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부정하고 일본 통치로 한반도가 풍요해지고 치안이 좋아졌다는 내용의 논문으로 논란을 빚어 일본 항공자위대 항공 막료장(한국의 공군참모총장급)에서 보직해임된 다모가미 도시오(田母神俊雄). 일본 정부는 다모가미가 “일본의 침략을 받은 국가에 통절한 반성과 함께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무라야마 담화’를 전면 부정한 것과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반발이 거세질 것을 우려, 지난 3일 그를 정년퇴직 시켰다.

▲ 11월4일 SBS <아침종합뉴스> '강제퇴직'. ⓒSBS 화면 캡처
국내언론들은 일본특파원 발 기사로 그의 논문 내용의 골자를 보도했지만, 주로 과거 한반도 강점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궤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한반도뿐 아니라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행위 전반에 대한 왜곡된 역사인식이자 일본의 재무장을 위한 논리적 근거라는 점에서, 공간적으로 한반도를 넘어서고 시간적으로 미래에 뻗쳐 있다.

특히, 현재 국내에서 이명박 정권과 뉴라이트 세력들에 의한 역사 교과서 개편 시도가 거센 가운데, 이 작업에 깊숙히 개입한 일부 학자들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역사적 해석이나 논리가 일치하는 부분이 적지 않은 점도 눈길을 끈다. 이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독재권력과 기득권 세력들이 친일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뿌리깊게 얽혀 있다는 점에서, 우연의 일치로 치부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 11월1일 SBS <8뉴스> '"조선 압제 해방" 망언. ⓒSBS 화면 캡처
그의 논문은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고, 군사적 강압에 의한 체제안정을 ‘평화’로 미화하며, 식민지 착취를 개발주의 성장담론에 가두는 시각과 논리로 가득차 있다. 이같은 시각과 논리는 국내의 특정 정치세력과 언론, 학계 등에서 최근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사관(史觀)에서도 전형화되고 있다. 이에 <미디어스>는 독자들이 이 논문을 좀더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논문 전체를 번역했다.

다음은 다모가미 도시오의 ‘일본은 침략 국가였나’ 논문 전문이다.

미군은 미일안보조약에 의해 일본 내에 주둔하고 있다. 이것을 미국에 의한 일본 침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양군간의 합의된 조약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당시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침략했다고 하고 있지만, 실은 일본군이 이들 국가에 대해서 주둔도 조약에 근거하고 있음을 의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이후, 한반도와 중국대륙에 군대를 보낸 것이 되지만 상대국의 양해를 얻지 않고 일방적으로 군을 보낸 것은 아니다. 현재 중국정부로부터 [일본의 침략]을 집요하게 추궁당하고 있지만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의해서 국제법상 합법적으로 중국대륙의 권익을 얻어냈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조약 등에 기초한 군을 배치한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압력을 가해서 조약을 무리하게 체결시킨 것이기 때문에 조약 그 차체가 무효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소 압력을 가하지 않는 조약은 존재한 적이 없다.

이 일본군에 대해서 장개석 국민당은 빈번하게 테러행위를 반복한다. 나인(那人)에 대한 대규모 폭행, 참살사건을 반복해서 발생시켰다. 이것은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미군인 요코다 기지와 요코스카 기지 등에 자위대가 공격을 가해서, 미국 군인 및 그 가족을 폭행, 참살하는 것이며, 도저히 허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참을성 있게 평화를 추구하지만 그 때마다 장개석에게 배반을 당하는 것이다. 실은 장개석은 코민테른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1936년 제 2차 국공합작에 의해서 코민테른의 앞잡이인 모택동 공산당 게릴라가 국민당내에 다수 침투해 있었다. 코민테른의 목적은 일본군과 국민당이 싸우도록 해서, 양자를 피폐하게 만든 다음, 최종적으로는 모택동 공산당에게 중국 대륙을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본은 국민당의 거듭된 도발에 결국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1937년 8월 15일, 일본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지나군의 폭루를 응징하도록 남경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고,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 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장개석에 의한 중일전쟁에 끌려들어간 피해자인 것이다.

1928년 장작림(張作霖)열차폭파 사건도 관동군의 행위로 오랜 동안 알려져 왔지만, 근년에 소련 정보기관의 자료가 발굴되어, 적어도 일본군이 저질렀다고 단정할 수 없게 됐다. [마오 (아무도 몰랐던 모택동)(윤치안,강담사)] [황문웅의 대동아전쟁 긍정론 (황문웅,워크 출판)]및 [일본이요 일본의 힘을 닦아라.(사꾸라이 요시코, 문예춘추)] 등에 의하면, 최근에는 코민테른의 행위라는 설이 아주 유력해지고 있다. 중일전쟁 개시 직전인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일본의 중국침략의 증거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동경재판이 한 창일 때 중구공산당의 유소기(劉少奇)가 서구 기자와 기자회견에서 [노구교의 발단은 중국공산당으로 현지 지휘관은 나였다]고 증언한 것을 알 수 있다. [대동아 해방전쟁 (암간홍 암간서점)]. 만약 일본이 침략국가였다라고 한다면, 당시 열강이라고 불리는 나라로 침략국가가 아니었던 나라가 있었던가 묻고 싶다. 이웃 나라가 했다고 해서 일본도 했다는 것은 안되는 일이지만 일본만이 침략국가였다고 할 수는 없다.

