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개봉한 영화 <픽셀>은 흥미로운 상상 하나에서 시작한다. 1982년, 아케이드게임 챔피언십 대회의 영상을 담은 우주선과 조우한 어느 외계인은 게임 영상을 지구의 침공 메시지로 알아듣고, 게임 속의 오브젝트들을 그대로 무기로 삼아 지구를 침공한다는 이야기다. <팩맨>이 도시를 집어 삼키고 <갤러그> 속의 몬스터들이 괌의 미 공군 기지를 폭격하는 기상천외한 현실을 왕년의 게이머들이 돌파해 나간다는 줄거리다.

* 영화 <픽셀>의 시작이 된 패트릭 진의 단편영화. 이 영상의 컨셉에 이야기를 붙여 장편영화가 되었다.

영화로서 <픽셀>의 재미는 사실 대단한 수준은 아니다. 80년대 아케이드 게임의 경험이 그리 보편적인 것도 아니고, 그나마도 미국 위주의 환경인지라 한국인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려운 요소들이 한가득이다. 한국에서 <큐버트>나 <센티피드> 같은 게임 경험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소재들을 가지고 게임 캐릭터의 지구 침공을 끌어내기까지 펼치는 서사의 과도한 비약은 신통찮은 흥행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영화를 다루는 코너가 아니므로 <픽셀>의 영화적 의미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게임 요소들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있을 것이다. <픽셀>에서 볼 수 있는 고전 게임들은 이미 많은 블로그에서 소개한 바 있으니 굳이 다룰 필요가 없어 여기서는 <픽셀>이라는 제목에 담긴 의미를 살펴 보고자 한다.

픽셀: 기술적 한계가 가져온 새로운 표현양식

Picture Element의 줄인말인 픽셀(Pixel)은 사전적 의미로는 점-선-면의 ‘점’이다. 디지털 기기에서 시각 이미지를 표시하기 위해서는 평면상에 가로세로의 좌표값을 매기고 각 좌표값마다 어떤 색의 점을 찍을지를 데이터로 정의하는 작업을 거친다. 점을 찍어 이미지를 표시하는 방법은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조르주 쇠라의 점묘화까지도 가겠으나, 게임에서나 영화 <픽셀>에서 사용하는 의미로서의 픽셀은 그보다는 좁은 의미다. 8비트 수준의 우툴두툴한 이미지를 가리킨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 <슈퍼마리오>의 마리오 픽셀 이미지. 16X16의 총 32개 픽셀로 그렸다. 사이즈가 클수록 그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모자이크 느낌이 난다.

마치 모자이크를 씌운 듯한 이런 낮은 해상도는 일부러 구현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기기가 가진 한계 때문이었다. 게임 그래픽은 마리오가 서 있는 이미지 한 장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점프하는 마리오, 달리는 마리오, 떨어지는 마리오 등을 하나하나 그린 다음 상황에 맞게 움직여 줘야 하기 때문에 정지화면이나 단순 애니메이션보다 많은 용량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7-80년대 개인용 컴퓨터의 히트상품이었던 애플 II의 메인 메모리 용량은 48KB였다. 요즘의 PC들이 보통 갖추는 기본 메모리가 4GB수준임을 생각하면 약 9만배 수준의 차이다.

기술적 한계는 게임 디자이너들에게 강한 추상화를 요구했다. 아마도 마리오의 원화가가 생각했을 주인공 캐릭터는 저런 점들의 조합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컴퓨터 게임 안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캐릭터 이미지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만을 남긴 채 단순화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빨간 모자, 파란 멜빵바지, 콧수염만이 제한된 용량 하에서 캐릭터의 특징을 표현하는 요소로 살아남았다.

최근의 고해상도 이미지와 비교해 본다면 퀄리티의 차이가 극명함이 분명한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낮은 해상도의 그래픽이 나름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기술적으로 훌륭한 해상도의 그래픽이 가능한 시점인데도 어떤 게임들은 일부러 8비트 픽셀 느낌을 내는 그래픽을 도입해 레트로한 느낌을 표현하려고 하고, 고해상도 폴리곤으로 그려내어 아름다운 영상미를 보여준 <겨울왕국>은 누군가가 8비트 픽셀그래픽 버전, 그것도 게임에 사용되는 바로 그 방식으로 새로 그려내기도 했다.

* <frozen: 8bit cinema>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을 고전게임 느낌을 활용해 새로 그려냈다. 심지어는 사용되는 사운드도 8비트다.

표현양식으로 자리한 픽셀이미지 - 낮은 해상도의 공백은 상상력이 채운다

낮은 해상도임에도 불구하고 고전게임의 양식에 대한 향수가 이처럼 존재하는 것은 해상도가 낮을수록 상상력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낮은 해상도로 구현하여 생략된 부분은 게이머의 상상력으로 채워진다. 어린 시절 제한된 기기가 제공한 낮은 해상도의 픽셀 덩어리는 누군가에겐 대마법사, 누군가에겐 용사였다. 각자의 상상 속에 빚어진 심상은 아마도 또렷하고 완연하게 주어진 심상보다 게이머 본인의 경험 안에선 유일무이하고 남다를 수 있는 캐릭터였을 것이다.

