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_ 여자 나이 서른 셋 그리고 백수. 미혼이다. 본인 스스로를 ‘무중력의 일상’을 살아가는 여행자라고 소개하는 昇微(승미)님은 그러나 한때 가장 치열한 정치 현장을 취재하는 경제지 기자였다. 글 쓰며 밥벌이 할 수 있는 사람을 꿈꾸며 기자가 되었지만, 4년 3개월 만에 불면증을 얻고, 퇴사했다고 한다. 궁금했다. 만만치 않은 글 솜씨를 지닌, 하지만 만만한 듯 만만한 나이가 아닌 이 언니는 대체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 것일까. 찬란하게 도전하고 번번이 실패하는 청춘들에게 고한다. 기꺼이 실패했던 그러나 아직도 찬란하고 싶은 ‘언니’가 나근나근 건네는 ‘진담’ 말이다.

올해 3월의 날씨는 여전히 변덕스럽더라. 입학식 날에는 황사 바람이 불고 그 다음날엔 봄비가 내리고, 그러더니 꽃샘추위라며 맑고 세찬 바람이 불더라. 지금 스무 살인 너는 올해 3월을 어떻게 기억하려나.

대학교 3학년 때, 그러니까 3월이 더 이상 설레지 않는 새내기와 헌내기를 거친 그 3학년에 3월 어느 날 이례적으로 폭설이 내렸어. 신기해서 동아리 선후배들과 사진을 찍었더랬지. 사진 속의 나는 힐을 신고 정장 재킷을 입고 있더라고.

취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이 다가오면서, 그때는 ‘고용 없는 성장’ 시대라고 언론에서 떠들었거든. 과 동기들은 하나둘 경영학과 복수전공 혹은 사범대 복수전공을 했거든. 내가 듣던 과에도 인문대 학생들이 복수전공을 한다면서 낯선 얼굴들이 강의 시간에 보이더라고. 그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했어. 동기들과 멀어진 뒤에 대신 내가 듣고 싶은 강의를 들었어. “희곡 작법” “독일 문학으로 본 그리스로마 신화” 같은 것들.

그런가하면 재수 준비를 위해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서 첫차를 타고 노량진으로 간다는 K야. 너의 3월은 견딜 만하니. 새벽 첫 차의 냄새가 익숙하지 않더라고. 특히 1호선엔 술 취한 사람들 반, 빌딩 청소로 하러 가시는 어르신 분들. 그리고 첫 차를 타는 사람들. 알 수 없는 냄새가 싫더라고. 3월이면 첫 지하철이 익숙해졌니. 독서실에서 휴대폰 소리도 진동이 들릴까봐 수건을 감고, 의자에 내 몸을 구겨 넣고 하루 종일 공부하는 시간이 익숙하니.

친구들이 말하는 대학생활이 뭐라고 등급표가 뭐라고, 명문대라는 타이틀이 뭐라고. 취업이 어렵다는데, 명문대를 나와도 취업이 어렵다고 하는데 하루 종일 공부를 하는 너의 마음은 괜찮니. 오늘도 너의 마음은 하루를 잘 견뎌내었니.

아니라면, 직장생활을 시작한 스무 살 K야, 하루하루 학교와는 전혀 다른 밥벌이의 세계에서 견뎌내고 있니. 편의점이든 중국집이든 증권회사든 거기서 신입 사원들의 하루는 전혀 다르지. 인사하는 방법부터 말이야.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퇴근하는 날까지 모두가 너를 지켜보고 감시하는 느낌이지, 그 세계에서 하루 잘 버텨냈니.

다른 친구들처럼 대학 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돈이 뭐라고, 누나가 오빠가 뭐라고, 취업이 어렵다고 해서 취업해서 다행이라는 마음이라며 하루 종일 일을 하는 너의 마음은 괜찮니. 오늘도 너는 너의 마음을 누르고 버텨내었니.

섣부르지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그러니깐, 삶은 주관식이란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12년의 교육동안. 언어영역이든 수리영역이든, 과학탐구영역이든 사회탐구영역이든 외국어 영역이든 다음 중 옳은 것은? 옳지 않은 것은 보기 중에 고르시오. 1번 2번 3번 4번 5번 이라고 보기를 알려주잖아. 그런데 인생은 그게 아니더라고.

스무 살이다. 다음 중 자신에게 알맞은 인생을 고르시오. 1번 수능에 성공했다 대학에 입학해 공무원을 준비한다. 1-2번 대기업을 준비한다. 1-3번 전문직을 준비한다. 2번 수능에 실패해 재수에 도전한다 2-1번 재수에 실패 삼수에 도전한다. 3번 수능에 실패해 편입한다. 3-1번 수능에 실패해 지방대를 간다. 4번 대학 공부해서 대학원에 간다. 5번 대학이 뭐고 군대를 가던지 취업한다.

1번에서 5번 보기 모두 중요한 질문이 빠졌다.

오늘, 행복하니,
내일 아침이 기다려지니.

어른들은 그렇게 말한다. 남들과 비슷하게 대학에 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해야 한다.
인생 뭐있냐. 인생 뭐있냐. 인생 뭐있냐.

