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그룹 구제금융안에 대한 그리스 국민투표 결과가 압도적 반대로 나오면서 세계 정세가 그야말로 요동치고 있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이 사임했고 후임으로 온건파인(유로그룹은 별 차이가 없다고 평가한다) 유클리드 차칼로토스 현 외교차관이 내정됐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주고 받는 게임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그리스 정부가 국민투표 결과 및 재무장관 사임이라는 일정한 명분을 채권단에 준 셈이다.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그간 유로그룹 내에서 일정한 비토를 받아왔다. 따라서 채권단 역시 일정한 양보를 통한 새로운 협상안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게 그리스 정부와 지지자들의 주장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새로운 협상안의 내용은 부채 감축과 국채 만기 연장을 핵심으로 한다.

채권단은 원칙적으로 협상에 응한다는 입장이지만 기존 입장에서 얼마나 선회할지는 미지수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프랑스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6일 파리 엘리제궁에서 회동을 갖고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그리스 국민투표 결과 및 향후 협상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메르켈 총리는 “대화의 문은 열려있지만 현재로서는 유럽재정안정화기금(ESM) 프로그램 협상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이므로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의 정확한(precise) 제안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고 올랑드 대통령 역시 “그리스가 유로존에 남는지 여부는 얼마나 진지하고 믿을만한 제안을 내놓느냐에 달렸다”고 발언했다.

그리스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주목하는 미국도 나섰다. 조니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6일 브리핑에서 “그리스가 유로존에 잔류할 수 있는 방식으로 타협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양측의 입장 차가 크지만 전체 이익을 위해 차이가 해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NATO) 회원국인 그리스가 유럽연합에서 떨어져 나와 러시아 및 중국과 경제적 유대를 강화할 경우 문제가 안보적 성격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게 미국의 판단이다. 특히 러시아가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을 사수하고 키프로스의 해군 항만 사용 허가 협정을 얻어낸 상태에서 그리스 시리자 내각이 나토 탈퇴를 추진하거나 크레타섬의 미 해군기지 철수를 요구하는 상황이 이어지면 혼란이 극대화된다는 견해도 있다. 일각에서는 그리스가 드라크마화 복귀를 선택하더라도 유럽연합에는 잔류시키는 ‘질서있는 후퇴’를 모색하는 게 정답이라는 지적도 나오는 상황이다.

결국 이 문제는 단지 그리스라는 단일 국가의 부채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를 넘어서는 복잡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국내 보수언론은 이 문제에 대해 피상적으로 접근하면서 ‘복지 포퓰리즘’과 그리스 국민의 ‘타락’을 언급하는 몰상식한 모습을 보였다.

▲ 조선일보 7일자 1면 기사

조선일보는 7일 1면에 <그리스의 착각>이란 제목의 기사를 배치해 국민투표 전후 그리스 현지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리스 국민들이 국민투표 결과로 기뻐하고 있으나 거리 상점들의 생필품 등이 동나고 약국의 약품공급이 제한되는 등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조선일보는 2면에 <치프라스의 ‘벼랑끝 도박’…덩달아 박수친 그리스 국민>이란 제목의 기사를 싣고 국제면의 <“내 롤모델은 치프라스” 위험한 EU지도자들>이란 기사를 통해 스페인 포데모스의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이탈리아 5성운동의 베페 그릴로, 포르투갈 사회당의 안토니우 코스타 등을 언급했다. 이러한 일련의 기사 배치는 그리스 국민들이 자국의 경제를 어렵게 하는 투표를 해놓고도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그리스 좌파’들의 위험한 행보가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 조선일보 7일자 기사

조선일보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이날 지면에 실린 <복지 포퓰리즘이 타락시킨 그리스의 자포자기>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정확하게 드러난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이번 국민투표 결과는 그리스 국민이 아직도 ‘복지 금단 증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면서 “빚내서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며 흥청망청 살아온 대가는 가혹하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는 “그리스인들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근로자들은 물론 공무원과 심지어 판사들까지 파업에 가담하며 긴축정책에 격렬하게 저항했다”면서 “결국엔 복지를 늘려 과거로 돌아가겠다고 한 급진좌파 정권까지 탄생시켰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포퓰리즘에 빠져든 국가와 국민은 정신적으로 타락한다”면서 “복지에 취해 타락한 국민은 국가 경제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갈 수 있다. 그리스가 그 단적인 사례다”라고도 주장했다.

▲ 조선일보 7일자 사설

조선일보가 그리스 문제에 대해 거의 ‘복지-사탄아 물러가라’ 수준의 격문을 내놓고 있는 이유는 이 문제의 본질을 몰라서가 아니라 국내정세에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그리스 문제에 대한 극단적인 주장을 연일 반복하면서도 기사 및 사설 곳곳에서 유로존이라는 통화동맹으로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과 남유럽 국가들의 구조적 격차가 확대됐다는 점, 그리스 국민들이 지난 5년간 고통스러운 긴축정책을 버텼음에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는 점, 구조조정으로 실업자가 100만명 늘고 평균임금은 38%, 평균 연금은 45% 삭감되는 고통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 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의견’의 영역에서는 복지 포퓰리즘과 국민의 타락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모순적 언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최근까지 ‘보편적 복지’, ‘중부담-중복지’를 비롯한 논쟁을 정치권을 중심으로 진행해 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증세없는 복지’를 말했지만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는 “증세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입을 모아 말한다.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보편적 복지’를 앞세우던 과거와 비교해 한 발 물러서긴 했지만 여전히 법인세 인상을 통한 복지제도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무상급식, 무상보육, 기초연금 등으로 이어지는 복지제도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어떤 형식으로든 여전히 추진되고 있다. 공무원연금 등 직역연금에 대한 개혁 역시 ‘뜨거운 감자’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이 그리스 문제를 ‘복지 포퓰리즘’ 프레임으로 접근하는 것은 이를 나름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이 깔려있는 걸로 볼 수밖에 없다.

