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가을 햇볕을 받으려고 앉은 감나무 아래 나무의자에서 포근하고 편안한 산빛과 눈이 시리게 맑은 하늘빛이 만나는 산 능선을 바라봅니다. 가을 하늘 하나만으로도, 가을 산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가득한데 가을산과 가을 하늘이 어우러진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산 능선과 만나는 하늘빛은 유난히 파랗습니다. 어찌 저리 맑은 파란빛이 나올 수 있는지 신기할 뿐입니다.

가까운 곳으로 눈을 돌리면 잎을 모두 떨군 감나무에 붉은빛 도는 노오란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하늘, 산, 땅이 어울려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있어야 할 곳에 모두 있는 모습입니다.

산중엔 요즘 곶감 철입니다. 다른 열매들보다 늦게 익는 감은 들판보다 산중에 많은 나무입니다. 논밭 농사만으로 먹고 살기 힘든 시절 감은 산중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홍시나 곶감으로 먹기도 하고 내다 팔아 식량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래선지 산골마을엔 어디나 감나무가 많습니다. 인적 없는 산중에 감나무가 있으면 이곳은 사람이 살았던 곳입니다. 사람은 모두 떠나도 감나무가 사람 산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지요.

논이 지평선으로 보이는 곳에서 태어나 자란 탓에 고향 마을엔 감나무가 많지 않았습니다. 집 울타리 안에 한 두 그루 정도 있어 지금쯤이면 홍시 된 감이 있나 아침마다 둘러보는 게 일이었습니다. 형제가 많아 먼저 보아야 먹을 수 있기에 부지런을 떨어야 했습니다. 홍시로 먹기도 부족해선지 곶감은 명절이나 제사 때 겨우 구경하는 귀한 먹을거리였습니다. 제사나 명절에 빠지지 않고 상에 오르는 곶감은 우리에겐 어떤 과일보다 맛있는 먹을거리였습니다.

몇 개 오르는 곶감을 먹기 위해 제사 끝나기까지 눈 비비며 기다리곤 했습니다. 기다리다 지쳐 잠들기라도 하면 새벽녘에 깨어 곶감을 찾았습니다. 한 번도 곶감 만드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라 싸리나무에 꽂인 곶감을 어찌 만드는지 궁금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싸리나무에 꽂은 곶감을 보기 어렵지만 곶감은 먹을거리가 부족하던 어린 시절 가장 맛있는 먹을거리로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곶감을 산중에 살다보니 내 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감을 깎아 말리면 겨우내 먹을 수 있다는 지혜를 언제부터 터득했는지 알 수 없지만 무서운 호랑이도 그치게 하지 못한 아이 울음을 곶감이 그치게 한 옛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곶감은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겨울철 먹을거리로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곶감으로 쓸 감은 상강 지나고부터 따기 시작합니다. 딴 감은 껍질을 깎아 감꼭지를 줄에 매달아 말립니다. 곶감을 할 때 감꼭지는 아주 중요한 노릇을 합니다. 탐스럽게 매달린 감을 보면서 감꼭지를 보는 사람은 드뭅니다. 아름다운 빛을 띤 것도 아니고 눈여겨 볼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삶이 그렇듯이 눈여겨 볼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주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소한 것이 없어 쓸모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꼭지는 중요한 것과 보잘것없는 것을 분별하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인지 일깨워줍니다. 모두 제자리에서 제 노릇을 하고 있음을 감꼭지는 가르칩니다.

이렇게 매달린 감은 눈 시린 파란 하늘빛과 따스한 햇빛, 빈 하늘을 스치는 바람과 어울리며 익어갑니다. 늦가을이지만 산골마을 밤은 얼음이 어는 날씨입니다. 밤에는 얼었다 낮에 녹기를 한 달 이상 되풀이하면서 속까지 말랑말랑한 곶감이 되어갑니다. 깎인 감은 표면에 끈끈한 진을 내 수분 증발을 줄이기 때문에 속은 수분이 모두 증발하지 않고 말랑말랑해집니다. 맛있는 곶감은 겉이 쫄깃쫄깃하고 속이 말랑말랑한 것입니다.

지난해 한참 감 따고 깎아 말린다고 부지런 떨고 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감나무에 감들이 모두 얼었습니다. 아직도 감나무에 감들은 많지만 한번 얼어버린 감들은 곶감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자연의 이치는 욕심낸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자연이 흐르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올 해도 언제 한꺼번에 얼지 알 수 없습니다. 감이 많다고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자연이 준 시간동안 부지런히 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지난해까지 감 깎는 게 서툴던 아이들이 올해는 하루 저녁에 300~400개씩 깎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대견하고 훌쩍 자랐음을 느낍니다. 아이들이 곶감 만드는 일을 함께 하면서 감 깎는 밤 시간이 즐거운 일과가 되었습니다. 난로 피워 가을에 거두고 주워 모은 고구마 밤 굽고, 빵 만들어 새참으로 먹으면서 곶감 만드는 시간은 어린 시절 먹었던 잊을 수 없는 곶감만큼이나 맛있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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