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상황이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의 국민투표 실시 결정도 극적이지만, 국민투표 정국이 시작된 뒤에도 막후에서 전개된 긴급 협상 역시 호사가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아닐 수 없다. <가디언> 등 여러 언론이 홈페이지에 마련해놓은 실시간 보도 코너에는 지금도 분 단위로 계속 속보가 올라오고 있다. 앞으로 하루 뒤, 아니 한 시간 뒤에 어떤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질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이렇게 어지러운 가운데에도 주요 등장인물들의 입장만은 더없이 명쾌하다. 각 배역이 자신의 논리에 따라 거의 직선으로 움직인다. 상황의 혼란함은 협상 당사자들이 어떤 패를 꺼내들지 알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들이 서로의 입장이 빚을 충돌을 어느 수준까지 감내할지 예측하기 힘든 데서 비롯된다.

그리스 비극의 두 주인공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주요 배역들의 행동을 분, 초 단위로 잘라 보면 상당한 혼선과 궤도 이탈이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 그렇다. IMF 부채 상환 만기일이던 6월 30일 밤에 벌어진 막후 협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와 유럽중앙은행이 나서서 비공식 접촉을 주선했다. 그리스는 이미 국민투표 실시를 결정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응해 새로운 협상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결국 독일의 완강한 거부로 이것은 없었던 일처럼 돼버렸다. 그리스와 채권단 모두 지그재그 행보를 보인 셈이다.

그 원인은 각 협상 당사자가 단일한 주체가 아니라는 데 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이 점이 보인다. 그리스의 집권당 급진좌파연합(SYRIZA, 이하 ‘시리자’)은 당명에도 드러나듯 여러 좌파 정파들의 연합 성격이 강하다. 그 안에는 긴축 정책을 되돌리고는 싶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유로존에 남는 것이라는 입장의 자니스 드라가사키스 부총리 같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파나지오티스 라파자니스 환경에너지장관처럼 채권단에게 양보하느니 차라리 유로존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이것은 단순히 좌파의 식상한 분파 투쟁 취미의 반복이 아니라 그리스 사회 여론의 정확한 반영이다. 치프라스 총리와 협상단(야니스 바루파키스 재무장관과 유클리드 차카탈로스 외무차관)은 이 둘 사이에서 저울질하며 결정하고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한편으로는 국민투표를 선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또 다른 타협안을 제시하는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 그리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연설을 하고 있다. (유튜브 캡쳐)

정도는 덜하지만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유럽연합이 있고, 유럽중앙은행이 있으며, 국제통화기금(IMF)이 있다. 그리고 실은 이들을 내세워 자국 이익을 관철하려는 유로존 회원국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실세 중의 실세인 독일 정부가 있다. 이들은 긴축 정책을 포함한 구제금융 패키지 안에서 저마다 강조점이 다르다.

IMF는 부채 일부 탕감에 대해서는 유연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의 전통에 따라 긴축 정책의 강경한 지침을 고수한다. 유럽중앙은행은 요즘 긴축 정책에 대해 유연한 입장으로 선회했지만, 부채 탕감에 대해서는 독일의 눈치를 본다. 그리고 독일은 모든 쟁점에 대해 완강하다. 부채 조정은 없으며, 긴축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채권단 안에서도 한 쪽은 계속 거간을 서려 하고 다른 한 쪽은 퉁명스럽게 대화 거부를 반복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부 불협화음과 그로 인한 에피소드들에도 불구하고 양 진영의 행위는 결과적으로는 항상 일관된 논리를 보인다. 각 진영 안에서 어쨌든 수렴하는 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경우는 시리자 내 좌-우파를 봉합하려는 치프라스 총리와 협상단의 끝없는 줄타기가, 채권단의 경우는 독일 정부의 완강한 입장이 그런 역할을 한다.

그래서 결국 각자 하나로 모이는 노림수는 무엇인가? 시리자는 집권 전부터 ‘유로존 안에서 / 긴축 정책을 철폐한다’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 집권 후 이들은 우직하다 싶을 정도로 일관되게 이 목표에 따라 움직였다. ‘유로존에 남는 것’과 ‘긴축 정책 철폐’를 시리자 정부에 대한 유권자의 명령적 위임으로 해석하고 그 실행에 정권의 운명을 걸었다. 이것은 정치학 교과서에는 당연한 명제로 나올지 몰라도 이미 사람들 기억 속에서는 사라져버린 정치 행위다. 좌파의 여러 분파들이 보기에 시리자가 비판받을 점이 많다 해도, 21세기에도 이런 정치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점만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투명함은 그리스 구제금융 같은 치열한 쟁점을 다루는 협상장에서는 별로 미덕이 되지 못한다. 강자에게는 그런 투명함이 미덕일 수 있겠지만, 그리스는 약자다. “유로존 안에 남는다”는 공개된 목표는 채권단에게 “긴축 정책 철폐”라는 시리자 정부의 또 다른 목표에 맞설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돼주었다. 이에 따라 시리자 정부는 막판 협상에서 스스로 ‘마지노선’이라고 규정한 수준으로부터 한참 뒤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리스 정부가 국민투표 발표 전에 제시한 최종 협상안은 비록 지출 삭감보다는 증세 쪽에 무게를 둬 ‘좌파적 긴축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기는 했지만, 어쨌든 긴축 정책의 수용이었다.

