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조작위원회’의 ‘밀실’ 보고서를 주목한다>. 21일 저녁 MBC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회사의 입장 제목을 보고 잠시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이해가 됐다. MBC는 이전에도 곧잘, 노조나 시민사회의 주장을 반박할 때 격한 표현을 동원한 보도자료를 냈었다.

‘웹툰 게시’를 이유로 해고당한 권성민 PD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도저히 내부 동력만으로는 회생하기 어려워 보이는 MBC를 위해 40여개의 각종 단체가 ‘MBC를 국민의 품으로! 공동대책위원회’를 출범했을 때도 그랬다. 다른 언론들이 ‘창조해고’라는 조어까지 써가며 비판했던 그 황당한 해고 사태에 노조가 반발하자 “누가 누구를 망나니라고 부르는가”라고 되받었던 MBC였다. MBC 공대위를 향해서는 “노영방송이 그리운 진보단체”라고 쏘아붙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본부장 조능희, 이하 MBC노조)보다 역사가 오랜 민주언론실천위원회(이하 민실위)를 ‘왜곡조작위원회’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한 것은 더 곰곰이 따져 봐야 할 필요가 있다. 말 그대로 ‘민주언론’을 ‘실천’하기 위해 자사 기자들이 MBC 보도의 잘된 점과 아쉬운 점을 따져보고 평가하고 반성하는 내부 목소리를 이제 사측이 아예 감정적으로 거부하고, 오히려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은 MBC의 미래 가능성마저 절망적으로 만드는 신경질이다. (▷ 관련기사 : <MBC, 자사 보도 지적한 노조에 ‘왜곡조작위원회’ 비난>)

정말 MBC는 ‘균형에 맞는’ 보도를 했을까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MB정부의 자원외교 비리 수사 첫 타깃이 된 상황에 부당함을 호소하며, 숨지기 하루 전이었던 8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성 전 회장은 자신은 ‘MB맨’이 아니라 ‘친박인사’라고 강조했다. “어떻게 MB정부 피해자가 MB맨일 수 있나. 2007년 제18대 대선 한나라당 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때 허태열 의원 소개로 박근혜 후보를 만나 뵀고, 이후 박근혜 후보 당선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는 것이 그의 항변이었다.

▲ 4월 13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10일 <경향신문>이 최초 보도한 성완종 전 회장 인터뷰 내용의 핵심 역시, 박근혜 정부의 전임 비서실장 두 사람(김기춘, 허태열)이 대선 경선자금 목적으로 각각 10만 달러, 7억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검찰이 성완종 전 회장 시신에서 발견된 쪽지를 공개해 ‘허태열, 홍문종, 유정복, 홍준표, 서병수, 이병기, 이완구, 김기춘’ 8인의 이름이 공개됐고, 당사자들은 모두 혐의를 부인했으나 정부여당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직격탄을 맞았다.

성완종 전 회장이 노무현 정부 당시 특별사면을 받은 것은 ‘팩트’다. 그러나 이 ‘팩트’에 “새누리당은 떳떳하다. 조사를 해야 한다면 야당도 해야 한다”는 여당의 논리를 더해 “둘 다 잘못” 프레임으로 가는 것은 철저히 ‘관점이 존재하는’ 보도, 즉 '시각'이다. ‘새누리당의 불법 경선자금’이라는 핵심에 집중하지 않고 여야의 입장을 동일한 분량과 비중으로 다룬 MBC 보도는, 이번 사건에서 굳이 찾지 않아도 되는 양적 균형을 이루며 결과적으로 철저히 여당이 제시한 프레임을 따른다는 점에서 질적 ‘편향’이다.

