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이 국회법 개정안 재의요구안 표결에 불참했다. 이로써 유승민 원내대표의 거취에 관심이 쏠리게 됐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아직까지 거취에 대한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유승민 원내대표가 ‘장기전’에 돌입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부글부글 끓고 있는 친박계 인사들과 ‘백의종군’을 요구하는 김무성 대표의 입장을 고려하면 ‘장기전’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걸 부정할 수 없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어떻게든 7일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건 이 때문이다. 대통령이 유승민 원내대표를 ‘찍어서’ 비난한 판에, 여권의 질서에서 자진사퇴는 정해진 수순처럼 보였다. 언제 하느냐의 문제가 남았을 뿐이었다. 일부 언론보도에 따르면 친박계 인사들은 유승민 원내대표가 추경안 처리까지 책임을 지더라도 사퇴 시점을 명확히 하면 인정하겠다는 입장까지 후퇴한 상황이다. 따라서 6일 국회법 개정안 재의요구안이 사실상 ‘자동 폐기’의 수순에 들어간 것에 대해 책임지고 바로 사퇴하던지 아니면 추경안 처리 이후 사퇴 시점을 밝히던지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개막행사에서 정의화 국회의장과 김무성 대표 등을 마주쳤지만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고 한다. 말을 건네기는 커녕 거의 뒷걸음질을 치는 분위기였다는 전언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국무회의에서 “배신의 정치”라는 말을 입에 올린 게 평범한 생각을 갖고 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배신자도 배신자 나름일텐데, 대통령이 유승민 원내대표를 가장 먼저 손봐줘야 할 대상으로 지목한 건 그에게서 ‘정치적 총구’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증세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발언과 청와대 참모들을 “얼라들”로 지칭한 것, 교섭단체대표연설을 통해 합리적 보수의 깃발을 들어올린 것 등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무언가 ‘번쩍’이는 것을 본 것이다.

▲ 6일 오후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 재의안이 무산된 직후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본회의장을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전 정권에서부터 먼저 ‘찍힌’ 김무성 대표가 유승민 원내대표에게 ‘백의종군’을 권하고 있는 것은 이런 상황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항해 온갖 노력을 다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너무 가까워서 나도 죽었잖아”라는 그의 발언은 ‘박근혜 체제’에서는 벌을 주면 벌을 주는대로 받고 납작 엎드려 있어야 다음 기회가 온다는 걸 잘 알고 있다는 증거다. 김무성 대표는 유승민 원내대표에게 더 큰 정치를 위해 백의종군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데 결국 이것은 2012년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나름의 조언으로 볼 수 있다. ‘박근혜 비대위’가 주도한 2012년 총선 공천에서 자신이 탈락했지만 결국 살아남아 집권 여당의 대표이자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가 되지 않았느냐는 얘기다.

문제는 명분이다. 당시 김무성 대표에게는 ‘보수재집권’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2012년 대선을 앞둔 총선에서 여당이 분열하면 재집권이 어렵다는 게 그 명분의 핵심 내용이다. 당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을 앞세운 비주류 일부 세력은 ‘국민생각’을 창당해 박근혜 비대위의 새누리당과는 다른 길을 가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무성 대표나 이재오 의원 등 거물급 인사들이 탈당한다면 새누리당의 분열은 실제상황이 될 터였다. 그러나 김무성 대표가 ‘백의종군’을 결단하는 바람에 이런 상황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2012년 대선에서 김무성 대표는 박근혜 캠프의 선대본부장으로 복귀해 ‘보수재집권’에 일조하고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은 채로 홀연히 떠나 영도구에서 자력갱생했다.

정치인에게 명분은 목숨만큼 소중한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명분과 현실을 서로 대치되는 것으로 여기지만 정치에서는 명분이 현실을 만들고 현실이 명분을 만든다. 여기서 유승민 원내대표가 ‘백의종군’을 선택하는 것에 어떤 명분이 있는지를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김무성 대표가 “더 큰 정치”를 말하고 있지만 결국 당·청이 정면충돌하는 파국을 막자는 게 명분이라면 명분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이는 ‘봉합’일 뿐이다. 새누리당과 청와대를 중심으로 한 이 난리(?)는 박근혜 대통령 특유의 정치스타일, 2016년 총선 공천을 겨냥한 계파 갈등, 차기 대권을 목표로 한 인사들의 행보 등이 모두 뒤섞여 꼬이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단순히 파국을 막기 위해 원내대표직에 대한 자진사퇴를 결정하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압력에 굴복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는 길이다.

즉, 중요한 것은 언제 자진사퇴를 하느냐가 아니다. 자진사퇴를 하더라도 무슨 이유로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아예 작정하고 ‘장기전’의 길로 접어들더라도 마찬가지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교섭단체대표 연설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이유를 생각해봐야 한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보수정권에 기대했지만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경제민주화를 다시 추진하고 야당과의 협의를 기본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것은 이명박 정권에 지친 사람들이 박근혜 정권에게 잠시나마 기대했던 것이다.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보수정권에 대해 슬슬 등을 돌리려는 시점에 유승민 원내대표의 연설은 아직은 미련을 가져도 좋다는 어떤 ‘신호’로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 국회법 개정안 재의안 상정을 앞두고 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이 논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유승민 원내대표로서는 그런 것이 명분일 수밖에 없다. 7일에라도 자진사퇴를 한다면 국회법 개정안 재의요구안이 ‘자동 폐기’된 것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제시해야 한다. 자신이 합의한 국회법 개정안은 위헌이 아니며, 이를 거부한 것은 정부의 의회에 대한 도전이며, 이 상황 자체가 이 나라 민주주의의 허약한 토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교섭단체대표 연설을 통해 밝힌 합리적 보수, 개혁적 보수의 꿈을 포기할 수 없고 다른 수단을 통해서 이를 계속 추진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 설사 그 ‘다른 수단’이 대구 동구 을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저조한 득표를 받고 낙선하는 것이 된다 치더라도 꿈을 계속 꾸겠다고 말해야만 한다. 이 꿈을 새누리당이 함께 꾸어줄 것을 약속한다면 원내대표 사퇴를 넘어 20대 총선 불출마라도 선언하겠다고 밝혀야 한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선택이 ‘백의종군’이라면 적어도 이런 약속들이 전제가 돼야 한다.

물론 현실은 이처럼 유승민 원내대표를 돋보이게 하는 방향으로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캐릭터로 볼 때 입장표명을 하게 되면 어떤 방식으로든 ‘명분’을 주장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나 정도에 있어서는 위에서 언급한 ‘봉합’ 이상의 메시지가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게 사실이다. 일단 한 발 물러섰다 김무성 대표의 보호막 아래서 어떻게든 공천을 받고 대구에서 살아남는 시나리오를 그려볼 수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이란 단어까지 동원하고 “선거에서 심판해달라”고까지 했지만 아직 대구 지역 여론은 유승민 원내대표를 버리지 않은 상태다. 그렇게 만신창이가 돼 살아남으면 된다.

다만, 이렇게 되면 김무성 대표가 언급하는 ‘큰 정치’는 손에서 멀어질 것이다. 결국 유승민 원내대표의 결단에 달린 문제다. 그가 한국사회를 한 번 들었다 놨다 해보겠다는 포부를 갖고 모험을 시작할지, 아니면 가늘고 길게 살아남는 직업적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선택할지는 지금으로서는 단언할 수 없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다.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정치권에서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을 보냈지만 이 정도의 위기에 내몰린 적은 처음일 것이다. 그 말을 뒤집으면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할 기회를 잡았다는 말도 된다. 그의 결단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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