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은 천안함 침몰 사건 5주기였다. 이날 천안시에서는 ‘천안함 46용사 5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은 “천안함 용사들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지만, 그들이 남긴 고귀한 호국정신은 국민 마음속에 깊이 남아있다”면서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그러면서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에 “핵무기가 자신을 지켜줄 수 있다는 생각과 무모한 도발을 포기하기 바란다”고 주문하고 “북한이 고립과 정체를 버리고 진정한 변화의 길로 나올 때 새로운 한반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게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다소 남북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지라도 북한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의 원수로서 이러한 발언을 내놓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집권 여당의 대표가 극단적인 발언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은 놀랍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국제공동조사에서도 북한의 소행으로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는데도 북한은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궤변을 일삼고 5·24조치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면서 “5·24조치 해제를 위해서라면 북한의 책임있는 사과와 관련조치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26일 오전 대전 유성구 기초과학연구원(IBS)에서 열린 대전최고위원회의에서 지역 건의사항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5·24조치는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침몰에 대한 대응으로 시행한 대북제재조치다. 우리 국민의 방북 불허, 남북 교역 중단, 대북 신규 투자 금지, 대북지원사업 보류, 인도적 지원 차단 등이 핵심 내용이다. 천안함 침몰 이후 지금까지 남북관계가 경색 일변도의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5·24조치 때문이라는 경해가 지배적이다. 일반적 차원에서 북한과 최소한의 경제협력을 하는 것 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내에서조차 5·24조치의 해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은 이 조치가 국내 기업들의 경제적 이득과도 상충하는 측면을 해소해보자는 주장이다.

새누리당 이인제 의원은 지난 23일 최고위원회에서 “천안함 도발에 있어서 북한 책임자의 처벌이나 사과를 요구하고 배상을 물려야 하는 문제가 내재돼있는 것은 맞다”면서도 “그러나 이는 5·24조치와 관계없고 당시 5·24조치를 취한 것은 지혜로운 조치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5·24조치가 천안함 침몰 사건의 대응으로 이루어진 것은 옳지만 천안함 침몰에 대한 북한의 사과와 5·24조치 간에는 논리적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북한이 사과하지 않으면 5·24조치를 해제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에 무리가 있다고 논리다.

당시 유승민 원내대표는 5·24조치의 해제를 주장하는 여론에 대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의 일방적 해제는 결코 있을 수 없다”면서 “5·24조치의 변경을 검토한다면 5년 전 역사에 대한 단호한 입장과 결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반대 입장을 밝혔다. 또 유승민 원내대표는 북한의 5·24조치 해제 요구에 대해서도 전향적 변화를 보이려는 우리 정부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며 반발한 바 있다.

그런데 김무성 대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김무성 대표는 앞서의 최고위원회에서 “국회가 천안함 폭침 규탄 결의안을 의결할때 당시 민주당 70명 중 69명이 반대표를 던졌다”면서 “반대한 의원 중 30명이 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이라고 지적했다. 작심하고,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한 새정치민주연합의 태도를 문제삼은 것이다. 김무성 대표는 “천안함 폭침이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는 괴담을 주장하고 퍼트리면서 유가족들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하고, 장병들의 거룩한 순국을 폄하하던 세력이 있었다”면서 “그러한 삐뚤어진 사고와 몰염치한 행동을 하는 못된 소수자들이 국론을 분열시키고 남남갈등을 조장해 왔다”고 말하며 ‘일부 좌파세력’을 지목하기도 했다. 이는 그간 새누리당 지도부가 내세워온 ‘종북책임론’과 맞닿아있는 주장으로도 해석된다.

김무성 대표는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천안함 침몰에 대해 발언한 것에도 역시 문제를 제기했다. 문재인 대표는 지난 25일 해병대 제2사단을 방문한 자리에서 “천안함 폭침 사건 자체가 새누리당 정권의 안보무능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천안함을 북한이 침몰시켰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김무성 대표는 “공식적인 입장 표명까지 5년이 걸렸다, 너무 오래 걸렸다”면서 “대북 규탄 결의안에 반대한 것에 대해 새정연은 순국장병과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 26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천안함 용사 5주기 추모식에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표의 발언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중도화 전략의 일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능한 ‘경제정당’과 ‘안보정당’이라는 키워드로 그간 공략하지 못했던 유권자층에 어필하는 행보이다. 특히 문재인 대표는 특전사 출신으로 걸핏하면 병역 논란에 시달리는 새누리당의 주요 대권주자들보다 이 문제에 있어 우위에 서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력한 대선 주자로 이 장점으로 내세우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김무성 대표가 위와 같이 극단적인 포지셔닝을 고수하는 것은 물론 4·29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새정치민주연합에 색깔론을 제기하려는 의도가 분명하지만 대권주자로서 문재인 대표와의 경쟁구도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의도 역시 깔려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안보의제를 놓고 일종의 주도권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김무성 대표의 이 같은 행보가 새누리당에 큰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우경화를 비판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해야 할 진보정당이 지리멸렬한 처지에 놓여있는 상황에서 대권주자로서의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대표는 얼마든지 부담없이 ‘경제정당’과 ‘안보정당’이라는 키워드로 중도화를 감행할 수 있다. 즉, 지금 여야 사이의 전쟁터는 ‘안보’ 이슈에 민감한 보수층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표심을 정하는 중도층의 영역에 형성돼있는 것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김무성 대표가 자신의 우측에서 이슈를 주도하려고 시도하는 유승민 원내대표, 홍준표 경남도지사,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등에 큰 위협을 느끼는 처지가 아니라고 한다면 오히려 문재인 대표에 제대로 대항할 수 있는 길은 중도적 행보를 시작하는 것일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당 대표로서 김무성 대표의 어깨는 무겁고 지금까지 보수적 색채를 너무 강하게 어필해왔기 때문에 이제와서 중도적 행보를 하는 것은 어색하게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대선은 아직도 2년이 남았고 어찌됐건 김무성 대표는 여당의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이다. 일부 새누리당 관계자들은 2017년 대선을 ‘뒤집어진 이회창 대 노무현의 구도’에 빗대고 있다. 여기서 ‘이회창’에 해당하는 것은 일찌감치 유력대권주자의 지위를 공고히 한 문재인 대표를 비유한 것이지만 ‘노무현’은 김무성 대표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상황이 말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김무성 대표가 잘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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