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 타이거즈 2군 선수 윤완주의 ‘일베’ 용어 사용 논란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야구 커뮤니티를 살펴보니 과거 몇몇 연예인들에 대해 있었던 ‘일베’ 논란 때와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통용되는 용어를 사용했기에 ‘일베’를 했으며 그 세계관에 동의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반응이 주류였다.

팀에서 징계를 받고 사과문을 두 번이나 내놓은 윤완주 선수의 행동에 대한 평가는 보류하도록 하자. 윤완주 선수가 실제로 어떠한 동기로 그 표현을 썼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호남을 연고지로 삼는 기아 타이거즈 선수가 ‘일베’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지는 상징성과 위상을 명확히 이해한 상태로 인스타그램에서 ‘노무노무 일동차렷’이란 말을 썼다고 믿기는 힘들다. 그 용어 한 번의 사용을 통해 그가 ‘일베’의 민주화 혐오, 호남 혐오, 여성 혐오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드러냈다고 믿기는 더욱 어렵다. 광화문에 나온 ‘일베’의 폭식 투쟁을 예시로 드는 분들이 있지만, 그들이라도 호남인이 사장인 회사에 다니면서 그 사장에게 ‘일베’ 인증을 할 수 있을까. 굳이 서로의 심증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반반’의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더라도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본다.

‘일베’ 용어 논란이 일면 어떤 사람들은 “성인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함부로 사용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일베충’임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손쉽게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따라한다. ‘일베’는 동시접속자 수가 몇 만이 되는 거대사이트로 자라났고 거기에서 말을 배운 이들이 아프리카TV나 게임게시판 등에서 용어를 쓰는 일이 흔하다. 또 ‘일베’ 용어 중 상당수는 ‘일베’가 지금의 정체성을 획득하기 이전 디시인사이드 등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많기에 그때의 용례만으로 기억하고 습관적으로 쓰는 이들도 있다. 윤완주 선수가 사용한 ‘노무노무 일동차렷’ 역시 그 자신의 해명에 따르면 아프리카TV에서 익혔다고 한다. 그가 십대시절을 보냈을 운동부의 군대 문화를 고려한다면 그 단어를 손쉽게 수용한 정황 역시 이해된다.

‘일베’ 유저를 친구로 둔 청년들의 말을 들어보면 오히려 ‘일베’를 열심히 하는 이들은 불특정다수 앞에서 ‘일베’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베’ 유저를 친구로 둔 이들은 카카오톡 단체채팅방에서 그들의 용어를 습득하고 재미삼아 따라하게 되는데, 오프라인에서 그럴 경우 외려 그들이 “그러면 곤란하다”며 제지를 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이런 증언에 따르면, ‘일베’ 유저는 자신들의 용어가 배제의 대상이 되었음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게다가 ‘일베’는 친목질이 금지되는 공간이며 서로간에도 ‘저격’을 하기에 누군가 ‘일베’질을 하는 걸 발견하면 그걸 찍어서 올려 추천을 받는 일도 흔하다고 한다.

▲ 24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13 프로야구 LG트윈스 대 기아 타이거즈의 경기. 8회초 무사 1루 기아 윤완주가 희생번트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완주 선수 얘기를 하면서 KBS ‘일베’ 기자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최근 논란이 된 KBS 신입기자의 경우 윤완주 선수 사례와는 전혀 궤가 다른 것 같다. 그는 ‘일베’에 수백회 글을 썼고 우리가 ‘일베’에서 ‘패륜’이라 느끼는 민주화 혐오, 호남 혐오, 여성 혐오의 세계관을 고스란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KBS의 인재 선발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기자를 해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이 사태를 직시하는 방법은 아니다. 물론, 그 기자를 해임해야 한다는 주장엔 당위가 있다. KBS 노조가 사측에 그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지극히 정당하다. 그러나 ‘일베’ 기자의 KBS 진입을 강하게 규탄하는 행동은 우리가 그간 ‘일베’를 배제의 대상으로 취급하면서 외려 그 혐오범죄를 제어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과거를 답습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지점이 있다.

이런 얘기를 꺼내면 어떤 사람들은 “진보지식인들이 ‘내 안의 일베’ 운운으로 ‘일베’를 키웠다”라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일베’ 문제에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야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런데 진보지식인들이 ‘일베’를 키웠다는 얘기는 사실관계에서도 오류가 있다 생각되고, 개혁세력이 ‘일베’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는 ‘정신승리’의 함의가 있다.

