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나의 친구, 그의 아내 My friends & His wife
DIRECTOR : 신동일
ADDITION : 2006 제작, 2008 개봉 | 110분 | 한국 | color
출연 : 장현성, 박희순, 홍소희, 신동일

▲ 영화 '나의 친구, 그의 아내'
국방부 선정 불온도서가 아닌, 그냥 세계의 보편 대중이 읽는 성경 구약만 봐도 권력이나 자본을 독점한 어떤 이들의 그릇된 갈망과 그에 따른 대가를 우리는 반복해 구경할 수 있다. 창세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하 등등.

‘라반은 자신의 양떼가 번성하면 할수록 이웃의 한 마리 있는 양까지 가지고 싶어서 괴로워한다’ / ‘다윗은 자신의 나라가 부강하고 안정될수록 밧세바에 대한 음욕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 ‘아합은 자신의 왕권이 높으면 높을수록 옆 농장주의 과수원이 탐나서 견딜 수가 없다’

현실에 대입하면 더 쉬울까.

‘강부자들은 집값이 오르면 오를수록 세금을 내기 싫은 열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 ‘MB정권은 자신들이 언로(言路)를 쥐면 쥘수록 공영방송까지 제 나팔수로 만들고 싶은 열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저 그릇된 욕구가 낳은 성경 창세기의 첫번째 유혈사태. 양을 유목하며 그 살과 피를 신에게 바치던 동생 아벨과 달리 땅의 소산을 축적했다 떼어드리던 장남 카인은, 여호와 하나님이 동생의 제물은 기쁘게 받으면서 자신의 제물에는 반응이 없자 안색이 변한다. 그리하여 동생을 질투하다가 절대자에게 경고를 먹고, 반성을 하기보다는 가일층 분노를 하며, 결국은 들에서 아벨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세기 4장 9~11절)

자칫 ‘성경의 하나님이란 분은 농민은 싫어하고 낙농인만 예뻐하는구먼’ 정도로 오독할 수도 있는 이 에피소드는 그보다는 좀 더 정교하게 독해할 필요가 있다. 성경의 짧은 문장에서 많은 것을 소급하고 추리해야하는 한계가 있지만, 가령 이런 층위는 어떨까, 카인은 첫번째 자본가, 아벨은 그의 빗나간 소유욕에 희생된 첫번째 노동자. 그렇다면 이 에피소드의 모티브 역시 위의 구약들과 다르지 않다.

‘카인은 자신의 곡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아벨에 대한 질투가 솟구치는 것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성경의 관점에서 토지는 하나님의 선물 (여담인데, 공중파를 비롯한 전파에도 같은 사유가 가능할 것이다). 물론 그 개량 improvement의 결과는 노동을 제공한 사람의 몫이지만, 토지 자체는 인간의 힘으로 생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닌 천혜의 영역. 즉, 개인의 자본이 아닌 공동의 자연이다. 자신이 땀 흘린 대가를 수확하여 쌓아둔 것이 잘못이 아니라, 공동체가 일용할 양식을 함께 고민하던 원시 경제에서 ‘내가 내 것을 모아놓는데, 뭐’ 라는 개념의 단초를 카인이 내민 셈.

더불어 동생에 대한 질투의 문제. 이 그릇된 질투는 사람살이의 근본적인 문제까지 경쟁으로 전이시킨다. 함께 땀을 흘리고 먹을거리를 해결하며 공동체의 생계가 지속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등 이전까지는 경제활동이라는 것이 자연을 중심 또는 매개로 한 일종의 관계와 영성의 범주였다면, 카인식 사고를 통해 경제활동은 ‘이기느냐, 지느냐’ ‘죽느냐, 사느냐’의 경쟁의 범주가 되어버린다. 절대자가 징벌의 시스템을 디밀고 나서야 회한을 늘어놓는 카인.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성경 창세기 4장 13~14절)

결국 카인은 저주를 피해 ‘에덴의 동쪽’으로 거처를 옮기고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성벽을 쌓아버린다. 유목민(Nomad)을 두려워하게 된 성 안의 사람(bourgeois).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인간의 살의와 죄의식을 다룬 고대의 에피소드 중에서도 워낙에 강렬한 편인 데다, 계급사회 속 은폐된 범죄들에 대한 노골적인 은유이기도 해서 현대의 많은 서사들이 그 모티브로 차용하고 있다. 가까운 예로는, 악에 받쳐 뛰어다니던 캘리포니아 석유 시추 사업가의 반생을 그린 폴 토마스 앤더슨 연출의 <데어 윌 비 블러드>.