일본은 만주도 한반도도 대만도 일본본토도 똑같이 개발하고자 했다. 당시 열강이라고 불리는 나라 가운데 식민지를 내지화를 도모한 나라는 일본뿐이다. 일본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극히 온건한 식민지 통치를 했다. 만주제국은 성립당초인 1932년 1월에는 3천만명의 인구였지만, 매년 100만명 이상이나 인구가 늘어서, 1945년 종전 시에는 5천만으로 증가되어 있었다. 만주의 인구가 왜 폭발적으로 늘었던 것일까. 그것은 만주가 풍부하고 치안이 좋았기 때문이다. 침략이라는 행위가 일어나는 곳에 사람이 모일 리가 없다. 농업이외에 거의 산업이 없었던 만주 벌판은 불과 15년 만에 일본정부에 의해서 활력있는 공업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한반도도 일본통치 아래 35년간 1천 3백만이었던 인구가 2천5백만으로 두배로 늘고 있는 [조선총독부통계연감]. 일본 통치아래 조선도 풍요하고 치안이 좋았다는 증거이다. 전후 일본에 있어서는 만주와 조선반도의 평화로운 삶이 일본군에 의해서 파괴된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정부와 일본군의 노력에 의해서 현지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압정에서 해방되고 또 생활수준도 한 단계 향상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 대만에 학교를 많이 만들고 현지인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도로, 발전소, 수도 등 생활 인프라도 많은 수를 남겼다. 또 1924년에는 조선에 경성제국대학, 1928년에는 대만에 대북제국대학을 설립했다. 일본정부는 명치유신이후 9개의 제국대학을 설립했지만 경성제국대학은 6번째, 대북제국대학은 7번째로 만들었다. 그 후 8번째가 1931년 오사카 제국대학, 9번째가 1939년 나고야 제국대학 순이다. 뭐라 해도 일본정부는 오사카와 나고야보다도 먼저 조선과 대만에 제국대학을 만든 것이다. 또 일본정부는 조선인에게도 중국인에게도 육군사관학교 입교를 인정했다. 전후 마닐라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당한 조선출신의 홍사익(洪思翊)이라는 육군중장이 있다. 이 사람은 육군사관학교 26기 생으로 유황도에서 용맹을 자랑하는 쿠리하야시 타다미치(栗林忠道)중장과 동기생이다. 조선인 이름으로 제국 육군의 중장으로 영예로운 진급을 한 사람이다. 그 한 기 후배로는 김석원 대좌가 있다. 중일전쟁당시 중국에서 대대장이었다. 일본 병영 1천명을 이끌고 수 백 년 동안 학대해온 원종주국인 중국군을 몰아냈다. 그 군으로 공이 훌륭한 것에 의해 천황폐하의 금사훈장을 받았다. 물론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장개석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니이가타 타카다 연대에서 부대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1기 후배인 장개석의 참모로 하응흠(何應欽)도 있다. 조선 이씨왕조 최후의 전하인 이은(李垠)폐하도 육군사관학교 29기 졸업생이다. 이은폐하는 일본에 대해서 인질과 같은 형태로 10살 때에 일본에 오시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폐하를 왕족으로서 정중하게 대우하고, 폐하는 학습원에서 배운 뒤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육군에서는 육군중장으로 영진되었으며 활약했다. 이 이은 전하의 비가 되신 분이 일본의 이방자 비전하이다. 이 분은 소화천황의 비 후보였던 고귀한 분이다. 만약 일본 정부가 조선 이씨왕조를 궤멸시킬 셈이었으면 고귀한 분을 이은전하에게 시집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로써 궁내성은 두 사람을 위해서 1930년에 새로운 주거지를 건설했다. 현재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 별관이다. 또 청조 최후의 황제 또 만주제국 황제였던 부의(溥儀) 전하의 동생인 부걸(溥傑) 전하에게 시집을 간 것은 일본의 귀족인 사가 가의 사가히로 비 전하이다.

