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는 그야말로 ‘세계화’의 시대였다. 김영삼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사용한 ‘세계화’라는 단어는, 한국이 지금보다 더 발전되어야 한다는 주창이었다. 그리고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추진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적 체제에 편입을 요구하는 문제적인 시도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시도는 우물 안에 갇혀 있던 한국 문화가 세계와 만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부산국제영화제, 그리고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하 SICAF) 같은 문화적 변화가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됐다.

1995년 처음 막을 연 SICAF는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만화는 대본소나 만화방에서, 애니메이션은 공중파 TV 채널이나 비디오로 빌려보는 것이 전부이던 시절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제작된 다양한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그 해 여름 서울 한국종합전시장(COEX)을 강타했다. 30여개의 기회전시관, 해외 30여개국에서 온 300여점의 작품을 포함한 1000여개의 전시 작품, 그리고 10여개 국가에서 온 100여편의 애니메이션까지. 초기의 임팩트는 SICAF가 오래갈 수 있는 행사가 되는 디딤돌이 되었다. SICAF는 올해 20회를 맞았다.

그동안 SICAF가 마냥 순탄하게만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IMF로 인한 재정난으로 한동안 격년으로 행사를 개최되기도 했다. 1998년과 2000년에는 행사가 개최되지 못했다. IMF의 충격파에서 벗어난 뒤에도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2002년을 제외하면 항상 여름에 열리던 행사가 2006년 바이어들의 원활한 참가를 이유로 갑자기 5월로 변경됐다. 행사 장소도 COEX에서 학여울에 위치한 서울무역전시장(SETEC)으로 변경되었다. 좁아졌고, 관객수는 줄었다.

SICAF는 2009년, 5년 만에 다시 SETEC을 떠나 COEX로 돌아갔지만 완전한 귀환이 아닌 서울캐릭터 · 라이센싱페어(이하 캐릭터페어)와 동시에 개막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더 넓은 공간을 가진데다가 국가 기관에서 개최하는 캐릭터페어에 행사의 한 축을 차지하는 기업 부스가 쏠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렇게 캐릭터페어와 같이 열리며 SICAF는 ‘건프라 엑스포’ 같이 기업의 주도로 열리는 행사 정도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하는 더 깊은 침체기에 빠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2012년, 서울시와 맺었던 지원 협약이 종료되면서 더 이상 SICAF는 COEX는커녕 SETEC 같은 전시 공간도 대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2013년부터 SICAF는 명동과 남산을 거점으로 한 새로운 시대를 반강제로 맞이했다.

예산이 늘어나다, 그리고 아쉬움도 늘어나다

▲ 올해 SICAF는 행사 공간으로 서울시청 광장과 시민청을 추가하며 많은 기대를 낳았다.

이런 상황에서 다행히 올 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지원 협약이 종료된 이후 행사 지원비를 대폭 삭감했던 서울시가 행사 지원금을 5억에서 7억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또한 행사를 공동 주최하는 서울시 중구청도 지원금을 기존 1500만원에서 3천만원으로 올렸다. 행사 공간도 종전의 남산-명동에 서울시청 광장과 시민청이 추가되어, 행사에 대한 기대감도 올랐다.

하지만 정작 행사가 시작되고 나자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작년보다 후퇴한 지점을 보였기 때문이다. 작년 SICAF 어워드를 수상한 김수정 작가에 대한 전시는 분명 흥미로웠다. <아기공룡 둘리>, 아니면 가끔 <일곱 개의 숟가락>의 작가로만 취급되던 김수정의 작품 세계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은 유의미했다. 문제는 이 메인 전시를 받쳐 줘야 할 나머지 전시들이었는데, 대부분의 전시가 구색 맞추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인기 베스트 웹툰전’을 명목으로 열린 <냄새를 보는 소녀> 전시는 연재된 웹툰의 기다란 컷을 그대로 출력한 뒤 만화에서 언급된 향을 직접 맡을 수 있게 한 것이 전시의 전부였다. 작가나 작품에 대한 소개나 분석, 전시라는 특성에 맞는 컷의 배치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웹툰 그룹전’으로 열린 ‘네모펜 스튜디오’는 세 명의 작가들의 작품 컷을 출력해서 붙인 것으로 일관한 모습이었다. 실내에서 열린 전시도 아쉬웠지만 야외에서 열린 전시는 더욱 난감했다. ‘애니, 소리로 보다’는 대표적이다.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들을 수 있는 체험형 전시’라는 설명이 붙은 이 전시는 서울시청 광장에 놓인 부스 한 칸 안에 CJ E&M이 운영하는 애니메이션 채널 ‘투니버스’에서 이전에 발매했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주제곡 앨범 <WE> 시리즈에 담긴 음원을 MP3 플레이어에 담아놓고 여기에 올해 행사의 협찬사인 BOSE의 헤드폰을 꽂은 것이 다였다. 딱히 애니메이션 주제가에 대한 설명은 찾을 수 없었다. 가뜩이나 사람도 많고 후덥지근한 날씨의 야외에서 의자도 없이 노래를 듣는 것은 쉽지 않았고, BOSE의 헤드폰이 야외의 각종 생활 잡음 등을 차단해주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다는 것을 홍보한다는 인상만 강하게 드는 전시였다.

