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이하 매드맥스)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헐리우드 액션영화’라는 기성의 문법과 어긋나는 부분이 호사가들의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특히 주인공 퓨리오사로 대변되는 여성이 전면에 나선다는 점이 비평의 주요 대상이 되고 있다. 바야흐로 페미니즘 액션영화가 탄생했다는 평이다.

영화를 비평하는 행위의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주장을 고찰해보기 전에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우리가 영화를 비평하는 행위에 담긴 의미다. 영화 비평은 상투적 글쓰기의 틀을 종종 넘어선다. 상투적 글쓰기의 첫째는 ‘영화의 재미’ 만을 평가하는 것이다. 영화에 별점을 붙이는 행위가 대표적인데, 이것은 상품으로서의 영화를 제 값 주고 소비할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판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를 비평하는 것은 단지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측정하는 것이 아닌, 작품이 사회적 맥락에서 소비되고 공유되는 상황 그 자체에 대해 평하고자 하는 목적이 포함돼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이 작품의 생명력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라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한다.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영화를 비평하는 행위가 감독이 영화에 숨겨놓은 메시지나 특별한 상징을 찾아내는 일종의 ‘수수께끼’ 놀이에 그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작자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을 열어놓음으로 하여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이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 사람들이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고 지적 유희를 즐기길 바라는 게 일반적이다.

이 두 가지 지점 외에도 상기해야 할 지점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영화를 비평하는 방식 중 무엇을 선택하였는가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상을 하나의 자기완결적 작품으로서 보고 쇼트, 앵글, 미장센 등의 다양성에 집중하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작품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과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규명하고자 하는 방법론도 있다. 특히 후자는 많은 경우에 작품을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주관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으므로 더 뜨거운 논란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매드맥스의 페미니즘적 코드, 여성의 주체화 그 이상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고 있는 매드맥스에서의 페미니즘적 코드는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 퓨리오사가 여성이라는 점과 대악당인 임모탄 조의 다섯 ‘아내’(사실은 노예라고 표현하는 것이 알맞다)들이 속박을 풀고 결국 해방을 쟁취한다는 내용의 내러티브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매드맥스를 어떤 획기적인 ‘페미니즘 영화’로 규정하는 것은 다소 부족하다. 그간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서 세계를 해방하는 플롯을 가진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그런 영화의 표현에서조차 오히려 반여성적인 코드가 돌출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매드맥스를 관통하는 이야기에서 여성이 주체가 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의 부분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지점들에 집중할 때에야 매드맥스의 페미니즘적 코드를 제대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매드맥스의 여성들에 대해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워보이’들의 일원인 눅스의 처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눅스는 멸망한 세계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절망 속에서 사는 젊은이다. 그가 가진 사회적 자아의 생존방식은 영웅적 투쟁으로 ‘기억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천국(발할라)에 가서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래봐야 임모탈 조에게 착취당하는 결과로 이어질 뿐인 허망한 명예의 추구를 위해 눅스는 사냥 당하는 피지배자인 맥스를 ‘피주머니’로 만들어 착취하는데 동참하기까지 한다. 이는 오늘날 한국에서 정규직-비정규직 갈등으로 상징되는 피지배계급간의 상호착취에 비견할만 하다.

▲ '피주머니' 신세가 되어 워보이에게 착취당하고 있는 맥스 (화면캡쳐)

'시타델'과 'IS', 약자를 착취하며 강자로 살 수 있다는 거짓된 확신의 유도 체계

어디까지나 ‘시타델’의 질서에서 맥스는 눅스보다 하위에 놓인 개체이다. 결국 눅스는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근본적 원인인 임모탈 조의 지배체제에 대해서는 반항할 최소한의 인식을 갖지 못하면서 오로지 자신보다 약자인 처지에 놓인 개체를 괴롭히고 착취할 줄만 안다. 눅스는 영화 중반이 지나도록 임모탈 조의 체제에 대한 의문을 단 한 번도 갖지 못하며 맥스와 마찬가지로 자신보다 하위의 존재인 여성들을 ‘되찾아옴’으로써 천국에 향할 수 있는 자격을 얻고자 한다.