이것을 당시의 열강이라고 하는 나라와 비교해서 생각해보면 일본이 만주, 조선, 대만에 대한 생각은 열강의 식민지 통치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에 생각이 미칠 것이다. 영국이 인도를 점령했지만 인도인을 위해서 교육을 제공한 적이 없었다. 인도인을 영국의 사관학교에 넣어주지도 않았다. 물론 영국의 왕실이 인도에 시집을 보내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다. 이것은 네덜란드, 프랑스, 미국 등 다른 나라도 비슷하다. 한 편 일본은 제2차 대전에 앞서서부터 5족협화를 주창하고 야마토(大和), 조선, 한, 만주, 몽고 각 민족이 서로 어울려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꿈에 그리고 있다. 인종차별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당시에 획기적인 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후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이 인종차별철폐를 조약에 기입할 것을 주장했을 때,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었다. 현재 세계를 보면 당시 일본이 주장했던 대로 되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청나라는 1900년 의화단 사건 사후 처리에 대해 압박을 받아서 1901년 일본을 포함한 11개국과의 사이에 의화단 최종 의정서를 체결했다. 그 결과로서 일본은 청나라에 병사 주둔권을 획득하고 당초 2600명의 군사를 뒀다[노구교사건 연구(하타 이쿠히코(秦郁彦, 동경대학출판회)]. 또 1915년에는 원세개 정부와의 4개월간에 걸친 교섭 끝에, 중국이 주장하는 것도 포함해서 이른바 대화21개조 요구에 대해서 합의했다. 이것을 일본의 중국침략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 요구가 열강의 식민지 지배가 일반적인 당시의 국제상식으로 비추어볼 때 그렇게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중국도 한번은 완전하게 승낙을 한 뒤에 비준했다. 그러나 4년 후인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을 허락받은 중국이 미국의 후원을 받아 대화21개조 요구에 대한 불만을 말하게 된다. 그래도 영국과 프랑스 등은 일본의 주장을 지지해 주었다. [일본사로부터 본 일본인 소화편(와타나베 쇼이치(渡部昇一) ,祥傳社). 또 일본은 장개석 국민당과의 사이에서도 합의를 하지 않고 군대를 진군시킨 적이 없다. 늘 중국측의 승낙 하에서 군대를 진군시켰다. 1901년부터 배치하게 된 북경의 일본군은 36년 후인 노구교 사건 당시까지 5600명밖에 없었다.[노구교사건 연구(진욱언, 동경대학출판회)]. 이 때 북경주변에는 수 만명의 국민당군이 있었고, 형태 상으로 보아도 침략과는 거리가 멀다. 시데하라 키주로(幣原喜重郞) 외무대신으로 상징되는 대중융화외교야 말로 일본의 기본방침이며, 이것은 지금도 옛날도 변화가 없다.

어찌됐건 일본이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침략했기 때문에 결국 미일전쟁에 돌입해서 3백 만 명이나 희생자를 내면서 패전을 맞게 됐다.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범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지금은 일본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미국에 의한 신중하고 치밀하게 설치된 덫이었다는 것이 판명되고 있다. 실은 미국도 코민테른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베노나 파일’이라고 하는 미국 공식문서가 있다. 미국국가안전보장국(NSA)의 홈페이지에 개제되어 있다. 방대한 문서이지만 월간정론 2006년 5월호에 아우야마학원대학의 후쿠이 조교수(당시)가 내용을 찾아서 소개해주고 있다. 베노나 파일이라는 것은 코민테른과 미국에 있었던 에이전트와의 교신기록을 모아둔 것이다. 미국은 1940년부터 1948년까지 8년간 이것을 모니터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1회에 한해서 암호문서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것을 해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미일전쟁이 한창 중인 1943년부터 해독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37년이 걸려서 레이건 정권이 탄생하기 직전인 1980년에 이르러서야 해독작업을 끝났다고 하니까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당시는 냉전의 한 중간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것을 기밀문서화 했다. 그후 냉전이 종료된 1995년에 기밀이 해제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여기에 따르면 1933년에 탄생한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정권 하에는 300명의 코민테른 스파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재무성 넘버2인 재무차관 헨리 화이트였다. 헨리 화이트는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인 할로트를 쓴 장본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구인 모겐소 재무장관을 통해서 루지벨트 대통령을 움직여 일본을 미일전쟁으로 몰아붙였다. 당시 루즈벨트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헨리 화이트 등을 통해서 코민테른 공작을 받아들여 전투기 100대나 되는 ‘프라잉 타이거즈’를 파견하는 등 일본과 싸우는 장계석을 음으로 강력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진주만 공격이 일어나기 한달 반 전부터도 중국대륙에서 미국은 일본에 대해서 은밀하게 항공공격을 계시하고 있었다. 루즈벨트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공약으로 대통령이 됐기 때문에 미일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아무래도 용납할 수 없어서 일본이 선제공격을 가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은 루즈벨트가 쳐놓은 그물에 빠져 진주만 공격을 결행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미일전쟁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었을까. 일본이 미국이 요구하는 할로트를 받아들이면 일시적이기는 해도 미일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전쟁을 피할 수 있다 해도 당시 양육강식의 국제정세를 생각하면 미국으로부터 제2·제3의 요구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백인국가의 식민지인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와 세탁기, 퍼스널컴퓨터 등은 놔두면 언젠가 누군가가 만든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 가운데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전쟁에 의해서만 해결되어 왔다. 강자가 스스로 양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싸우지 않는 자는 지배당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대동아전쟁 후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나라들이 백인국가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 인종 평등세계가 도래하고 국가 간의 문제도 서로 이야기함으로서 해결되게 되었다. 그것은 러일전쟁과 대동아전쟁을 싸웠던 일본의 힘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만약 일본이 그때 대동아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현재와 같은 인종 평등세계의 도래가 향후 100년, 200년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들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위해서 싸웠던 선조들과 국가를 위해 존엄한 목숨을 바친 영령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 그 덕에 오늘날 우리는 평화롭게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대동아전쟁을 [그 어리석은 전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전쟁 등을 하지 않고도 오늘날의 평화와 풍요로운 사회가 실현가능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일본의 지도자는 모두가 바보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 않아도 되는 전쟁을 해서 많은 일본국민의 목숨을 빼앗았다. 죽은 사람은 모두가 개죽음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일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말로 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현재에도 한번 결정된 국제관계를 번복하는 일은 극히 곤란하다. 미일안보조약에 기초해서 미국은 일본의 수도권에도 훌륭한 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이것을 일본이 돌려달라고 말해도 그렇게 간단히 돌아오지 않는다.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도 북방 4개 섬은 60년 이상 불법으로 점거된 채로 있다. 독도도 한국에 실질적 지배가 계속되고 있다.