물론 좋았던 전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존에 발매된 애니메이션 피규어를 활용한 ‘오피스 인베이더2’ 전시는 어두운 공간에 전시물을 배열한 뒤 관람객이 손전등을 들고 찬찬히 둘러볼 수 있게 하는 컨셉이 인상적이었다. ‘프랑스-대한민국 상호교류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문화원과 프랑스 앙굴렘 작가의 집의 지원으로 프랑스 작가와 한국 작가가 협업해 작품을 만든 ‘르브뉴 다이어’(Revenus D’ailleurs) 전시는 한국과 프랑스라는 서로 다른 공간을 파악하면서 발생하는 감정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이에 어울리도록 컷을 변형하거나 배치하는 과정을 통해 전시에 효과적으로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외에도 광복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한 ‘지지 않는 꽃’ 전시,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 재개를 기원하는 것을 주제로 삼은 ‘꿈엔들 잊으리오’ 전시가 나름대로 현재의 트렌드를 잡기 위해 신경 쓴 감이 느껴졌던 전시였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전시는 단순히 시기적으로 어울릴지는 몰라도 과연 ‘현재의 만화’를 보여주기에는 많이 미흡한 점이 보였다. 그나마 ‘르브뉴 다이어’가 만화의 현재성을 보여주었을 따름이었다.

애니메이션 영화제도 아쉬웠다. 매년 그랬듯 작품 수급이라는 점에서는 한정된 예산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작품은 물론 애니메이션의 현재성을 잡기위해 고군분투한 흔적이 여기저기에서 돋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영화제 외부에 있었다. 작년까지 남산 서울애니시네마 1개관과 CGV 명동역점 3개관을 활용하던 애니메이션 영화제가 올해부터 갑자기 CGV 명동역점에서의 상영을 3개관에서 1개관으로 줄이며 총상영관수가 2개관으로 반 토막이 나고만 것이다. 그로 인해 경쟁 섹션을 제외한 나머지 상영작 대부분이 딱 한 번 밖에 상영되지 못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말았다. 한국의 유일한 독립 애니메이션 영화제인 ‘인디애니페스트’가 작년부터 CGV 명동역점 1개관을 상영관으로 추가한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퇴보한 모습이다. 이렇게 폐막까지 얼마 남지 않은 2015년, 제 19회 SICAF는 여러 방면에서 난감하고 아쉬운 지점들을 보여주고 말았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만화-애니메이션 행사, 그 기록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

▲ 작년 SICAF 어워드를 수상한 김수정 만화가에 대한 전시는 그의 이력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전시였다. 메인 전시가 아닌 다른 전시에서도 참신한 기획과 현재성이 담긴 모습을 볼 수 있길 바랄 따름이다.

물론 SICAF 측에서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분명 서울시를 비롯한 공공 지원 예산은 늘어났지만 여전히 행사를 주최하는 것은 녹록치 않고 특히 올해부터는 ‘서울시청 광장’과 ‘시민청’이라는 새로운 행사 공간이 추가되며 이전에 없었던 비용을 더 들였어야 했을 것이다. 또한 CGV 명동역점의 경우, 최근 기존 상영관 절반을 ‘CGV 아트하우스’와 ‘씨네 라이브러리’로 개조하면서 대관에 더 힘이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런 측면을 모두 이해한다하더라도 의문은 남는다. 계속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제를 제외한 전시 영역의 경우, 과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만화-애니메이션 행사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최근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와 비교하면 더욱 극명해진다. 작년 ‘만화, 시대의 울림’이라는 메인 전시를 통해 각 시대별로 한국 사회와 만화 간의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BICOF는 SICAF가 개막하기 며칠 전 보도자료를 통해 올해 여름에 열린 행사의 개요를 발표하였다. 올해 BICOF는 ‘70+30’이라는 주제로 한국 만화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상에 대해 제시할 예정이다. 또한 기타 부수 전시 역시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하는 핀란드의 인기 만화 <무민>에 대한 전시, 올해 초 테러 사태가 발생하며 많은 논란과 주목을 동시에 받았던 프랑스의 풍자 만화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전시 등이 준비 중에 있다. 올해 SICAF와 비교해 보면 기획부터 너무 많은 차이가 난다.

SICAF가 해가 갈수록 아쉬운 모습을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예산의 문제가 맞다. 특히 전시와 영화제를 동시에 준비하는 SICAF의 특성상 다른 행사에 비해 많은 예산이 기본적으로 소요될 수밖에 없고, 올해는 조금 늘어났지만 이전에 비하면 여전히 부족한 SICAF의 예산은 좋은 품질을 낳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고려한다 치더라도 남산-명동으로 처음 자리를 옮겨 개최되었던 2013년의 사례를 생각하면 최근 2년간의 SICAF는 한정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도 치열하게 노력하는 대신 구색 맞추기에 머무는 모습을 역력하다. 2013년 전시에서 보였던 ‘명동’과 ‘남산’이라는 지역성은 어느덧 ‘지역 행사’라는 특성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이러한 모습을 상황에서 SICAF와 BICOF는 작년을 기점으로 역전되고 말았고, 올해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점차 커지는 중이다.

이렇게 SICAF가 아쉬운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 한 애니메이션 감독은 “SICAF를 만드는 실무진들은 어떻게든 행사를 잘 꾸리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행사를 주관하는 조직들이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고 평가했다. SICAF는 이제 곧 20회 행사를 맞이한다. 20살 생일은 이미 지났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내년이 되어서야 진정으로 스무 살이 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간 SICAF가 열렸던 20여년의 기간은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귀중한 시간들이다. 그 시간들이 내년 행사에서 귀하게 빛날 수 있을까. 20회 행사가 부디 진화하길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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