눅스의 이러한 처지는 마치 IS(이슬람 국가)에 가담하는 젊은이들을 연상케한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고통을 주는 체제의 문제는 무시한 채 모든 책임을 약자에게 돌리며 거짓된 천국을 약속하는 기만적 체제로의 동참을 망설이지 않는다. 얼마 전 여성들로부터의 역차별을 견딜 수 없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SNS에 남기고 터키로 떠난 ‘김군’의 사례도 있다. IS가 세계적 골칫덩이로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는 이들이 젊은이들이 작중의 눅스와 마찬가지로 약자를 착취하며 강자로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기만전술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임모탄 조가 시타텔을 통해 구축한 체제 역시 IS의 그것과 겹쳐보이는 지점이 있다. 임모탄 조는 자원을 독점하고 있으며 이를 조금씩 분배해 체제를 유지한다. 또, 임모탄 조는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8기통!”이라는 반복되는 환호 속에서 다소 종교적 색채가 강한 의식까지 동원하고 있다. 즉, 시타델은 거의 정교일치의 사회이다. 그가 자신의 비루한 육체를 근육질로 보이게 하기 위해 입는 훈장 달린 유리갑옷 역시 잘 조직된 군대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IS의 선전비디오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IS의 전사(?)들은 과거 알카에다 등의 이슬람 테러조직보다 나아진 부분이 있으나 그들의 선전물처럼 완벽한 장비들을 갖추고 전투에 임하지는 못한다.

물론 임모탄 조의 체제가 완벽하게 IS의 그것을 모사하고 있지는 않다. 석유와 무기공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임모탄 조의 체제는 미국을 빗댄 것으로 보이기도 하며, 파시즘에서 ‘정치의 예술화’를 다소 비튼 것처럼 보이는 도프 워리어의 등장은 전형적인 전체주의 체제를 풍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함에도 여기서 굳이 IS의 예시를 든 것은 시타델의 질서에서 임모탄 조가 악독한 독재자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조금 정도는 양심을 갖고 있는 ‘가부장’으로서의 역할을 도맡고 있기 때문이다.

임모탄 조의 특이한 점은 보통 헐리우드 액션영화에서 ‘대악당’이 할만한 일을 모두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 헐리우드 액션영화에서 대악당들은 부하를 쓸모없다고 여겨 쏴죽이거나 여성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짓밟는다. 그런데 임모탄 조는 그들을 결과적으로 비참하게 만든다는 데에서는 다른 대악당들과 다를 바 없는 행위를 하지만 직접적으로 부하를 죽인다거나 도망친 여성들에게 폭력적인 복수로 일관하거나 하진 않는다. 임모탄 조가 퓨리오사 일행에 결정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아이를 임신한 스플렌디드가 활약하는 장면이나 영화 초반부에 자신의 아내들이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에서 노파(영화를 한 번 밖에 보지 않아 이 캐릭터의 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에게 폭력을 행사할 지언정 죽이지 않는 모습 등이 그러하다.

▲ 정조대를 끊어버리는 임모탄 조의 아내들

거대한 가부장 체제에 대한 영화적 은유

물론 임모탄 조의 입장에서는 스플렌디드보다는 뱃속의 아이가 훨씬 더 소중했을 것이며 노파 역시 어떤 쓰임새(예를 들면 세계 멸망 이후 희소한 직업이 됐을, 아이를 받아낼 산파)를 고려해 살려두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정교일치의 전근대적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가부장적 체제가 여기서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만한 여성들이 모유를 생산하고 이것이 주요한 열량섭취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시타델의 상황을 볼 때 거대한 가부장적 체제라는 영화적 표현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타델의 구성원들은 임모탄 조라는 하나의 아버지를 두고 있고, 그들에게 ‘어머니의 우유’라 불리는 모유를 주는 다수의 여성을 어머니로 두고 있는 입장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퓨리오사의 시타델 이탈은 단지 독재자나 기존 지배체제로부터의 도주가 아니라 이러한 가부장적 체제에 대한 명백한 반란으로 볼 수 있다. 퓨리오사 역시 눅스만큼은 아니었겠지만 도주 이전에는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활용되었음이 명백하다. 퓨리오사는 시타델을 벗어나 ‘어머니들의 녹색 땅’을 찾아가는 이유를 묻는 맥스의 질문에 “구원(redemption)"이라고 답했는데 이 역시 퓨리오사가 일으킨 반란의 구체적 의미를 알 수 있는 대답이다. 이 단어의 번역은 물론 영화관의 자막에 나타나있는 것처럼 ‘구원’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여기에는 종교적 의미가 포함돼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기독교적 의미에서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퓨리오사의 ‘구원’은 단지 자신의 운명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속죄하고 세계를 구하는 보다 확장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과거란 임모탄 조의 가부장제에 종속돼 피착취자들을 외면하고 ‘임페라토르(Imperator)’의 지위까지 오른 것을 가리킨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임페라토르’는 번역하자면 ‘최고사령관’이지만 이것이 과거 카이사르가 자칭했던 칭호 중 하나라는 점에서 퓨리오사의 임모탄 조의 군대 내에서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임모탄 조의 ‘정상적 자녀’를 출산하기 위해 착취당하는 다섯 아내를 데리고 퓨리오사가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 것은 단지 도주가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의 체제에 대한 대항, 즉 ‘혁명’인 셈이다.

