되는지 감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낙하 사건

구본홍 낙하 사건은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뒤흔드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다. 그 심각성을 모른 채, 언론의 정의적 가치를 지키려 한다고 해서 언론인들을 징계하는 일은 더더욱 심각한 문제다. 시민들이 YTN 사옥 앞에 모이고, 타 언론사들이 YTN 동료를 지지하는 것도 한국 사회 공동체에 전제적 위협이 가해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이를 YTN 내부의 문제라고 축소해버린다. 구본홍 자신이 그러하고, 총리가 그러했고, 언론정책을 펴는 일부 관료들이 축소해석에 동조하고 있다. 한국 사회를 정치 결사체 정도로 그릇되게 생각하는 인사들이 여기저기서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 어디에도 심각한 고민의 흔적은 없고 전제로 밀어붙이는 언사만 횡행할 뿐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구본홍 낙하산 사건을 ‘사적’ 사건으로 규정하고 나섰다. 낙하산 사건을 문제 삼는 방송 내용을 사사로이 이용했다며 ‘시청자 사과’라는 중징계를 결정했다. 공정성을 지켜내기 위한 존재론적 항의조차 사사롭다는 판단을 내렸다. ‘구본홍은 개인 의지에 의해 낙하산을 폈을 뿐이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이른바 방송 전문가들이 모인 준 국가기구다. 이 기구 안에서 가장 강조되는 가치는 전문성이다. 위원들의 자격을 규정한 법령이 없긴 하다. 하지만 심의위원 직무 조항에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채 수행할 수 없는 일들이 나열된 것으로 미뤄 보더라도 전문성은 위원들에게 있어 결정적 자격 요건일 수밖에 없다.

▲ 서울 목동 방통심의위 ⓒ미디어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이번 결정을 강력 비판하고 나선 자유선진당의 박선영 대변인은 위원회 설치 자체가 위헌적 요소가 있다는 법리적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위원회는 그런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전문성을 더욱 발휘할 뿐 아니라, 전문성에 관한한 자기 입증을 해야 할 책무(accountability)를 진다. 그들의 준 사법적 판정이 방송 사업자의 사업 지속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궁극적으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청자 사과’라는 중징계를 위해 어떤 해석을 했고, 판단을 했는지를 알기 위해 몇 번의 회의록을 열람했다. 판정문과 회의록은 때로는 중요한 학문적 자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 안에는 해석을 둘러싸고 많은 다툼(debate)이 있었을 거라고 기대했다. 심의규정 자체가 허술한 것은 전문가들이 전문성을 앞세워서 서로 설득을 하는 충분한 다툼을 하라는 의미라고 평소에 생각해왔다.

국고를 사용하는 준 국가기구에서 전문가들이 벌인 회의록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회의록을 읽어냈다. 공정성 심의를 했지만 누구도 공정성 논의를 펼치지 않았다. YTN 사건을 사적인 사건으로 규정해내는 논리 지점에 이르러서는 위헌 여지를 따지기 전에 전문성 여부를 따지는 것이 더 순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 윤리나 철학에 대한 나의 견해는 공동체 자유주의자인 왈쩌로부터도 많이 떨어져 있다. 개인권리중심주의자인 롤스로부터는 더 많이 떨어져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좌’로 많이 치우쳐 있다. 하지만 ‘좌’에 치우친 용어나 사상으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좌’라는 말에는 아예 귀도 기울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오른 쪽은 몇 클릭해서 왈쩌를, 또 몇 클릭 더 해서 롤스를 들먹였다.

많은 우향 우 클릭으로 만난 롤스를 다시 언급해보자. 롤스에서의 정의는 절차적 공정성이다. 법과 제도의 정의는 그것이 정해지는 절차가 정의로운가에 달려 있다. 그 절차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선호와 관계없는 합리성을 발휘해야 한다. 개인적 이익이나 편견을 배제한 채 합리적으로 정의를 추구해가야 한다. 심의위원들의 합리성 발휘는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해석, 주장, 설득 논리일 것이고, 그것 없이는 공정한 절차를 거친 판단이었다고 할 수 없다.

이번 결정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스스로 낙하시키는 사건이다. 전문성? 그런 것 관심 없음. 그러나 검정색을 싫어하는 개인적 선호 있음. 정치 결사체적 성격 약간 지님. 6:3 황금비율에서 잘 어긋나지 않음. 어쩜 우리도 낙하산인지 모름 등등 커밍 아웃 사건이다.

▲ 10월 8일 YTN <뉴스Q> 앵커들이 '블랙투쟁'을 하고 있다.

더 떨어지지 말자

이번 판단을 내린 심의위원 중 한 명과의 인연을 한 토막 소개하며 정리하자. 당시 그는 한 방송국의 사장이었고 나는 시청자 위원이었다. 시청자위원회에서 몇 위원이 대통령 탄핵방송의 공정성에 시비를 걸었다. 종교를 주 내용으로 삼는 방송인지라 별다른 불공정 시비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시청자위원 몇몇이 전체적으로 방송이 불공정하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질문을 던졌다. 어떤 점에 그런가하고. 전반적으로 그렇단다.

듣고 있던 사장은 특별히 그런 부분이 없었다며 구체적으로 지적해주고, 공정성에 대한 규정을 명확히 해주면 시정하겠다고 답변했다. 같은 말을 보탰던 기억이 있다. 공정성 시비를 걸기 위해서는 많은 전문성과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한데, 느낌으로만 전달한다면 시청자 위원회가 언론으로부터 쓸데없는 오해를 받는다는 쪽으로 말했다.

편한 말투로 전하지만 그 때 상황이란 여간 살벌하지 않았다. 지금 방통위 심의위원이며 그 때 사장이던 분은 그 분위기를 잘 기억하리라 믿는다. 그 심했던 소란을 기억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몇 번의 회의록에서 그 심의위원은 티끌만큼도 전문성을 내비치지 않는다. 다른 심의위원들도 마찬가지지만 공정성 시비를 겪었던 언론인이기에 그의 발언에 더욱 눈길이 갔다.

왈쩌 식으로 말하면 그는 방송 영역에서 방송 영역으로 옮겨 그 가치 실현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과거 사장 시절은 잊고 있는 듯하다. 태도가 달라진 모양이다. 왜 공정성에 대해 심각한 논의를 펴지 않는 것일까. 왜 심각하게 토론하자고 권유하지 않을까. 그런 경험이 있었음을 고백하고 제대로 이야기하자고 하지 않을까. 그가 혹 자신이 현재 몸 담고 있는 영역이 정치 영역이라 여기기 때문에 권력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궁리하고 있는 탓은 아닐까.

모든 것이 떨어지는 세상이다. 떨어지기를 멈췄다는 소식만 들어도 반가운 요즘 세상이다. 더 이상 떨어트리지도 말고, 떨어지지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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