MBC는 성완종 전 회장의 특별사면은 <경향신문>과 <한국일보>가 먼저 보도했다며, 두 신문이 문제제기를 하면 공정하고 MBC가 하면 불공정한 것이냐고 반문했다. <경향신문>과 <한국일보>는 노무현 정부 당시 특별사면을 ‘가장 먼저’ 보도하긴 했으나, 이후 ‘가장 중점적으로’ 보도하지는 않았다. 특히 <경향신문>은 성완종 전 회장 단독 인터뷰뿐 아니라 추가 취재를 거쳐 리스트에 오른 8인 관련 내용을 꾸준히 보도했다. 당일 즉시 나왔던 당사자들의 해명은 후속보도로 뒤집혔고, 이완구 총리의 3000만원 수수 의혹 역시 정확한 날짜와 장소, 전달 방법까지 추가 취재로 알아내 ‘자진사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경향신문>의 단독 인터뷰 음성을 사용하면서 MBC는 출처조차 명기하지 않았다. 10일 <뉴스데스크>는 <'성완종 리스트' 거물급 정치인 8명 이름과 금액 거론> 리포트에서 성완종 전 회장 육성을 보도하며 화면에 ‘OO신문’이라고만 표기했다. 앵커와 기자 멘트 어디에서도 <경향신문>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같은 날 KBS <뉴스9>와 SBS <8뉴스>는 자막과 기자 멘트로 <경향신문>이 제공했다는 점을 밝혔다.

▲ 위부터 4월 10일 KBS <뉴스9>, SBS <8뉴스> 보도. <경향신문>이 성완종 전 회장의 녹음파일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자막으로 고지했다.

고인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찾은 언론사가 ‘단독’으로 입수한 취재 소스를 출처 없이 쓰면서도 “<경향신문> 기사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Raw material(원재료, 취재의 원 소스라는 의미)을 취득해 사용한 것”이라는 어설픈 해명을 내놨다. MBC가 말하는 Raw material은 <경향신문>이 공개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내용이다. 또한 <경향신문>의 보도가 해당 음성을 바탕으로 작성됐기 때문에 “음성을 쓴 것은 맞지만 보도를 인용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경향신문>의 녹취록 전문 공개 하루 전 성완종 전 회장 육성을 무단방송한 JTBC가 ‘언론윤리 위반’으로 거센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을 굳이 적시하지 않더라도, 타사의 단독 취재 소스를 이용할 때 출처를 표시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MBC는 지난 2013년 팩트TV의 박창신 신부의 발언 영상을 쓰면서 팩트TV 로고와 제목을 삭제하고 영상 출처를 ‘유튜브’로 해 방송했다가, 올해 1월 100만원 벌금형을 받은 것을 잊은 것일까. (▷ 관련기사 : <MBC 보도국 간부, 팩트TV 영상 ‘무단도용’ 혐의 벌금형>)

민실위 “뉴스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 가능한 보도국 분위기 만들어야”

MBC노조 민실위도 23일 오후 입장을 내어 MBC에게 “보고서를 제대로 읽어달라”고 요청했다. 비판의 날이 잘못 겨눠져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민실위는 성완종 리스트 보도는 분량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과 ‘프레임’의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민실위는 “우리만의 취재와 추적, 기획이 부족한 상황에서 보도의 균형추가 사건의 본질이 아닌 ‘정치적 공방’의 프레임으로 기울어 가는 듯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라며 “돈의 액수와 시기, 전달 장소에 대한 증언까지 나온 이들에 대한 우리만의 추적 보도가 충실하지 않은 가운데 ‘두 차례 사면은 예외적’이라는 하나의 내용만 가지고 연일 공방을 보도하는 게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 4월 14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또한 MBC가 “두 인사는 공소시효 해석의 문제가 있었고, 대부분의 언론 보도의 초점은 리스트 내용이 사실이라고 가정할 때 공소시효가 명백하게 남은 이완구 총리, 홍준표 지사, 홍문종 의원으로 넘어간 시기였다. 언론이 이른바 ‘살아있는 권력’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일반적 경향”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도 “<뉴스데스크>가 ‘살아 있는 권력’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어서 조그만 희망을 보았다”면서도 “허태열,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죽은 권력’ 취급하는 것엔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이들은 현 박근혜 대통령의 1대, 2대 비서실장이다. 단지 ‘전직’이란 이유로 관심을 덜 두는 것이 과연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판단인가”라고 반문했다.

