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위기 문제가 국내 언론에서도 심각하게 다뤄지고 있다. 그리스가 1일 국제통화기금(IMF)의 부채를 갚지 못해 선진국 중 처음으로 연체국이 된데다 5일 국민투표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3차 구제금융을 재차 요구하고 채권단의 요구사항 상당부분을 수용하겠다고 밝히는 등 상황의 변화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국내의 네티즌들도 그리스 상황에 대해 여러 의견을 활발하게 교환하는 등 이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 조선일보 2일자 사설

그간 보수언론들은 그리스 문제를 과도한 복지제도로 인한 생산성 하락이라는 관점으로 다뤄왔다. 2일 보도에서도 이 같은 접근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이날 <포퓰리즘 정치가 나라와 백성을 절벽서 떨어뜨린 그리스>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그리스가 IMF의 채무를 상환하지 못한 데 대한 두 가지 원인을 제시했다. 조선일보가 진단하는 그리스 위기 첫 번째 원인은 그리스가 2010년 재정 위기 이후 구제금융을 2400억 유로(약 300조원)나 받았지만 대부분 빚을 갚는 데 사용됐고 채권단이 강요한 긴축 정책으로 불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두 번째 원인인데 “치프라스 정권의 포퓰리즘 정책”이다.

조선일보는 “치프라스 총리는 긴축 정책에 대한 국민의 반발에 편승해 긴축 반대와 임금 인상, 복지 확대 등 달콤한 공약을 내걸고 지난 1월 총선에서 승리했다. 국가 부채로 공짜 복지를 펴온 과거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이라면서 “그는 집권 후 경제를 살릴 방안을 내놓지 않은 채 사사건건 채권단과 부딪치기만 했다. 임금·연금 삭감에 분노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퇴직자들은 환호했지만 국제 사회의 불신이 커지면서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고 썼다.

조선일보는 “치프라스 총리가 채권단과 협상이 결렬된 뒤 국민투표 카드를 꺼내든 것도 무책임의 극치다. 지킬 수 없는 공약으로 국가 부도 사태를 야기하고는 최종 결정을 국민에게 떠넘긴 꼴”이라면서 “그러면서 나라 경제야 어찌 되건 말건 채권단의 구조 개혁 요구에 반대표를 던져 달라는 선동까지 하고 있다”고 썼다. 또, 조선일보는 “치프라스가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건 도박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면서 “그리스 사태는 국민이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는 지도자를 선택할 때 그 나라가 어떤 종말을 밪게 될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도 썼다.

조선일보의 이와 같은 진단은 그리스 문제가 외국 문제라는 점에서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아무렇게나 쓴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치프라스 총리를 배출한 시리자 정권은 올해 1월 취임해 ‘트로이카(EU·ECB·IMF)’와의 협상과 취약한 국내 정치적 영향력 사이에서 숨 쉴 틈도 없이 흔들려왔다. 6개월간의 혼란을 “치프라스 정권의 포퓰리즘”으로 평가하고 그리스 ‘국가부도’의 주요 원인으로 꼽는 게 과연 합리적인 발상인지 의문이다. 오히려 조선일보가 주장하는 ‘포퓰리즘’은 시리자 이전 정권들에서 확대돼왔다. 시리자의 경우 주류인 시나스피스모스가 신자유주의개혁을 추진하는 연정에 잠시 참여했던 것 이외에는 지금까지의 국정운영에서 사실상 소외돼있었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시리자 정권이 그리스 경제를 붕괴시킨 장본인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 동아일보 2일자 사설

동아일보의 경우 조선일보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비슷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동아일보는 <‘철밥통 공무원’ 개혁 못해 국가부도 맞은 그리스의 비극>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런 사태에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그리스가 공무원 수와 공무원에 대한 과도한 특혜를 줄이는 개혁을 하지 못한 것이 큰 몫을 했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그리스 공무원들이 철밥통이 된 것은 터키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당하던 시절에서 비롯된 정치후견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서 “정치인들이 핵심지지자를 공무원으로 만들면서 공무원 수가 크게 늘고, 복지비용이 급증하고, 관료주의의 비효율성과 경직성으로 경제가 뒷걸음질하는 악순환이 거듭됐다”고도 썼다. 동아일보는 또 “우리도 공짜만 좋아하고 개혁을 미루다가는 그리스와 같은 처지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면서 “개인이든, 나라든 소득을 늘리지 않고 빚에 의존하다보면 미래는 부도가 나게 돼 있다”고도 지적했다.

