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도현의 러브레터’ 마지막 방송이 14일 밤(사실은 15일 새벽) 전파를 탔다. 열성 시청자들은 7년 넘게 사귀어온 애인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애통했을 법도 하다. 누구는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누구는 두 주먹 불끈 쥐며 분통을 터뜨렸을 것이다. 이미 알려졌듯이 다음 주부터 ‘윤도현의 러브레터’는 ‘이하나의 페퍼민트’로 대체된다. 사회자와 프로그램 이름은 바뀌지만, 담당 PD는 그대로라고 한다.

윤도현의 하차에 뒷말이 많다. 사실상 이명박 정권의 낙하산인 이병순 사장이 들어선 뒤로 KBS는 급변하고 있다. 뉴스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수구족벌신문과 한나라당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온 ‘미디어포커스’와 ‘시사투나잇’을 폐지하기로 했다. 정관용·윤도현·김구라 등 정권에 비판적인 것처럼 내비치는 진행자들을 TV와 라디오에서 거침없이 하차시켰다. “제작비 절감”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KBS 내부에서조차 없다.

▲ 윤도현의 러브레터 ⓒ윤도현의 러브레터 홈페이지
윤도현의 하차와 관련해 내가 알아본 바는 이렇다. 애초 윤도현은 지난 10월 초 스스로 하차 의사를 밝혔다. 내년 초 있을 공연 투어와 새 앨범 준비에 전념하고 싶다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제작진은 윤도현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공들여 설득한 끝에 간신히 붙잡았다. 그러다 이번에 급작스레 교체가 결정된 것이다. 윤도현 입장에서 결과적으로는 애초 원하는 대로 된 것이지만, 사실상은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여기까지는 이미 많은 얘기가 오간 부분이니 이제부턴 좀 다른 얘기를 해보려 한다. 지상파 방송의 음악 프로그램에 관한 얘기다. 이번 논란의 대상이 된 ‘윤도현의 러브레터’는 KBS를, 아니, 전 지상파 방송을 대표하는 음악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1991년에 시작한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이문세 쇼’, ‘이소라의 프로포즈’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음악인이 진행했다는 점, 아이돌이나 엔터테이너 대신 ‘진짜’ 음악인들을 무대에 올렸다는 점 등이 하나의 불문율처럼 굳어져왔다.

사실 주말 낮에 방송되는 다른 음악 프로그램들을 보면 참담하다. 음악인이라기보다는 연예인·엔터테이너가 되기 위해 눈이 벌개져서 음악을 도구화한 이들 일색이다. 몇몇 대형 기획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 인기 아이돌과 ‘끼워 팔기’로 무대에 올린다. 음악? 거기에서 음악은 배경일 따름이다. 현란한 춤사위와 화려한 퍼포먼스, 정신을 홀리려는 섹시한 몸짓을 위해 기꺼이 ‘붕어’가 되길 자청한다. 시청자는 일부 10대에 국한된다.

예전에는 어땠을까? 대표적인 음악 순위 프로그램인 ‘가요 톱 텐’을 돌이켜보면, 그땐 전 국민을 아울렀던 것 같다. 초등학생이던 내가 이선희의 ‘J에게’나 김범룡의 ‘바람 바람 바람’이 1위를 하면 누구보다도 기뻐하며 따라 불렀을 정도다. 부모님들도 즐겨 보셨다. ‘가요 톱 텐’ 무대에 오르는 가수들은 음악인이었고, 그들의 음악은 세대를 아울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순위 프로그램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 서태지의 등장 이후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난 기획사의 아이돌 그룹들이 차트를 휩쓸기 시작했다. 10대들은 열광했지만, 다른 세대들은 외면하기 시작했다. 순위 선정에 대한 공정성 논란이 일었고, 음악인들은 하나 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순위 프로그램의 폐단이 심각하게 제기됐고, 결국 순위 제도 자체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무대에 오르는 얼굴엔 변함이 없었고, 급기야 떨어질 대로 떨어진 시청률을 올릴 극약처방으로 ‘뮤티즌 송’ 따위의 이름을 붙인 변칙 순위 제도를 부활시켰다. 물론 그 처방은 통하지 않았다.

