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과학의 시대이다. 흔히 사용하는 '비과학적'이란 표현은 사실이 아닌 무엇을 에둘러 얘기할 때 자주 쓰인다. 모든 과학은 근거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과학의 근거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숫자'와 '통계'이다. 과학은 언제나 '숫자'로 시작해서 '통계'로 완성된다. 정확한 '숫자'와 그럴싸한 '통계'가 있어 준다면, 과학은 언제나 사실을 독점하는 신화의 주인공으로 군림할 수 있다.

언론도 사실(fact)을 좇는다. 언론에게 가장 난감한 순간은 '팩트가 아닌' 기사를 좇아온 상황과 마주할 때이다. 그건, 아주 치욕스런 당혹감을 선사한다. 그래서일까? 언론도 점점 과학을 닮아간다. 주장보다는 근거를 중요시한다. 그렇다면 언론의 근거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 역시 '숫자'와 '통계'이다 다만, '구성된' 숫자와 '활용할 수 있는' 통계라는 점이 과학과 다를 뿐이다.

엄밀한 분석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언론도 때로는 숫자로 시작해서 통계로 완성되는 무엇이다. 기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숫자와 통계만 있다면, 언론 역시 언제나 사실을 만들어내는 신화의 창작자로 군림할 수 있다.

숫자와 통계에 대한 언론의 각별한 애정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하(리라 믿는)다. 언론이 숫자와 통계를 사랑하는 또 하나의 참을 수 없는 매력은 별다른 각색 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기사감이 된다는 점이다. 근거가 있냐고? 오늘, 언론을 보면 안다. 딱 그러하다.

▲ 11월 13일자 한겨레 10면.
어제(12일) 유엔인구기금(UNFPA)이 156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2008년 세계 인구현황 보고서'(이하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어제 오늘, 거의 모든 언론이 그 보고서를 기사화했다. 주요 일간지와 지상파의 뉴스 제목을 잠깐 살펴보자.

- 한겨레, 한국 출산율 1.2명…홍콩 빼면 세계 꼴찌
- 경향신문, 한국 출산율 1.2명 '세계 꼴찌'
- 조선일보, 출산율 1.2명… 한국 '세계 꼴찌'
- 중앙일보, 혼자 크는 아이, 성조숙증 위험 높다.
- 동아일보, 애 안 낳는 한국…꼴찌에서 두 번째
- 문화일보, 한국 출산율 유엔통계서 첫 '꼴찌'
- 서울신문, '피임 한국'…출산율 세계최저
- 국민일보, 한국 출산율 1.2명 세계 최저
- 매일경제, 한국 출산율 1.2명 꼴찌서 두 번째
- MBC, 우리나라 출산율 세계에서 2번째로 낮아
- SBS, "한국 올해 합계출산율 1.2명…세계 최저수준"

중앙일보 정도를 제외하곤 거의 유사하거나 아예 같은 제목을 뽑았다. 제목만 보면, 인구현황 보고서여서 인지 보고서에 출산율 정보만 있었다고 믿어진다. 과연 그럴까? 전혀 그렇지 않다.

보고서에는 합계 출산율 외에도 인구수, 영어사망률, 평균수명 등 인구 현황의 기본적인 정보(물론, 여기까지는 편차는 있지만 대다수의 언론이 내용으로 다뤘다)는 물론 국내총생산 대비 공공보건지출비(공보험 급여, 보건소 진료, 질병 예방사업비 등), 1인당 국민 순소득, 에너지 소비지표, 안전식수 공급률 등의 다양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 11월 12일자 내일신문 1면.
여기서 질문이다. 왜 언론들은 사회 보장의 정도를 보여주는 다양한 '숫자'와 '통계'들은 감추고, 오로지 출산율에만 주목한 것일까? 결론만 말하자면, 이 대목에서 개혁, 보수 가릴 것 없이 구성하고픈 '숫자'와 활용하고픈 '통계'만 사용하여 진실을 호도해가는 언론의 총체적 기만함이 드러난다고 하면 너무 무례한 결론일까?

그리고 한 가지만 더, '통계'를 보도하며 '숫자'의 의미를 해설해주지 않는 무비판적인 태도는 또 어떻게 봐야할까? 이왕지사, 출산율에 주목했다고 하면, 왜 애를 안 낳는지, 출산율 세계 최저 국가가 된 구조적 원인은 무엇인지를 설명해줘야 하지 않을까?

'숫자'와 '통계'를 조작하는 과학의 말로는 황우석이 보여줬는데, '숫자'와 '통계'를 설명하지 않는 언론의 말로는 무엇일까?

덧붙임.
그나마 국민일보가 '출산기피 걱정만 하지 말고 근본대책을' 요구하는 사설을 썼다.(논조는 별로 동의가 되지 않지만….) 내일신문은 "공공보건 지출이 '개도국' 수준"이라는 기사를 12일자 1면 탑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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