▲ 중앙일보 2일자 사설

‘빚’을 걱정하는 건 중앙일보도 마찬가지다. 중앙일보는 <정부·국민이 자초한 그리스 국가부도>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그리스 사태의 교훈에 대해 “빚으로 복지를 지탱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썼다. 중앙일보는 “우리의 가계부채도 1100조원을 넘어섰다. 수출과 내수의 동반부진으로 경제 활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다. 연내 미국의 금리인상까지 예고돼 있다”면서 “그런데도 시급한 구조개혁은 겉돈다. 그리스 위기, 남의 일 보듯 할 때가 아니다”라고 썼다.

그리스 사태를 보며 국가부채와 구조개혁의 필요성을 논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안에 대해 논의하고 구조개혁의 내용을 확정하는 것에는 상당한 역량의 투입이 필요하다. 문제가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리스가 ‘빚으로 복지를 지탱한’ 것이나 ‘공무원 철밥통’이 탄생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무상급식, 무상보육, 기초연금 등이 논의된 과정과는 양상이 다르다. 그리스의 경우 보수언론이 주장하는 ‘복지’라는 건 지배계급의 정실주의와 정치적 족벌체제의 폐해에 가깝다. 우리나라의 경우 복지재정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권에서 증세 및 복지제도 축소를 함께 논의하자는 기본적인 합의가 이뤄져있는 상태다. 이런 차이를 그저 ‘빚으로 복지를 지탱하는 건 위험’하다는 수준으로 얼버무리는 건 정직한 태도가 아니다.

▲ 한겨레 2일자 3면 기사

오히려 이날 일간지 지면에서 이 문제에 심도있는 접근을 시도한 것은 한겨레였다. 한겨레는 이날 3면 기사에서 그리스가 5년 전 수천억유로의 구제금융을 수혈받고 경제를 회복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그리스 정부에 제공된 구제금융의 92%가 다시 채권자들에게 돌아간 것이 위기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지적을 인용해 보도했다. 한겨레는 그리스 정부가 구제금융을 받아 이의 대부분을 유럽의 상업은행 등 민간채권자들의 빚을 갚는데 투입했으며 또 구제금융 일부는 민권채권자들에 부채탕감 대가 지급에 사용됐다고 전하면서 “공공기관 관련 부채는 상환 대상에 올라 있지 않았다. 특히 주요 채권자였던 그리스 은행들과 그리스 연기금은 전혀 상환 받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한겨레는 “그리스에 지원된 구제금융은 그리스 경제와 시민이 아닌 유럽의 민간은행들의 몫이 된 것”이라면서 그리스 정부 부채의 78%가 유로존의 공공부문에 넘겨졌다고도 전했다.

▲ 경향신문 2일자 사설

경향신문 역시 이날 <‘그렉시트’ 촉구한 스티글리츠의 주장을 주목한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조지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 교수와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의 견해를 인용해 그리스 사태를 해설했다. 경향신문은 이 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이 ‘트로이카’가 긴축을 강요해 그리스 경제의 위기가 심화됐다고 지적했다는 점을 전하며 “채권단의 무능한 처방으로 지난 5년간 그리스가 절벽 끝으로 내몰리는 사이에도 유로존 부자 나라들은 떼일 걱정 없는 돈놀이를 했다. 그리스가 IMF 등에서 빌린 자금의 상당 부분은 독일과 프랑스 은행으로부터 진 빚을 갚는 데 써야 했다”고 썼다. 또 경향신문은 “그리스 정부는 올해 초 빈곤층 가구에 대한 전기요금 면제와 식량 보조 법안을 통과시켰다. 수년째 지속해온 긴축으로 열악한 상황에 처한 서민을 지원하겠다는 취지였다”면서 “그러자 트로이카는 ‘(긴축) 합의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했다”고도 해설했다. 경향신문은 ‘트로이카’를 고리대금업자에 비유하고 ‘그렉시트’를 선택해야 한다는 제안을 부각시키며 “그리스에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구제금융의 횡포를 눈감아 주어서는 안 된다”고도 썼다.

위의 보도 내용을 살펴보면 그리스 문제는 “빚을 졌으면 당연히 갚아야 한다”는 논리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무조건 시리자 정권을 옹호할 수는 없는 상황인 게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책임을 전적인 차원으로 강조하거나 트로이카 및 국제채권단 책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보수언론은 문제를 단순화시켜 사태의 원인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오로지 이념적 선전을 강화하는데 활용하기에 바쁘다. 언론이 모든 문제에 통달해있을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보수언론의 이러한 보도 행태에 ‘정치적 고려’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비겁한 행위들을 중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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