치프라스 총리와 협상단은 이런 양보 대신에 부채 일부 탕감을 받아내서 나름의 성과를 남기려 했던 것 같다. 이것은 협상 결과의 의회 승인을 위한 변명거리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부채 조정은 긴축 정책의 전환 이상으로 그리스 경제의 장기 회생에 중대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채권단 내에서도 최후의 실세, 즉 독일 정부가 완강히 이를 거부했다. 이 점에서 진짜 벼랑끝 전술을 구사한 것은 독일 정부였다.

결국 채권단 쪽 행보는 독일의 입장에 따라 결정됐다. 그것은 한 마디로 ‘무조건 항복’ 요구다. 그러니까 아예 ‘협상’이라는 것 자체가 요식 행위였던 셈이다. 그리스 쪽만이 이에 진지하게 임했을 뿐 다른 한 쪽은 이를 전혀 ‘협상’ 과정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시리자 정부는 “긴축 정책 철폐” 목표를 포기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시리자 정부는 물러나야 한다.” 이것이 독일 입장으로 수렴되는 채권단의 논리다. 달리 말하면, 이들의 목표는 1월에 있었던 그리스 선거 결과의 무효화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이제 며칠 뒤면 그리스는 국민투표로 운명을 결정한다. ‘무조건 항복’이냐 ‘결사 항전’이냐를 선택하는 국민투표다. 어느 쪽으로 결정이 나든 현 세대의 고난은 정해진 것이고, 오직 미래 세대를 바라보며 하는 처절한 선택이다. 한편 독일은 모든 것은 국민투표 이후에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한다. 그러면서 노골적으로 그리스의 정권 교체를 선동한다.

많은 이들이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의 그리스를 고대 그리스 비극에 빗대 ‘그리스 비극’이라 부른다. 현 상황을 곱씹어보면 이 유비가 단지 피상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빤한 참담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논리, 자신의 감정에 따라 외곬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붕괴와 애도로 귀결되는 운명을 기어코 완성하고 만다. 지난 몇 달간의 협상 과정에서 양 당사자는 이러한 배역을 더없이 충실히 연기했다.

‘사회적 유럽’은 없다, ‘단일통화 유럽’뿐

두 주인공이 완성해가는 공동의 운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유럽의 실패, 통합 유럽의 실패다.

지금처럼 유로존이 기둥 역할을 하는 유럽연합의 정치적 기원은 아마도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해에 유럽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일국적 케인스주의를 펼치던 좌파 정부(프랑스의 미테랑 정부)가 이른바 ‘U턴’을 했다. 서독이 요구하는 긴축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외환 위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서독의 요구에 굴복하는 대신 이때부터 이전의 적국(서독)과 함께 통화 통합에 착수했다. 서독 마르크화를 모태로 하는 단일 통화를 만드는 길에 나선 것이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이렇게 약속했다. “우선 ‘단일통화 유럽’을 만들자. 그렇게 해서 통화 안정이 보장되고 나면 그 다음에 유럽 전체에 완전고용과 복지를 실현시키자.” “이제는(=브레턴우즈 체제 붕괴 이후에는) 일국 차원에서 ‘사회’ 국가를 유지하기 힘들다. ‘단일통화 유럽’을 바탕으로 ‘사회적’ 유럽을 만들자.”

그리스 사람들이 유로존으로부터 벗어날 엑소더스를 고민하기 30년 전에 유럽인들은 ‘단일통화 유럽’을 거쳐 ‘사회적 유럽’에 도착한다는 이 엑소더스에 나섰다. 미테랑 정부의 굴복에 앞장선 자크 들로르 재무장관이 기꺼이 모세의 역할을 떠맡았다. 그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으로서 ‘브뤼셀의 차르’라는 말까지 들으며 결국 유로화의 출발점이 된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단일통화 유럽’을 확정지은 뒤 들로르는 예고대로 ‘사회적 유럽’을 꺼내들었다. 유럽 차원의 대대적인 일자리 창출 비전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차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회적 유럽’은 유럽연합 모든 기구의 정관에 아름다운 문구로 삽입되었으되 그 실행은 무기한 연기됐다.