일단 나는 진보지식인들이 ‘내 안의 일베’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누군가는 그런 말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보지식인들보다는 그들의 ‘일베’에 대한 비평을 요약하는 단어로 ‘내 안의 일베’라는 표현을 본 것 같다. 그리고 진보지식인들이 ‘일베’ 유저의 세계관을 분석하는 행위를 그들을 이해하고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동치시키는 것을 자주 본 것 같다.

그러나 ‘일베’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보자는 제안은 ‘일베’를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는 전혀 다른 층위에 놓여있는 얘기다. 우리는 심지어 살인자들의 사고방식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는 이유는 살인자를 무죄방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군가 ‘괴물’이 되어 지은 죄를 엄벌하는 것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욕망들이 ‘괴물’로 진화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좋은 사회정책이 좋은 형사정책이다”라는 말도 이런 문맥에서 음미할 수 있다.

예전에 <논픽션 다이어리>(정윤석 감독, 2013)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흥미롭게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는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지존파 사건이란 세 가지 사건을 매개로 지금의 우리에게 ‘좋았던 시절’로 기억되는 1990년대의 어두운 부분을 관통한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 이 영화는 지존파 사건의 주범들에 대해서도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어느 농촌지역 청년들이 한국 사회에 대해 가지게 된 증오심’의 측면에서 설명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의 ‘일베’ 친구들이라면 이러한 노력을 분연하게 거부할 것이다. 그들에게 지존파 사건이란 호남인이란 종자들이 상종 못할 것이란 몹쓸 주장의 근거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끔찍한 인종주의적 시선을 드러낸다. 하지만 같은 견지로 본다면, ‘일베’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잉태되었는지를 따지지 않고 그저 그들을 ‘패륜’으로만 단죄하려는 이들은 ‘물구나무선 일베’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존파 사건의 주범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은 그들을 만들어낸 사회를 반성하고 더 이상 그런 이들을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지 그들을 무죄방면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얼마 전 시사in은 ‘일베’ 유저들의 사고방식을 분석한 기사에서 그것을 ‘무임승차에 대한 혐오정서’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무임승차에 대한 혐오정서가 과연 ‘일베’만의 것인가?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과 그녀가 발의했다고 알려진 어떤 법안에 대한 인터넷의 거센 반발의 정서에서 보이는 사고방식도 ‘무임승차에 대한 혐오정서’라고 요약할 만 했다.

게다가 개혁세력의 지지자들은 ‘일베’ 문제에 대해 나처럼 이렇게 세밀하게 따지는 사람을 보면 “쫌!!! 그냥 ‘패륜’은 ‘패륜’이라 생각하고 걷어차면 그만이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일베’ 친구들은 비슷한 상황에 맞닥트렸을 때 “씹선비질”이라고 표현한다. ‘내 안의 일베’라는 말이 너무 혐오스럽다면, ‘내 안의 씹선비 혐오증’이라고 바꿔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물론 그런 식의 이해를 따라가다 보면 처벌 자체엔 반대하지 않더라도 처벌 수위에 대해선 다른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한다. <논픽션 다이어리>는 지존파 사건의 주범들을 그토록 급하게 사형시킬 필요가 있었느냐는 질문도 던진다. 그들은 이미 종교에 귀의하여 진지하게 반성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들 중에선 미성년자도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은 ‘패륜’을 재빨리 망각하기 위해 그들을 전격적으로 사형시켰다. 그리하여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어느 농촌지역 청년들이 한국 사회에 대해 가지게 된 증오심’에 대한 성찰은 증발되고, 젊은 여성들에게 한복을 입히고 서예를 시키면서 무너진 윤리의식을 회복하자는 미신적인 퍼포먼스만 남았다.

개혁세력이 ‘일베’를 대하는 처지는 김영삼 정권에 비해서도 안쓰럽다. 김영삼 정권이 그들을 실제로 제거하고 망각할 수 있었다면, 개혁세력은 자신들의 관념세계에서만 그들을 제거한 후 망각하며, 사라지지 않고 다시 돌아오는 그들에게 짜증을 낸다. “진보지식인들이 ‘내 안의 일베’ 운운으로 ‘일베’를 키웠다”라는 허황된 진술은 그 점증되는 짜증의 과정에서 찾아낸 새로운 희생양을 보여줄 따름이다. ‘일베’의 조회수가 급상승한 것은 2012년 대선정국이었다. 현상적으로 본다면 차라리 “민주당이 ‘일베’를 정치적 대상으로 취급하면서 그 사이트를 키웠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사실에 부합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일베’를 패륜으로 몰고 그들을 배제하는 것은 혐오발언이 난무하는 지금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이는 ‘일베’ 유저를 축출하기로 결의한, 그리하여 ‘일베’ 용어 하나만 봐도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일베’ 이외의 그 거대 사이트들 게시판에서 옹달샘 멤버들의 여성 혐오적 발언들에 대해선 옹호 논의가 활발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일베’라는 이름을 단죄하는 것은 그 사이트에 존재하는 민주화 혐오, 호남 혐오, 여성 혐오의 세계관을 극복하는 것과 큰 상관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런 세계관은 ‘패륜’적인 ‘일베’ 유저들에게만 존재할 뿐 나와 같은 평범한 상식인에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얄팍한 안위를 위해 기능할 뿐이다.