동경전범재판은 그 전쟁의 책임을 전부 일본에게 떠맡기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인드컨트롤은 전후 63년을 지난 지금도 일본인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일본군은 강해지면 반드시 폭주하게 되어 타국을 침략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위대는 가능한 한 움직이기 어렵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자위대는 자국 영역의 경비도 할 수 없다. 집단적 자위권도 행사할 수 없다. 무기의 사용도 극히 제한적이 많다. 또 공격적 무기의 보유도 금지되어 있다. 여러 외국군과 비교해보면 자위대는 글자 그대로 칭칭 얽어매서 꼼짝달싹 못하게 되어 있다. 이 마인드컨트롤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일본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체제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완성되지 않는다. 미국이 지켜주는 방법 밖에 없다. 미국이 지켜주면 일본의 미국화가 가속화된다. 일본의 경제도, 금융도, 상업관행도, 고용도, 사법도 미국의 시스템을 따라가고 있다. 개혁을 진행하는 것이 일본의 전통문화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지금 문화대혁명이 진행 중인 것은 아닌가? 일본 국민은 2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일본은 좋은 나라를 향해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일동맹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지역의 안정을 위해서는 양호한 미일관계가 필수다. 다만 미일관계는 필요할 때에 서로 도울 수 있는 좋은 친자관계와 같은 것이 바람직하다. 아이가 언제까지나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과 같은 관계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나라를 자신이 지키는 체제를 갖추는 것은 일본에 대한 침략을 미연에 방지하는 동시에 외교교섭에 방패가 된다. 모든 외국에서는 아주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일이 일본에 있어서만은 국민의 이해가 따라주지 않는다. 지금 대동아전쟁으로 일본의 침략이 아시아 모든 나라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우리들은 많은 아시아 여러 나라가 대동아전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인식해둘 필요가 있다. 태국에서, 미얀마에서, 인도에서, 싱가포르에서, 인도네시아에서 대동아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에 대한 평가는 높다. 그리고 일본군에 직접 접해본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본군을 높이 평가하고 있고 일본군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이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부풀려 퍼뜨리는 경우가 많은 것도 알아두어야 한다. 일본군의 군기가 타국과 비교해서 얼마나 엄격했는지 많은 외국인들의 증언이 있다. 일본이 침략 국가였다고 하는 등의 이야기는 정말로 억울한 이야기이다.

일본은 오랜 역사와 뛰어난 전통을 가진 멋진 나라다. 우리는 일본인으로써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특별한 사상을 주입하지 않는 한 자신이 태어난 고향과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는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보는 것만으로도 이 나라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멋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짓말과 날조는 전혀 필요가 없다. 개별사상에 눈을 돌려 악행이라고 말해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 선진국 중에서도 폭행과 살인이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은 빛나는 일본의 역사를 되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를 말살당한 국가는 쇠퇴의 길을 밟을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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