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_ 여자 나이 서른 셋 그리고 백수. 미혼이다. 본인 스스로를 ‘무중력의 일상’을 살아가는 여행자라고 소개하는 昇微(승미)님은 그러나 한때 가장 치열한 정치 현장을 취재하는 경제지 기자였다. 글 쓰며 밥벌이 할 수 있는 사람을 꿈꾸며 기자가 되었지만, 4년 3개월 만에 불면증을 얻고, 퇴사했다고 한다. 궁금했다. 만만치 않은 글 솜씨를 지닌, 하지만 만만한 듯 만만한 나이가 아닌 이 언니는 대체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 것일까. 찬란하게 도전하고 번번이 실패하는 청춘들에게 고한다. 기꺼이 실패했던 그러나 아직도 찬란하고 싶은 ‘언니’가 나근나근 건네는 ‘진담’ 말이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꿈은 독립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동네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인구 1만명의 작은 동네에선 교회라는 커뮤니티를 통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버스에서 지갑을 놓고 내려도 그 다음날 아침이면 종점 근처인 우리집으로 돌아오는 동네였다. 내가 떠나고 나서야 편의점이, 파리바게트가 들어섰다.2014년 9월 16일, 서른 두 해 만에 독립을 했다. 동사무소에 가서 전입신고를 하면서 나오는 그 기분은 그야말로 낯설었다. 경기도 '녀자'로 살아온 나는 그야 말로 '서울여자사람'이 되었다. 서울시에 살고 있는 1036만 9593명 중 한 명이 된 셈이다.

스무살 이후 몇 번의 가출 시도가 있었다. 스물 두 살, 고시원에 들어갔다. 취업 준비를 위해서 2시간 걸리는 통학거리를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소설가 박민규의 <카스테라>가 그쯤 나왔지만, 고시원에 살고 있는 나는 그런 정서를 느끼기 어려웠다. 대학가 앞에는 지방 출신, 혹은 수도권 출신의 학생들이 사는 고시원이었고, 깨끗했다. 그러나 아빠가 처음으로 사준 노트북을 잃어버리고 난 뒤 나는 고시원이 싫어졌다. 더운 여름날 문을 열어놓고 잤다가, 술취한 남자가 내 방에 들어올려고 했던 일도 빼놓을 순 없겠다. 그런 뒤로는 얇은 벽 틈 뒤에 있는 다른 사람을 도통 믿을 수 없었다.

두 번 째 독립생활은 어학연수에서였다. 밴쿠버로 연수를 떠났다. 홈스테이 몇 개월 지내다가 스튜디오를 구했다. 멕시코 게이 커플이 살던 깨끗한 곳이었다. 밴쿠버의 다운 타운에서 멀지 않았다. 도보 30분이면 잉글리시 해변이 있었다. 바로 앞엔 파라마운틴 극장이 있었다. 심지어 홈스테이보다 비용이 적게 들었다. 무엇보다도 오렌지 색 벽이 맘에 들었다. 욕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운이 좋게도 좋은 집을 임대 할 수 있었다. 그 커플이 고마웠다.

연수를 돌아와서 집으로 왔다. 한동안 우울했다. 그제서야 내가 사는 집이 보였다. 경기도 변두리의 작은 도시, 그것에 몇 평 안되는 아파트. 내 방이야말로 고시원과 다를 것 없는 작은 방이었다. 그러니 고시원에서 내가 우울하지 않았던 것이다. 작은 창문. 침대와 책상이면 꽉 차는 방. 초등학교 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나는 그 방에 있었다. 그래도 누나에게 방을 양보한 동생 덕에 그정도의 호사를 누렸지만, 연수에 돌아오고 나서 나는 좁은 우물 같은 내 방이 싫어졌다.

아지트를 만들어야겠다. 이런 마음에 나는 대학 생활 내내 나만의 카페를 찾는데 힘을 쏟았다.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괜찮은 카페가 나오면, 혼자 찾아가서 맘에 들면 점 찍어 두었다. 인사동의 카페, 종로의 카페, 카페들이 마치 나의 아지트인냥 소개했다.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됬겠??

서른 두 살, 발품을 팔은 끝에 오피스텔을 구했다. 엄마는 반대를 했다. 결혼하기 전까지 그냥 대충 살지, 결혼해서 남편이랑 돈 모아서 집 마련 하면 된다는 게 엄마의 논리였다. 집을 산 것도 아니고, 전세였지만. 엄마는 언제 결혼해서 시집 갈래 언제 애 낳을래 언제 시리즈로 공격했다. 내년에 내후년에 라며 방어했다. 한동안 크고 작은 언제 시리즈의 내전은 이어졌다.

이사를 했다. 입사하면서 돈 벌면서 사 모은 책들을, 꼬마 때부터 간직했던 피아노 책, 그리고 옷가지들을 박스에 담았다. 책을 담으면 엄마가 빼냏었다. 마치 시집 가는 사람처럼 본가에서 짐을 빼지 말아라. 하나를 담으면 두 개를 빼는 엄마한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렇게 남겨두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혼자 살아보니, 살림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들이 부쩍 많아졌다. 나 한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쓰고 버리는 지를 깨달았다.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이틀에 한 번 꼴로 썼다. 이사 초기 인테리어 한다고 각종 택배를 이용하다가, 박스가 아까워서 별일이 없으면 직접 구매하는 방향으로 바꿨다. 책도 인터넷 배송보다는 바로드림으로. 바로 읽고 싶은 그 마음 그대로. 그 순간에 따르기로 했다. 설거지도 전용 세제를 쓰다가 베이킹 파우더와 소금으로 바꿨다. 물론 거품이 없는 설거지는 여전히 익숙치 않다. 결국 고무장갑을 사고 합성세제를 쓴다. 계면 활성제가 가장 많이 흡수되는 게 손가락이라고 하기에.

무엇보다 혼자 끼니를 때우는 것이 어렵다. 압력 밥솥을 열어보면 하얀 곰팡이가 한가득 피어날 때가 대다수다. 욕심을 부려 밥을 많이 했다가 벌어진 참극이다. 살림을 규모 있게 하는 것. 내가 먹을 만큼 혹은 나눌 만큼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을 매일 깨닫고 있다.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를 냉정하게 보고. 혼자 먹을 때도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정확한 양을 가늠하는 것. 쌀의 물양은 이제 제법 맞추는데, 한그릇을 담기가 참으로 어렵다.

독립 생활이 내게 가르쳐주는 것들은 살림하는 법이다. 쉽게 말하면 욕심 비우기다. 한 그릇을 온전히 담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 까. 공부하라고 설거지도 못하게 하는 엄마의 마음도 알아서, 어릴 때 나는 그 마음에 기댔었다. 5남 1녀의 장녀로 태어난 엄마는 어릴 때 손에 물이 마를 일이 없었다고 한다고 한다. 일이 지겨워서 내게는 집안일은 시키지 않으셨다. 좀더 일찍 집안일을 같이 했다면 나란 사람은 달리 자라지 않았을까. 라며 살림과 일을 동시에 한 엄마를 다시 생각한다. 나는 엄마처럼 살 수 있을까. 아니 엄마보다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런 질문들을 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 공간. 그 작은 아지트가 있어서 나는 좋다.

여행자 昇微 _ 글 쓰며 밥벌이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았다. 그러다 수많은 낙방 끝에 통장 하나 없는 주제에 경제지 기자가 됐다. 그리고 과천을 거쳐 야당 출입으로 총대선을 치르고 산업부 재계를 거친 4년 3개월. 불면증을 얻고 퇴사했다. 현재는 무중력의 세계를 여행하는 가난한 청춘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