이른바 고전게임의 ‘레트로함’ 이라고 불리는 특유의 감수성은 여기서 나온다. 소설과 같은 문자 텍스트 매체는 심상을 그려내기 위해 문자로 정황을 전달하는데, 픽셀 그래픽의 고전게임은 심상의 질료가 될 수 있는 픽셀 덩어리를 던져줌으로써 문자매체와는 또다른 방식으로 심상을 형성한다. <울티마>의 주인공인 아바타가 콧수염이 달렸는지, 키가 크고 갈색 머리인지를 게임이 알려주지는 않지만 게이머는 게임이 제공하는 픽셀 덩어리를 활용하여 각자의 상상 안에서 각자의 아바타에 대한 심상을 갖게 되고, 이는 기존의 매체와 게임이 갖는 ‘상을 맺는 방식’에서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 <울티마 5>의 게임 내 아바타 픽셀 이미지와 게임패키지의 아바타 아트워크. 단순히 시각이미지만으로는 의미가 없지만 게임 내의 다양한 맥락 안에 선 픽셀 덩어리는 아트워크 이상의 심상을 게이머에게 제공하는 상상의 질료가 된다. 그 상상은 게이머마다 달라서, 말그대로 각자의 아바타가 된다.

그렇게 시작된 픽셀 이미지는 이제 향수가 겹치고 겹치면서 나름의 양식으로 자리매김했다. 최근에는 넘치고 넘치는 하드웨어 환경에도 불구하고 굳이 고전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해 픽셀 방식으로 제작되는 게임들도 존재감을 발하는 경우가 있다. <리스크 오브 레인>이나 <FTL>, <건포인트> 같은 게임들은 일부러 픽셀 방식을 도입하여 특유의 느낌을 살려낸 수작들로 꼽힌다. 그리고 고전게임의 시대를 겪어온 이들의 감성은 시대를 지나 차곡차곡 쌓이면서 픽셀 게임이 주는 느낌이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 <리스크 오브 레인>의 캐릭터 선택화면

영화로는 풀어내기 힘들었던 픽셀 양식의 향수

영화 <픽셀>은 고전게임의 픽셀 그래픽을 통해 게임 경험자들의 상상에 기댄 향수를 끌어내려고 했지만 그리 좋은 성과를 얻진 못했다. 영화적 구성이 허술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겠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이들이 ‘그 픽셀이 이 픽셀은 아니지’ 라는 반응도 보였을 것이다. 당장 영화에 나온 픽셀은 픽셀이 아니라 복셀(픽셀의 3차원 블록 개념)이고, 위에서 언급한 8비트 시네마가 표현해 낸 고전게임의 느낌을 살려내지도 못했다. 고해상도 이미지인 영화에서 픽셀 양식의 접목은 아무래도 무리였던 게 아니었을까. 픽셀 그래픽을 도입한 게임들이 가져온 향수로서의 성과에 비하면 <픽셀>은 영화적 재미 외의 고전게임에 대한 향수 면에서도 그다지 만족스러운 편은 아니었다.


<Play the Game>

#01- 비욘드 어스, 인류는 어느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는가

#02- MMORPG의 장르적 특성과 워크래프트의 세계관 그리고 WOW

#03- 게임 속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04- 게임에도 정당해산 따위는 없다

#05- 스타크래프트, 윙코맨더3...우주를 다룬 최고의 게임은?

#06- 상호작용의 매체, 게임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07- 나의 삼국지는 그렇지 않아!

#08- 맞고만 치던 당신, 설날 고스톱 스코어는 얼마?

#09-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이 되어가는 이야기, XCOM

#10- 새마을운동 게임으로 정신과 이념을 교육한다굽쇼?

#11- 시뮬레이션 게임의 개척자 <심시티>를 통해 본 게임의 재현력

#12- 캐쉬템의 문제, 게임 아이템은 소유 가능한 물건인가?

#13- 아이 위해 쓰여진 이야기 같은 게임, ‘LOOM’의 우화

#14- 천만 직장인의 웃픈 블랙코미디, ‘내 꿈은 정규직’

#15- 오락실의 유산① 게이머에 대한 편견의 시작을 찾아서

서평- <제국의 게임>, 게임으로 인간을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사례

#16- 오락실의 유산② 동네고수에서 대도서관까지, ‘보는 게임’의 역사

#17- 오락실의 유산③ 한국 문화의 역사적 유물로서의 '오락실'

#18- 고립된 인간의 표정이 말하는 것들, 워킹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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