▲ 중앙일보 7일자 1면 기사

다른 보수언론도 조선일보와 다르지 않은 관점을 선보였다. 중앙일보는 이날 1면 <빚내 복지잔치 파산한 그리스 “긴축 수용 못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그리스 국민투표 결과에 대해 “‘포퓰리즘으로 흥청망청하다 이젠 빚까지 탕감해 달라느냐’는 냉소가 가득하다”고 전했다. 1981년 사회당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총리 집권 이후 연금인상, 의료혜택 확대, 공공부문 비대화를 통한 고용창출 등이 위기의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역시 <나라 망칠 투표 결과에 환호하는 그리스 국민을 보며>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1821년 독립한 뒤 절반을 채무 불이행 상태로 보내 국제사회가 어떻게든 해줄 것이라는 국민정서가 퍼져 있는 게 그리스의 문제라면서 1981년 사회당 집권 이후 ‘퍼주기식 복지’가 시작됐고 2001년 유로화 가입으로 문제가 심화됐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선진국이 됐다는 착시 현상에 빠져 흥청망청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라면서 “그리스의 타락한 정치가 타락한 국민을 낳은 것인지, 타락한 국민이 타락한 정치를 낳은 것인지는 답하기 어렵다”, “그리스를 보면서 국민이 깨어 있어야 나라가 산다는 점을 절감한다”고도 주장했다.

▲ 동아일보 7일자 사설

그리스가 일종의 ‘포퓰리즘’ 문제를 겪고 있다는 지적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퍼주기식 복지’에 ‘국민’이 취했다는 지적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보수언론이 반복해서 호명하는 ‘그리스 국민’이란 누구인가 라는 점이다. 1981년 사회당 정권 이후 포퓰리즘 정책은 가난하고 빈곤한 상태의 국민을 향한 시혜적 성격의 정책이라기 보다는 정치 엘리트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도구에 가까웠던 게 현실이다.

보수언론들이 사례로 들고 있는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총리의 파판드레우 가문은 3대가 모두 총리를 지낸 기록을 갖고 있다. 이들이 측근과 친척들에 공직을 챙겨주고 특혜를 안겨준 게 이 ‘포퓰리즘’의 시작이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사회당의 파판드레우 가문과 함께 보수정당인 신민당의 카라만리스, 미초타키스 가문을 그리스 정치엘리트의 3대 가문으로 꼽을 정도였다. 신민당 정권은 유럽연합에 정부부채 규모를 축소해 보고하는 ‘사기’를 쳤고 사회당 정권과 마찬가지로 2009년 총선 직전 1만개가 넘는 공직을 만들어내 ‘사돈의 팔촌’ 및 ‘사돈의 팔촌의 팔촌’에까지 특혜를 주는 봉건적 민주주의로 일관했다. 사회당이나 신민당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특혜를 받은 기득권은 정권과 야합해 일상적인 탈세로 일관했고 신민당 정권은 국가부채가 두 배로 급증하는 상황에서도 법인세를 비롯한 각종 감세조치로 일관했다.

보수언론이 주장하는 ‘흥청망청’의 주인공은 바로 이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번 그리스 국민투표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거나 찬성을 뜻하는 ‘NAI’를 찍었다. 반대를 뜻하는 ‘OXI’를 찍은 다수의 젊은층은 통화동맹으로 보장된 시장에서 수익을 내는 데에는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으면서 꿔준 돈을 받는 데에는 그저 남남인 트로이카가 강요한 지난 5년의 긴축으로부터 고통을 받은 세대이다. 시리자의 급부상은 이런 정치적 환경에서 이뤄졌다. 이런 상황에서 치프라스 정권이 부유층의 탈세 등 세금사기를 철폐하는 등의 개혁안을 주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채권단은 빈곤층에 대한 연금 삭감, 농부들에게 주는 보조금 축소 등을 포함한 협상안을 주장해왔다. 부가가치세 조세기반 확대 등 대다수의 쟁점에 대해 그리스 정부가 그간 장담해왔던 바에 비해 후퇴했음에도 채권단이 이러한 입장을 고수한 것은 ‘정체성’이라는 차원에서 치프라스 정권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을 강요해 ‘레짐 체인지’를 시도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어왔다.

물론 치프라스 정권의 협상이 완벽했다고 평가하자는 것은 아니다. 내부에 치프라스 총리보다 훨씬 더 강경한 입장을 가진 정파들(이들은 ‘카지노 자본주의’ 정도가 문제라는 치프라스 총리와는 달리 자본주의체제 그 자체를 문제삼고 있다)이 존재하는 정파연합정당인 시리자의 한계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수언론은 이런 모든 복잡한 문제에 눈을 감고 오로지 국제적 비극을 국내정세에 활용하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트로이카의 긴축 프로그램에 따라 2010년부터 공무원 수를 감축하고 정부지출을 수백억 유로 수준까지 줄여왔다고 주장하는 그리스 정부의 주장은 외면하고 ‘복지 포퓰리즘’과 ‘국민의 타락’만을 주장한다. 타락한 것은 그리스 국민이 아니라 한국의 보수언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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