미안하지만 그런 말들이 스무 살을 죽이는 길이다. 슬프게도 인생은 하루하루 버텨내고 견뎌내야 한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살아내는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내는 것이다. 왜 내가 오늘 살아야하는가 그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하루하루 사는 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통계를 살펴볼까.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1위가 한국이다. 하루 평균 40명. 10~30대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2013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자살로 사망한 사람은 모두 1만4427명이다. 인구 10만명 당 자살률은 28.3명이다.

그러니 스무살 K야. 지금까지 살아낸 것을 나는 축하한다. 수많은 덕담을 들었겠지만. K야 너의 오늘을 축하한다. 다만 앞으로 녹록치 않다. 쉽지 않다. 더 어려운 일들이 내게 있다. 아마도 등록금을, 연애를, 취업을 그리고 결혼을 내 집 마련을 생각하면 숨 막힐지 몰라. 한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 게임처럼, 처음부터 인생은 리셋 할 수 없기에 ‘끝팡왕’이란 괴물이 어디에서나 나타나서 힘들지 몰라.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일단은 오늘을 오늘 하루가 즐겁다면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자꾸 뭐 먹고 살 꺼냐고 묻는 질문을 때때로는 잊자. 수학능력시험을 보고 난 스무 살, 너는 지금부터 취업을 준비하는 게 아니다. 지금부터 너만의 인생의 답안지를 써내려가는 것이다. 너란 사람, 너만이 쓸 수 있는 인생을 한 줄 한 줄 써내려가는 것이야. 그건 아무도 정답을 알 수 없단다. 그 인생이 100점이다 아니다 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도 너 밖에 없단다.

대신, 꿈을 찾자. 꿈이란 말이 너무 거창하다면 네가 하면서 즐거운 일들을 찾자. 즐거워서 재미있어서 때로는 밥도 안 먹고 해도 좋은 일들. 그런 일이 뭔지 모르겠으니 부딪혀 보자. 학점의 노예를 벗어나서. 딱 1년만 연애를 미친 듯이 해보고, 여행을 미친 듯이 해보고, 춤바람이 나보고 동아리 생활을 미친 듯이 해보고. 스무 살의 특권을 그렇게 한번 써볼래.

재수하거나 취업한 친구들은 적어도 쉬는 하루만 딱 하루만 24시간 너 자신만을 위해서 써보자. 여자 친구나 가족이 아니라. 혼자를 즐겨보자. 그리고 그 시간들을 적어 내려가자.

나만의 답안지를 쓰려면 먼저 나를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군지를 알아가는 공부를 해야 한다. 취업 9종 세트가, 외국어가 취업이 자격증 공부가 아니라,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나를 즐겁게 하는 것, 내가 잘하지는 못하지만 배우고 싶은 것, 내가 진짜로 못하는 것, 남이 가르쳐도 못하는 것들을 적어 내려가야 한다.

왜 적어야 하냐고. 두 가지 이유에서야. 일단 선생이든, 변호사든 공무원이든 회사원이든 연구원이든 일은 ‘국어’로 하는 것이다. ‘영어’로 하지 않는다. 상사와 동료와 후배와 ‘의사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 일을 잘한다. 그리고 일을 잘하려면 상대방이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들어야 한다.

아울러 ‘내’가 잘하는 ‘일’과 ‘못’하는 ‘일’을 명확히 알야 한다. 그래서 ‘못’하는 일이 내게로 올 때, 상대방이 기분이 나쁘지 않도록 ‘거절’을 잘 해야 한다. ‘잘’하는 일이 내게로 올 때는 제가 ‘하겠습니다’라며 상대방을 ‘설득’해야 한다.

더 근원적으로 살펴보면 누구나 욕망이 있다. 티.모.스. 철자는 ‘thymos’. 한마디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다. 칭찬이 고래를 뛰놀게 하듯이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로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다면, 그날의 기분이 내일을 내일 모레를 견뎌낼 용기를 준다. 하루하루 살아낼 버텨낼 용기를 준다. 그런 일들이 그저 밥벌이로만 월급의 액수로만 결정할 수는 없다.

그것을 외면한다면, 삼수를 해서 공무원이 됐는데, 회사원이 됐는데, 변호사가 됐는데도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왜 인생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라며 잘못된 선택을 한다.

살아내자. 그리고 행복하자. 스무 살이 이제부터 시작이다. 너만의 주관식. 너만의 답안지 그것이. 너의 오늘을 내일을 모레를 구원할 테다. 그러니 스무 살 K야, 일기든 다이어리든 적자. 너에 대해서, 너가 무엇에 웃는지, 무엇에 슬퍼지는지를 행복해지는지를. 황사가 불든 세찬 바람이 불든 비가 내리든 너의 유일한 편은 너 자신. 너를 지켜주는 것은 너 자신일 테니 말이야.

여행자 昇微 _ 글 쓰며 밥벌이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았다. 그러다 수많은 낙방 끝에 통장 하나 없는 주제에 경제지 기자가 됐다. 그리고 과천을 거쳐 야당 출입으로 총대선을 치르고 산업부 재계를 거친 4년 3개월. 불면증을 얻고 퇴사했다. 현재는 무중력의 세계를 여행하는 가난한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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