‘사회적 유럽’을 약속하며 통화 통합의 한 축 역할을 떠맡았던 각 나라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한 번도 진지하게 그 실행에 착수하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에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의 모든 주요 국가들(영국, 독일,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에 중도좌파 정권이 들어섰을 때에도 별다른 공동 행동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오직 ‘단일통화 유럽’만이 21세기와 함께 그 모습을 드러냈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자본주의의 여러 중심부들 중 유독 유럽에 가장 혹독한 타격을 가했다. 그 핵심 원인은 다름 아니라 ‘사회적 유럽’ 없는 ‘단일통화 유럽’에 있다.

미국은 비록 도착적인 형태로나마 케인스주의적 조치들을 통해 위기의 불을 껐다. 그러나 유럽은 유로화의 통화 가치 안정을 절대시하면서 가장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는 나라들에게 오히려 긴축 정책을 요구했다. 단일통화 ‘국가’인 미국은 경제-사회 정책으로 위기를 진정(극복은 아니다)시켰다. 그 정책이란 다름 아니라 가장 심각한 상태에 있는 계층, 지역에게 현금과 현물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일통화 ‘지대’인 유로존은 같은 문제에 ‘국가 간’ 채권-채무 관계를 들이댔다. 이 모순의 한복판에 바로 그리스가 있다.

그리스 사태에 대해 대다수가 그리스에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는지 따지고 든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스가 아니다. 문제는 유럽이다. ‘사회적 유럽’이란 ‘없다’. 그것이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위기 시기에도 실현되지 못하는 형편이니 이제는 수사 차원에서 반복하기도 민망하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단일통화 유럽’이다. ‘단일통화 유럽’의 중심축 독일이 이를 보증한다. 독일의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이 ‘사회’ 민주주의자들의 승인을 받아 이 질서를 지탱한다. 이게 20여 년 엑소더스 끝에 도달한 약속의 땅이다.

이 현실 앞에서 ‘사회적 유럽’의 약속을 다시 꺼내드는 이들이 있다. 그리스의 시리자, 스페인의 포데모스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간절히 외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 전성기 시절의 복지국가를 넘어서는 내용이 아니다. 시리자 정부가 제시한 ‘마지노선’(적정 수준의 임금과 연금 등)은 그야말로 복지국가의 최소 수준일 뿐이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단일통화 유럽’ 건설 이후 침묵하는 ‘사회적 유럽’의 비전을 과거 공산당원, 트로츠키주의자, 마오주의자였던 이들이 지켜나가겠다고 나선 형국이다. 60-70년대였다면 ‘개혁(개량)’이라 폄훼했을 이 과제를 위해 지금 이들은 ‘혁명’보다 더 감당하기 힘든 선택(가령 그렉시트) 앞에 서 있다.

이것은 실은 유럽 통합이 이미 실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스의 국민투표 결과가 ‘결사 항전’으로 나올지 아니면 ‘무조건 항복’으로 나올 것인지와 상관없이, 독일의 철권이 다시 한 번 승리할지 아니면 상처를 입을지와는 별개로, 유로존-유럽연합의 실패는 기정사실이다. ‘사회적 유럽’ 없는 ‘단일통화 유럽’은 지구 위에 신자유주의 반동 질서를 지탱해주는 여러 제도들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것일 뿐임이 드러났다.

이것을 학습한 각 나라 대중의 반응이 무엇일지는 생각만으로도 두렵다. 만약 시리자, 포데모스 같은 세력이 실패한다면(그 가능성은 시시각각 점점 더 높아지고 있는데), 미래는 오직 네오 파시스트들의 차지일 것이다. 그리스 비극에는 가장 잘 어울리는 종말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 장석준 전 노동당 부대표.

사족처럼 덧붙이면, 고대인들은 이런 비극의 막간에 앞막 내용을 희화화한 소극을 관람하길 즐겼다. 주인공들의 예정된 침몰 사이사이에 광대들의 난장판을 즐긴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 비극 사이에도 이런 소극의 광대 노릇을 떠맡은 이들이 있다. 메르켈 총리의 나팔수가 돼 그리스 정부에 가장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은 독일 사회민주당 의장이자 부총리 지그마르 가브리엘 같은 이들. 나치의 승리에 길을 열어줬던 그 당의 후예임에 너무도 충실한 모습이 아닌가.

과거 신화와 영웅 서사시의 시대에 사회주의자들은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놓고 고민했다. 하지만 이제 그 후예들은 이와는 한참 차원이 다른 진실 앞에서 절감한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한 세대를 거친 뒤, 세상을 한 뼘이라도 더 나아가게 만들려면(아니 보다 솔직히 말해, 한 걸음이라도 후퇴하는 것을 막으려면), 얼마나 많은 피와 땀과 눈물 그리고 실소(失笑)를 퍼부어야 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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