이런 우울한 상황에서 그나마 음악에 대한 갈증을 풀어준 게 ‘이소라의 프로포즈’ 류의 프로그램이었다. 거기엔 진짜 음악이 있었다. 난 PC통신으로 애틋한 사연을 올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방청권을 얻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지금은 마누라가 된 당시 여자친구와 함께 갔는데, 솔직히 누가 나왔었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확실히 기억나는 건, 녹화장 분위기가 정말로 아늑하면서도 뜨거웠다는 거다. 무대 위 음악인들의 열정이 그대로 혈관을 타고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소라의 다소 어눌한 진행이 오히려 출연진과 관객을 편안하게 만드는 강점으로 작용하는 듯했다.

이후 진행자가 윤도현으로 바뀌었다. 처음엔 괜찮았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뭔가 변하는 것 같았고, 왠지 예전만큼 정이 가지 않았다. 이유는 출연진에 있었다. 아이돌보다는 진지한 자세로 음악을 하는 이들이긴 하나 매번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사례가 빈번해졌다. 최근 6개월간 출연진 명단을 봤더니, 김건모, 거미, 크라잉넛, 휘성, 자우림, 윤하, 엄정화 등이 자주 얼굴을 비쳤다. 게다가 비, 동방신기, 빅뱅, 원더걸스, SG워너비, 크라운J, 서인영 등 다른 프로그램에서 지겹도록 많이 봤을 아이돌이 이 공간의 상당 부분을 파고들었다.

물론 언니네 이발관, 페퍼톤스, 이지형, W & Whale 등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진짜’ 음악인들을 소개한 건 높이 평가한다. 심지어 아는 사람만 아는 홍대 앞 숨은 고수 갤럭시 익스프레스와 킹스턴 루디스카도 무대에 올랐다. 그럼에도 앞에서 언급한 이유로 섭섭함이 더 앞섰던 건 그만큼 기대치가 높아서였을 터다.

▲ '숨은 고수'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EBS 스페이스 공감 ⓒ EBS 스페이스 공감 홈페이지
이런 면에서 훨씬 진일보한 프로그램이 ‘EBS 스페이스 공감’이다. 다른 프로그램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이들보다는 실력은 있지만 대중에게 다가갈 기회가 없었던 숨은 고수들을 적극 끌어내 무대에 올린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양질의 국내 대중음악의 원류는 이미 ‘홍대 앞’으로 상징되는 인디신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주류 음악계보다 거기서 훌륭한 음악인과 음악이 훨씬 더 많이 나온다. 다만 음악을 애써 찾아듣는 이들을 제외한 다수의 대중에게 다가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무명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윤도현의 뒤를 이을 이하나에 대한 말도 많다. “음악인이 아닌 연기자가 음악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며 진행하겠느냐”는 비판부터 “작곡가 아버지 밑에서 자라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했으며 얼마 전 그랜드민트 페스티벌 무대에서 괜찮은 노래 솜씨를 보여줘 거의 음악인이나 다름없다”는 옹호론까지 다양하다. 내가 보기에 이하나는 진지한 인물이고 음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왠지 잘 해낼 것 같은 기대감이 든다.

중요한 건, 누가 진행을 맡느냐가 아니다. 제작진이 어떤 철학을 갖고 어떤 방향으로 프로그램의 성격을 잡을 것이냐가 본질이다. ‘윤도현의 러브레터’ 방식을 그대로 이어나간다면 절반의 성공은 이룰 수 있을 게다. 하지만 국민의 재산인 전파를 사용하는 데 대한 의무를 다하고 싶다면, 이번 기회에 프로그램을 확 갈아엎을 것을 권한다. 대중을 만나고 싶어 하는 ‘진짜’ 음악인들, 그리고 ‘진짜’ 음악을 갈구하는 대중들. 이들을 잇는 가교 역할을 지상파 방송, 그 중에서도 특히 공영방송이 해야 한다고 난 굳게 믿는다. 로비와 끼워 팔기를 일삼는 기획사들은 10대 대상 음악 프로그램이나 케이블방송에나 넘겨버려라. 그리고 품위와 자존심을 지켜라. ‘이하나의 페퍼민트’가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고품격 음악 프로그램으로 진화하길 기대해본다.

서정민/
한겨레 대중음악 담당기자. 지금은 언론노조에 파견와서 이명박 정권의 언론장악에 맞서 열심히 싸우고 있다. 현재, 한겨레21에 음악칼럼 ‘뮤직박스 올드 & 뉴’를 연재하고 있으며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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