이러한 ‘속죄’ 코드는 맥스의 괴이한 환상에서도 드러난다. 맥스는 처음 마주친 퓨리오사 일행을 적대적으로 대하며 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물과 자동차와 같은 원하는 것만을 탈취하려 한 이기적 인간이다. 그의 이런 성향은 그가 시시때때로 보는 환각에서 더 드러나는데 영화 초반부 맥스는 이들을 자신이 죽도록 내버려 둔 사람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환상으로 나타나는 ‘딸’의 모습인데, 이는 결국 맥스가 가족과 딸을 지키지 못하고 ‘미친(mad)'상태가 됐다는 점을 암시하는 지점일 것이다.

특이한 것은 맥스가 영화 초반부 자신이 설명하는 것처럼 이러한 환상에 의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이들은 맥스의 앞길을 막는 등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데 일조한다. 그런데 맥스가 퓨리오사 일행에 협력하게 되고 이들의 ‘투쟁’에 동참하게 되면서 이 환상들의 역할이 달라진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소금사막으로 떠나는 퓨리오사 일행을 내버려두고 맥스가 제갈길을 가려 할 때 딸의 환영이 등장해 그들을 쫓아가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환영이 등장하는 것은 맥스가 임모탄 조 휘하의 워보이들과 충돌해 기절했을 때 그에게 “일어나”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맥스는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부발리니 족의 할머니를 구해낼 수 있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보면 맥스가 보는 환영의 정체는 피지배자로서의 연대의식을 고취하는 일종의 ‘양심’이다. 이후 맥스를 집요하게 괴롭혀왔을 그 환영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 자원을 독점하고 여성들을 착취해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는 악당인 임모탄 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이 기행적 경쟁에 몰두하는 여기의 현실

여기서 다시 눅스로 돌아와보자. 맥스와 퓨리오사 일행이 피지배계급의 일원으로서 ‘어머니들의 녹색 땅’을 찾으러 간다고 했을때 눅스가 합류한다고 한 이유는 그가 인생의 목표를 잃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표란 앞서 언급했듯 임모탄 조의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해 입 주위에 ‘크롬’을 칠하고 목숨을 바쳐 빛나는 천국으로 향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임모탄 조가 보는 앞에서 그의 이러한 ‘소년적’ 야망은 붕괴되어 버리고 만다. 눅스는 임모탄 조에게 퓨리오사를 죽일 것을 약속하며 기억해 달라고 말하는데, 기억되기에는 영영 틀려버린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워보이들이 ‘기억해달라’고 말하는 것에서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이 인터넷 등 공간에서 기행적 경쟁에만 몰두하는 오늘날의 모습이 스쳐지나가기도 한다. 퓨리오사 역시 임모탄 조를 살해하기 직전 “나를 기억하나?”라고 묻는데, 이는 ‘기억되기’가 거짓 약속과 기만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드러내는 대사이다. 어쨌든 기억될 수 있는 마지막 순간 눅스는 그 기회를 잃었으므로 삶의 의지도 없어졌다.