▲ 영화 '에덴의 동쪽 East Of Eden'
이 영화 속의 파국을 가리켜, 한 평론가는 ‘에덴의 동쪽에서 석유탑을 마주하고 원수가 된 카인과 아벨의 형상’이라고 요약하기도 했다. 말이 나왔으니 제임스 딘의 출세작 <에덴의 동쪽>. 20세기 초 미국을 배경으로 ‘아담’이라는 이름의 농장주와 그 두 아들의 갈등을 다루는 이 영화 역시 창세기의 두 형제를 모티브로 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은 아들의 인정투쟁.

한편, 역시 제임스 딘이 출연한 고전 <자이언트>에서는 삼각관계의 축이 이성이다. 사랑을 얻지 못한 대신 석유재벌로 성공한 주인공이 인생의 나머지 부분을 채우지 못한 채 영육이 먼저 몰락한다는 내용. 네이버 영화해설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제트(제임스 딘)는 자신의 부가 쌓이며 쌓일수록 레슬리(엘리자베스 테일러)에 대한 열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석유 재벌이면서 얼굴은 제임스 딘인데 하필 못 잊는 상대가 과년한 딸까지 둔 옆집 마나님인 거다.

보다 안된 경우, 신분 상승을 노리다 사랑과 축재의 기회 모두를 잃는 영화도 많다. <자이언트>를 연출한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다른 고전 <젊은이의 양지>는 사장 딸과의 결혼을 앞두고 임신한 애인을 살해하려는 젊은 노동자의 이야기.

사실 멀리 찾을 것도 없다. 이 모두가 한국 연속극이나 일간지 극화들이 견지하는 일종의 ‘회장님’ 또는 ‘실장님’ 플롯, 또는 ‘회장님도 몰랐던 회장님 아들’ 플롯, ‘노동계급 출신 실장님의 패가망신’ 플롯. 심지어 제목도 참 많이 빌려왔다. <젊은이의 양지>(1995), <에덴의 동쪽>(2008), 내년에는 아예 <카인과 아벨>이라는 이름의 드라마가 방영된다고.

▲ MBC 드라마 '에덴의 동쪽'ⓒMBC
소프오페라 특유의 이런 ‘축재(蓄財)와 상실의 서사’들을 그냥 게으른 트렌드로 넘기기엔 그 이력이 참 길지 않은가? 어쩌면 게으른 건 그 모티브가 아닌 이를 전개시키고 마무리짓는 방식. 한국의 많은 연속극들이 제공하는 서사들은, 거의 의식 무의식적으로 계급 갈등을 동력으로 삼고 있는데(ex. 자본가의 아들딸과 노동계급 이성의 로맨스) 이는 달리 말하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그만큼 계급간 격차가 크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속극들은, 그런 계급성을 서사의 발단을 위해 대충 끌어들일 뿐이지 별 설득력 없는 불화의 양상으로 전개를 하면서 되레 보수적인 관습들을 내면화시키는 캐릭터들을 디밀다가 끝에는 섣부른 화해를 전시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의 ‘카인’들은 웬만한 혼쭐에는 감응하지 않는다. 몇십억 아파트에 살면서 종부세 천만원에 치를 떨던 ‘강부자’들을 보라. 잠깐의 티격태격이 있을 뿐 시스템에 대한 고민 없이 이들 역시 우리 서민과 함께 울고 웃을 거란 식의 대단원을 그리는 한국 공영방송의 드라마들은 좌편향은 커녕, 실은 극심한 우편향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그 바깥에서 그나마 대안의 서사를 보일 수 있는 작가들은 지금 좀 더 나아가야 할 때. 대단한 사회참여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살이를 닮은 극의 개연성을 위해서라도 한국의 ‘카인’들이 키우는 욕망들이 과하게 증식하고 피해자를 낳고 그럼에도 적반하장의 변호를 하는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얘기. 또는, 약육강식을 넘어선 다른 가치를 이야기하는 길도 있을 터.

