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1/12) <중앙일보>에 ‘대통령 연설, 반론대상 아니다’는 시론이 실렸다. 일본 게이오대 초빙교수(정치학)인 김경수 교수가 쓴 글이다. 통상적으로 유력 일간지는 제발 자신의 글을 ‘시론’으로 내달라는 요청이 차고 넘친다. 선택은 신문사의 절대적 권한이다. 따라서 다른 기명 칼럼들과 달리 시론은 신문사의 선택된 입장이라고 봐야 한다.

대통령의 연설이 반론 대상이 아니라고 단언한 중앙일보의 이번 시론은 매우 논쟁적인 이야기거리를 던진다. 중앙일보의 이번 시론은 대통령의 연설을 ‘권력의 시녀’, ‘관제방송’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KBS의 일부 관계자들만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가 알고 있는 ‘반론권’이라고 하는 저널리즘의 책임과 의무에 관한 상식을 재해석해보자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11월 12일자 중앙일보 31면.
중요한 시론이다. 찬찬히 살펴보자. 이번 시론은 크게 3가지 논거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우리가 모델로 삼고 있는’ 국가는 ‘미국’이다. 둘째, 미국에서 반론권은 ‘구체적인 법익 침해(중상, 모략, 명예훼손 등)나 사실의 명백한 왜곡이 있을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인정되던 것이고, 이마저도 대부분 ‘폐지’된 지 오래이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노변정담(fireside chats)’의 사례에서 보듯 국정 최고 책임자의 ‘통치행위의 일환’이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렇지 않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이다. 첨삭지도 들어간다.

우선, 우리가 모델로 삼고 있는 국가가 미국이냐에 관한 부분이다. 중앙일보와 김경수 교수에겐 너무나 당연한 사실일지 모르겠으나, 굉장히 조심스럽고 격렬한 논쟁이 필요한 주장일 뿐이다. 지면 관계상 사회적 논쟁은 관두더라도, 언론 관련 부문에서도 이른바, 모델 국가 미국의 현실과 국내의 현실은 안드로메다와 지구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미국이 모델 국가라는 주장을 하면서 좀 덜 뻔뻔하려면, 최소한 국내의 언론 자유가 미국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임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중앙일보가 ‘미국=보편’, ‘미국식 제도=선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인정하고 있듯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반론권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구석으로 밀어낼 이유가 없다. 미국에서 반론권의 법적 위상이 축소된 이유 역시 단순 나열식으로만 활용해서는 곤란하다.

김경수 교수의 말처럼 미국은 ‘언론사가 공개적으로 특정 정당의 후보를 지지 또는 반대하는 것’이 관행화 되어 있다. 국내는, 그렇지 않다. 중앙일보와 김경수 교수가 이해하기 쉽게, 미국식으로 설명해 보겠다. 지금, KBS 구성원들이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견해가 다름을 이유로 이명박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특정 정당의 당원인 대통령이 권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우격다짐으로 방송을 하고 있다. 미국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른바, 모델 국가라는 미국에서 수입해야 할 것은 ‘반론권 없음’의 부분적 사실이 아니다.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미국이 수정헌법 1조의 정신에 따라 거의 무한한 언론·출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는 점일 게다. 국내는, 그렇지 않다.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시론에도 나오는 개념인 ‘공정성의 원칙(Fairness Doctrine)’을 이명박 정부는 완전히 오해하고 또 악용하고 있다. <PD수첩>에 대한 탄압과 <시사투나잇>, <미디어포커스>의 폐지 근거가 무엇인가? 뒤집어진 공정성의 원칙 때문이다. 이 정부의 주요한 인사들과 한나라당이 편성이라고 하는 언론의 고유 권한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이다. 중앙일보의 논거와는 달리 모델 국가 미국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희극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둘째로, 반론권의 존재 이유와 성립 여부에 관한 부분이다. 우선, 김경수 교수가 ‘반론권=언론자유 침해’의 구성으로 글을 몰아가는 방식은 굉장히 겸연쩍은 전개이다. 전혀 사실과 다르다. 전문가스럽지 못한 생떼이다.

미국의 언론 환경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나, 아마도 국내와는 근본 구조 자체가 다르다고 알고 있다. 한국은 지상파 3사가 미디어 환경 전체를 지배하는 독특한 독과점 구조이다. 미국은 지상파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하고, 앞서 밝힌 것처럼 미디어의 정파성이 완전히 보장된다. 아시다시피 우린 그러면 그 자체가 큰일이다. 따라서 무한한 자유와 정파성 보장의 토양인 미국과는 달리 국내의 반론권은 개인의 권익 침해의 경우와 함께 ‘보도된 사실의 이해 관계자가 기사와는 다른 내용의 견해도 게재·방송할 수 있는 권리’까지를 명시하고 있다.(방송법 91조1항) 학문을 수입하는 것은 좋은데, 공부를 게을리하진 말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통치행위’에 관한 부분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인사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실정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통치행위’라는 표현이다. 통치행위는 그 자체로 무엇도 설명하지 못한다. 대통령이 하는 행위라는 의미에서 중립적이다. 그런데 조중동과 한나라당은 ‘통치행위=정당함’으로 착각하고 있다. 통치행위에도 옳고 그름이 있다.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은 통치행위의 일환이다. 너무도 당연히. 그런데 옳지 못한 ‘통치행위’이다. 한 가지만, 분명히 하자. 이렇게 권력을 인격화하여 찬양하는 것을 흔히 ‘아부’라고 한다.

중앙일보 시론, 완벽하게 잘못 짚었다.
이 글은 반론이다.
대통령 연설, 여기는 미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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