그를 구원하는 것은 놀랍게도 임모탈 조의 아내 중 한 명인 케이퍼블이다. 케이퍼블과 눅스의 관계는 어찌보면 전형적인 ‘눈 맞은 연인’ 같지만 케이퍼블의 남편인 임모탈 조가 가부장이라는 점에서 다소 이상한 느낌이 드는 부분이 있다. 즉. 눅스는 ‘어머니의 우유’를 섭취하는 자식의 입장인데 결과적으로는 어머니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전형으로 보기보다는 눅스를 둘러싼 어떤 ‘모성(母性)’의 회복으로 보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임모탄 조의 다섯 아내들은 퓨리오사가 워보이들을 학살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데, 이를 보아도 다섯 아내들과 워보이들 간의 어떤 ‘모자(母子)관계’가 성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볼만 하다.

눅스에게 주목해야 하는 까닭, 피지배자 연대의 의미

즉, 눅스는 여성이 도구적으로만 소비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벗어남으로써, 또 가부장을 배제하는 방식의 모자관계를 회복함으로써, 맥스와 퓨리오사 일행이라는 피지배자들 간의 연대에 함께 함으로써 그가 잃어버린 인생의 목표를 다시 회복한다. “내가 이렇게 멋진 일을 할 수 있다니!”라는 눅스의 대사는 이러한 과정을 거친 그의 자존감 회복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인데,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수많은 문제가 바로 같은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하는 부분이다.

이는 오늘날의 좌파정치가 맞닥뜨리고 있는 딜레마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제공하는 부분으로도 볼 수 있다. 좌파정치는 이제 더 이상 고통받는 이들의 대안이 되지 못하며 과거와 같으면 좌파정치에 희망을 걸었을 고통받는 젊은이들은 이제 극우정치의 품 속으로 뛰어들고 있는데,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오늘날의 좌파정치는 찾지 못하고 있다. 좌파정치의 문제는 그것이 실제로 실패했다는 데에서 온다. 소련으로 상징되는 국가사회주의의 붕괴와 신자유주의 앞에서 무력했던 유로코뮤니즘의 파산이 좌파정치에 대한 더 이상의 희망을 갖기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좌파정치는 이를 돌파할 전략으로 여성주의나 녹색정치 등과의 적극적 연대를 상정한 바 있다. 이는 분명한 성과를 내기도 하였으나 한계에 부딪치기도 했다. 특히 한국적 정치 지형에서 이 과제는 더욱 어려운 것이 되고 있다. 진보정치의 성장으로 인터넷 공간에서나마 여성과 성소수자, 특정 지역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였다고 믿었던 우리는 이제 더 저열한 방식의 공격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신세가 돼버렸다.

'여성 해방'에 다다르는 과정은 좌파 정치의 부차적 과제가 아니다

퓨리오사 일행과 맥스, 그리고 눅스의 이야기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거리를 주고 있다. 맥스가 착취의 도구인 수혈관을 통해 전적인 협력을 하지 않았더라면 퓨리오사는 반란을 성공시킬 수 없었을 것이고, 퓨리오사가 임모탄 조의 체제에 반기를 들지 않았더라면 맥스는 환영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눅스가 케이퍼블과의 관계형성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고 이들의 연대에 합류해 자기 희생을 하지 않았다면 퓨리오사와 맥스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문제가 이와 같다. 그리고 매드맥스는 이를 해소하기 위한 절박한 과제로서 어떤 모성의 회복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모성의 회복이란 가부장제와 이를 통한 가족주의가 강요하는 형태의 모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매드맥스가 보여주는 것은 가부장이 ‘정조대’와 ‘엄마의 우유’를 통해 독점한 모성을 여성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빼앗아 오는 것으로 피지배계급 간의 연대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해방에 다다르는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임모탄 조가 모든 자동차인 ‘기가호스’의 뒷면에는 붉은 색과 검은 색의 깃발이 매달려있다. 임모탄 조의 시체를 기가호스의 위에 싣고 개선해 돌아오는 퓨리오사 일행의 모습은 시타델을 해방시키러 온 영락없는 혁명군이다. ‘엄마의 우유’를 생산하던 여성들이 직접 레버를 조작해 피지배 대중에게 물을 공급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는 여성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모성을 짓밟는 방식으로 생산된 ‘엄마의 우유’에 맥스는 ‘적’의 피를 닦았다. 즉, 매드맥스의 플롯에서 우리는 여성해방의 과제가 좌파정치의 부차적 문제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해결에 착수해야 할 시급한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매드맥스는 ‘페미니즘 영화’로 불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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