나는 일전에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 ‘일베’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성폭력 수준으로 행해지는 여성혐오의 정서와 특정 지역 사람들을 배제하는 인종주의적인 지역혐오의 정서일 것이다. 이러한 정서들이 인터넷상의 게시물이나 덧글로 무분별하게 배출되는 것은 일종의 ‘온라인상의 혐오 및 증오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 우리가 가장 긴장하고, 관심을 기울이며, 다음 세대의 하위문화로 남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도 그것들이다.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앞으로 다양한 논의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즉자적으로 분개하는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다양한 비하의 코드나 ‘민주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등은 조금 다른 문맥의 문제다. 물론 비하 중에서도 정말로 심한 수위의 것들이 있고, 그런 것들은 앞에서 논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온라인상의 혐오 및 증오범죄’일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넓은 문맥에서 바라본다면 김대중 노무현을 싫어하는 정치성향 자체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정치인에 대한 비하나 패러디를 어느 수준까지 허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내가 하면 패러디, 네가 하면 고인 능욕’을 넘어서는 각 정치세력과 지지자들 간의 합의가 필요한 일이다.

한국 사회의 경우 새누리당 지지자는 민주당 지지자를 일종의 ‘북한인’으로 바라보고, 민주당 지지자는 새누리당 지지자를 일종의 ‘일본인’으로 바라보며 서로를 국민국가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심각한 분열이 있다. 이 분열 속에서 최소한의 가치규준의 합의를 찾아내는 작업이 바로 ‘민주화’의 일부일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을 경멸하는 어떤 청년에 대한 이쪽 진영의 경멸은 그들이 그러한 종류의 ‘민주화’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씁쓸하게 보여주는 것이고, 이는 어떤 청년들이 어째서 ‘민주화’란 말을 부정적으로 쓰는 것을 그토록 쉽게 받아들였는지를 역설적으로 설명해주는 지점이 있다. 이는 ‘일베’라는 표상에 대한 배제를 통해 해소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 오랜 시간 시민교육을 통해 노력하면서 해결해야 할 크나큰 문제가 될 것이다.

이제 개혁담론과 시민사회는 단지 '일베'를 규탄하고 배제하는 것을 넘어 이러한 문제를 대면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론을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상황은 여전히 동일하다. 여성혐오와 호남혐오를 ‘패륜’이라 규탄하면서도 자신들은 ‘쥐박이’, ‘닭근혜’와 같은 표현을 고수하며 그들의 ‘노알라’를 ‘패륜’이라 규탄하는 자세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 ‘배제’의 정서가 심해질수록 그들은 이쪽의 ‘이중잣대’를 규탄하며 함께 ‘배제’의 정서를 강화할 뿐이다.

‘쥐박이’, ‘닭근혜’와 ‘노알라’는 다르다는 ‘우리만의 논리’를 개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세계관에 동의하는 이들만을 설득할 뿐이다. 말끝마다 미국에서는, 유럽에서는, 운운하는 버릇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찰없이 반복되는 상황은 지겹다. 그 나라의 기준들은 참고사항일 뿐이며 상호 간에 모순되는 경우조차 있다. 그 기준들의 바탕에 있는 보편인권의 가치는 공유해야 하지만 그 가치를 한국 사회에서 실현하려면 우리는 결국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이들과 최소한의 합의를 도출해야만 한다. ‘우리만의 논리’로 그 합의가 가능하겠는가? 우리가 그들을 ‘일본인’(친일파)으로 본다면, 그들은 우리를 ‘북한인’(종북)으로 보는데 말이다.

그러니, ‘내 안의 일베’ 논의가 ‘일베’를 키웠다는 흰소리는 그만 집어치우자. 거세게 분노하며 누군가를 질타하는 듯한 그 어조는 사실상 존재하는 사회문제를 직시하기를 거부하는 외면의 몸짓일 뿐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혐오의 정서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이고도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의 보수세력과도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여야 ‘일베’ 뿐 아니라 성소수자 혐오 발언 등 다양한 혐오세력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일베’에 대한 배제의 몸짓으로는, 결코 혐오를 넘어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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