민실위는 “민실위는 오로지 좋은 뉴스를 만들기 위한 고민을 나누는 장”이라며 “이와 (민실위 발행 이후 회사의 입장 발표) 같은 세부적 사항이 지면으로 논쟁되어야 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런 소통은 보고서 작성 전에 이뤄졌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밀실’ 보고서란 비난 레퍼토리는 이제 그만 썼으면 한다. ‘민실위 취재에 응하지 말라’는 지시가 보도국 곳곳에서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다. ‘민실위 취재에 응하면 불이익을 줄 것’이라거나, 심지어 민실위원을 색출하려는 움직임도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민실위원 명단을 공개하라’는 식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뉴스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이 가능한 보도국의 분위기를 먼저 만들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노사가 ‘공정방송’ 논의하는 공개적 장도 없는 MBC

일찌감치 ‘녹취록 전체 공개’를 요구한 여당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MBC는 “일각에서는 성 전 회장과 통화했던 신문사가 녹취한 내용 전체를 공개하지 않고 일부만 조금씩 내놓는 데 대해, ‘어떤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언론의 정도는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며 <경향신문>을 비난했다. ‘성완종 리스트 사태’에서 국면에 보탬이 되는 비판적 보도를 하지 않은 MBC가 사실상 해당 사안을 리드해 온 언론사에게 ‘일침’을 날린 것이다.

언론학자인 원용진 서강대 교수는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심지어 ‘죽음을 앞두고도’ 공영방송은 믿지 않는다. <경향신문>이 선택된 것은 한국의 공영방송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지표. 제보를 받기는커녕 자신의 안 사정을 바깥으로 제보해야 하는 운명에 놓인 공영방송. 살아있다면 움직여 보길”이라고 썼다. ‘결정적 보도’를 하지 못(안)하는 공영방송의 난감한 처지와, MBC 보도의 편향성과 부실함은 비단 노조만 지적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동시에 드러나는 대목이다.

현재 MBC 보도가 처한 곤란함은 비단 성완종 리스트에만 그치지 않는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당시에도 MBC 보도는 ‘참사’로 비유될 만큼 두드러졌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의 김언경 사무처장은 <미디어스> 기고를 통해 “세월호 참사 초기의 전원구조 오보, 목포 MBC 기자들이 현장의 상황을 정확히 전달했음에도 전원구조 오보를 정정하지 않고 그대로 내보낸 문제, 참사 첫날밤에 보상금을 계산한 태도, 유가족의 조급증이 잠수부의 죽음을 불렀다는 보도 등, MBC의 세월호 보도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라고 질타했다. 특히 7월부터 이어진 세월호 특별법 제정 관련 MBC 보도를 두고는 “한마디로 <뉴스데스크>의 사망을 선고해야 할 수준”이라고 말했다. (▷ 관련기사 : <차라리 보도해주지 않는 것이 다행이 된 뉴스>)

MBC 대주주이자 관리감독기구인 방송문화진흥회가 발행한 <2013년도 문화방송 경영평가보고서>에서도 MBC는 공익성·공정성·신뢰성·유익성 평가에서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방문진은 “공영방송을 자임하는 MBC가 다양성과 유익성은 물론이고, 신뢰성, 공정성, 공익성에서 상업방송인 SBS보다 낮게 평가된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특히 공정성과 공익성 항목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은 앞으로 MBC가 개선해야 할 선제적 목표”라고까지 했다. (▷ 관련기사 : <SBS 밑에 깔린 MBC, 채널 이미지·지표 대부분 최하점>)

현재 노조 조합원 1000명이 넘는 방송사에서 자사 보도를 평가하고 반성하는 ‘공정방송협의회’를 하지 못하는 곳은 MBC가 유일하다. KBS와 SBS는 ‘공정방송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자사 보도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물론 그보다 규모가 작은 방송사, 신문사, 통신사, 인터넷 언론 등 다양한 언론사에도 이 같은 장치는 마련돼 있다. 하지만 MBC는 한 치의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왜곡조작실천위원회’, ‘밀실보고서’ 등 의 표현을 앞세워 이번에도 내부의 목소리를 극단적으로 거부했다.

▲ <경향신문>이 성완종 전 회장의 육성을 공개한 4월 10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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