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이명박, 심상정. 나열한 시간 순으로 각각 한국 사회의 어제와 오늘을 상징하거나 내일의 징후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주로 활용하는 매체들을 보면 재밌다. 그들의 위치와 역관계가 분명해진다.

어제의 아이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2.0(www.democracy2.kr)이라는 제법 규모가 큰 사이트를 직접 운영하며 글을 올리고 있다.

살아있는 오늘의 권력 이명박 대통령은 공영방송을 관제화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kbs1라디오(www.kbs.co.kr/radio/1radio)의 월요일 아침 전파를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반면, 내일의 징후 심상정 대표는 약진하는 블로거이다. 주로 개인 블로그(blog.naver.com/simsangjung)에 글을 올리고 있다.

활용하는 매체가 워낙 다르다 보니, 서로 물려는 있되 직접 마주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제도 미디어들의 주된 역할은 역시 전달이었다. 현재의 권력 순으로 이들 3명의 정치적 입장과 영향력을 중계하고 상징화해내던 것이 최근 뉴스의 흐름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연설에 대한 심상정 의원의 코멘트를 듣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글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입장을 쓰는 방식이었다.

말하자면, 철저한 대회전(大回轉) 경기였다. 코스 중간 중간에 노무현, 이명박, 심상정이 서있으면 미디어가 그 깃대들을 통과하는 룰의 게임이었다. 그런데 어제(11/17)를 기점으로 게임의 룰이 바뀌었다. 3인의 본격적인 활강 경쟁이 시작되었다.

어제(11/17) 이 3명이 동시에 미디어에 올랐다. 한미FTA에 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결자해지를 촉구’한 심상정 대표의 출사표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격문을 띄웠다. 비슷한 시간에 워싱턴에서 녹음한 이명박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도 어김없이 전파를 탔다. 동시간이지만 다른 자리에 서있던 3인을 경제 위기, 신자유주의 유령이 모이게 한 것이다. 사실 그동안은 체급이 다르다는 이유로, 각각 개혁, 보수, 진보라고 하는 고유한 정치적 영역을 분할 지배하는 붙박이 영주라는 이유로 사생결단의 전면전에는 나서지 않던 이들이었다.

심상정 대표는 한미FTA에 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직하고 통 큰 고백을 촉구했다. 현재의 금융위기가 노무현 정부 때의 지향과 무관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고해성사’와 ‘사죄’를 요구했다. 심상정 대표는 어제, 오늘까지의 체제와 질서로 내일을 맞을 순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답을 하지 않으리라 애당초 예상과는 달리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답을 달았다. 한마디로 심 대표의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시겠단다. 개방은 세계적 대세이며, 보호주의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 개방이 신자유주의 핵심 요인 아니라는 견해를 거듭 밝혔다. 나아가 스스로 설정하고 있는 영토가 중도진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오늘의 문제가 어제의 책임은 아니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식은 여전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발 더 나아갔다. ‘금융위기를 빌미로 세계가 보호무역주의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힘주어 강조’했다. ‘감세조치와 재정지출을 온 세계가 동시에’ 확대해야 한다는 구체적 해법을 갖고 G20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오늘의 상황을 딛고 내일을 쟁취해야 한다는 권력의지가 분명한 이명박 대통령이다.

바야흐로 위기는 위기이지 싶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의 시간들이 집합하고 있다. ‘잃어버린 10년’이란 오명을 쓰고 있는 시장친화적 개혁주의자,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외치고 있는 시장만능주의자 그리고 사회적 시장주의자가 각각 ‘체제’와 ‘전망’을 근거로 격돌하고 있다. 백척간두의 상황, 건곤일척의 승부이다.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이 승부가 끝나기 전에 미디어에게도 선택의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공평무사한 중립의 영토란 없다. 신기루이다. 이미 그러했던 것처럼, 내재되어있는 정파성은 의식과 무의식을 가리지 않고 누군가에게 투영될 것이다. 상황을 각개 전달할 뿐이라는 나태한 태도는 곧 곤란함을 맞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이 위기인 까닭이다. 노무현, 이명박 그리고 심상정의 영토 중 어딘가에 처박히는 신세를 면하고자 한다면, 미디어의 분발이 필요하다. 현재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해석해내고, 금융위기가 던지고 있는 불안의 전망을 수립해야 한다. 아직까지도 이 3명의 체급이나 개체해보며 ‘흥행’의 전망이나 굴리는 잔머리를 버리란 말이다. 결정적, 결정의 순간이 오고 있다. 활강은 속성상 가속이 붙을 뿐, 멈추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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