여기 그 두 가지 대안을 수려하게 아우르는 영화가 하나 개봉을 앞두고 있다(사실 나는 이 영화를 소개하려고 애먼 잡담을 이리 늘어놓았다). 신동일 감독이 연출하고 박희순, 장현성, 홍소희가 열연하는 <나의 친구, 그의 아내>. 한국 계급사회의 지형도를 구약의 플롯에 (네 이웃의 하나뿐인 양, 그리고 그 양들의 침묵, 훗날의 ‘데어 윌 비 블러드’) 담은 작품.

대학시절 운동권이었던 예준(장현성)은 지금은 잘 나가는 외환딜러다. 그의 둘도 없는 친구 재문(박희순)은 군대 시절 예준에게 <철학 에세이>를 선물 받으며 교감을 나눈 요리사. 남편과 예준의 각별한 사이에 눈을 흘기곤 하는 재문의 아름다운 아내 지숙(홍소희)은 미용사다. 커리어에서는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그만큼 질시도 받는 예준은 맘 둘 곳이 없을 때마다 친구 부부를 찾아 위로를 얻고, 그 둘의 첫 아기에게 ‘민중혁명’을 줄인 ‘민혁’이란 이름을 지어준다. 그러던 어느 날, 예준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정작 그 여파는 재문이 떠맡는데 지숙은 그 내막을 알 도리가 없다.

언뜻 보기엔 한국 아침 드라마의 설정이다. 축재와 상실과 삼각관계의 모티브. 그러나 영화는 좀 더 예민하게 들어간다. 관계가 공백을 갖게 되자 예준은 묘할 정도로 친구의 아내였던 지숙에게 집착을 하는데, 이는 그의 죄의식이 존재를 감화시켰다기보다는 이미 ‘너무 많이 가진 존재’가 되어버린 사람이 그 잉여를 잃기 싫을 때 보이는 패턴(가진 걸 잃기 싫어서 더 가지려는). 그리하여 자신의 죄를 대속해준 절친 재문과 또 다른 피해자인 지숙에게 들이대는 적반하장의 비명. “너희들이 누구 덕에 먹고 사는데!”

요새 우리 사회 기득권층의 단말마와 참으로 닮지 않았는가.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제 밥그릇과 일말의 죄의식 사이에서 인지부조화를 일으킨 채 급우회전 중인 (이미 진보도 보수도 아닌) 인간들의 패턴을 폭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코너링을 어떻게 멈추게 할지를 고민한다(그 뒤에 우리한테 새로운 위로가 기다릴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듯 후일담에 취하기보다는 후세를 건강하게 도모했던, 가령 <2000년에 스물 다섯이 되는 요나> 같은 유럽 왼쪽 영화의 기운 또한 이식한 수작. 노파심에 부연하자면, 정치적인 독해를 접어둔 채 (그러기엔 아쉽지만) 그냥 약하고 아름답고 위험한 인간 군상들을 지켜보는 것으로도 흥미로울 2시간이긴 하다.

2006년에 만들어졌지만 2007년을 그냥 지내야 했고 덕분에(?) 2008년 위험한, 어쩌면 위험해서 적절한 공기를 쐴 이 작품을 기대하시길. 11월27일 소규모 개봉.

※ 이 칼럼에는 2008년 2월 컬처뉴스에 필자가 기고한,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 소개글의 단락들이 인용 또는 재활용되어 있음을 밝혀드립니다.


2001년에 스물다섯이었던 성호. 그 해부터,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아예 모르는 『산만한 제국』『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우익청년 윤성호』『이렇게는 계속 할 수 없어요』등등 극영화 같기도 하고 다큐 같기도 한, 실은 UCC에 가까운 - 중단편을 만들어왔다. 2007년『은하해방전선』이라는 장편영화를 만들며 나름 촉망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별로 안 풀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존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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