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직불금제 문제가 정국의 뇌관이 되고 있는 현실은 다소 난감하다. 직불금 부정 수급이 대중의 분노를 격발하는 이유가 가난한 소작농 앞으로 가야 할 몇십만원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간 것, 그 중에서도 특히 ‘몇십만원’이라는 액수에 맞춰질 때는 더욱 그렇다. “나도 농촌 출신이다”라는 어느 국회의원의 번지르르한 말만큼이나 쓴웃음을 짓게 하는 일이다. 정치권도 언론도 겉으로는 하나같이 비분강개하지만, 드러내지 않는 속내는 복잡해 보이기만 하다. 일부는 마지못해 화를 내는 것 같고, 다른 일부는 꼼수를 부리는지도 모를 일이다.

▲ 10월18일치 동아일보 5면.
(나같은 농촌 출신 도시 거주자를 비롯해) ‘비농민들’의 집단적 농민 따돌림은 만성화한 지 오래다. 우리 비농민들은 오늘의 농촌 소외에 직간접적인 공동정범이라고 고백하는 게 농민들을 일회적으로 동정하는 것보다는 솔직한 태도다. 우리는 실존을 걸고 농촌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 특히, ‘수도권 규제 완화’ 같은 중앙 본위의 정치경제적 위계 논리에 동조하는 이들은 이 혐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내남없이 흥분과 개탄 일색이다. 밭갈이하는 농민 곁을 승용차 타고 지나가며 “공기 좋은 데 살아서 좋겠어”라고 하는 것과 거울 속 대칭꼴이다.

이 사태는 농지 투기가 본질이다. 사태가 촉발되고 며칠이 지나자 일부 언론들, 심지어 21세기에 16세기 인클로저운동(영국에서 방직산업을 위해 토지에서 농민을 몰아내고 목장을 만들어 울타리를 친 운동)을 주창하는 언론들조차 그 단계까지는 겨우 접근하고 있다. 뼈빠지게 일하고도 쌀 수확량의 3할 이상을 눈뜬 채로 떼이는 농민들의 현실과, 마땅히 그들 앞으로 돌아가야 할 직불금 몇십만원까지 착취해가는 불법 부재지주들에 대한 비난이 주류다. 언론인 수백명이 명단에 들어 있다니, 언론으로선 이만하면 읍참마속인 셈인가.

이에 비해 경제학자 우석훈의 시선은 참신하다. 그는 이 사태를 “국민경제 관점에서, 부재지주들이 불법으로 농지투기를 하면서, 이 부담을 농민과 소비자들 모두가 떠안고 있는 것”이라고 정리한다(10월20일 <프레시안>). 한국의 농지가 투기대상이 된 현실을 한국과 일본의 농지값(3대1), 임차비(6대1) 통계를 비교해 입증한 뒤, 농민의 노동은 헐값으로 취급되고 소비자는 비싸게 주고 사먹어야 하는 ‘시장실패’를 간파한 것이다. 분석도 탁월하지만, 나나 그 자신 같은 ‘비농업인’(소비자)의 실존 문제까지 정직하게 드러내는 쿨한 접근도 와닿는다.

▲ 이봉화 전 보건복지가족부 차관. ⓒ여의도통신
우석훈과 비교할 때, 언론들의 표정은 더없이 ‘엄숙’(?)하다. 이들은 농지투기는 물론 온갖 투기를 하나같이 ‘불로소득’의 담론에 가둬놓는다. 그러나 투기꾼의 비윤리를 아무리 타박해봐야, 그건 칼빈의 ‘금욕적 노동윤리’라는 종교적 잣대로 고도의 정치경제학적인 복잡계 현상을 재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투기꾼들의 잘못은 신성한 ‘교리’를 어겨가며 게걸스럽게 탐욕을 드러내고 세상을 타락시킨 것일 뿐이다. 정작 그들 스스로 그토록 숭배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를 어지럽힌 것에 대해서는 도통 아무 말이 없다.

무지해서가 아니다. 종교적 신심이 도타워서도 아니다. 언론은 그저 장사치의 셈법으로 분노를 상품화하고 있을 뿐이다. 적대감, 분노, 동정, 비애, 흥분, 환희, 열광…. 이것들은 개별적인 감정을 나열해놓은 것이지만, 저널리즘 언어에서는 같은 계열관계(패러다임)에 놓여 있고, 공깃밥에 간장게장처럼, 하나같이 매체 소비를 촉진하는 작용을 한다. 언론은 이를 감성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 활용한다. “아흔아홉 섬 가진 부자가 한 섬 가진 빈자의 곳간을 탐내다니….” 그들은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수용자의 감성을 들쑤시지만, 뒷짐으로는 돈을 센다.

직불금을 가로채고, 불법으로 농지를 취득한 행위를 비난하는 건 마땅하다. 하지만 양은냄비처럼 후끈 달아올랐다가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건 처음부터 달구지 않은 것만 못하다. 부재지주에게 퍼붓는 비난에는 농민들에 대한 비농민들의 심리적 부채감이 함께 휩쓸려 들어가 있다. 한 번 비난을 퍼부을 때마다 심리적 부채감도 덩달아 줄어들고, 공범의식도 희석된다. ‘우리는 할 만큼 한 것’이 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비난을 퍼붓는 자신 또한 농지 투기의 숨은 피해자라는 사실과, 훨씬 더 큰 ‘가로채기’가 만연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여지조차 봉쇄되는 것이다.

직불금을 빼앗긴 농민의 직접 피해액은 수십만~수백만원이다. 직불금 부정 수령으로 새어나간 혈세의 총액은 5천억원 정도로 어림친다. 거액이다. 하지만 다른 가로채기에 비하면 ‘껌값’이다. 이명박 정권은 21일 건설 경기를 살리겠다며 최소 8조원 이상을 건설사들에게 직접 쏟아붓겠다고 발표했다. 미분양 사태는 묻지마식 개발과 봉이 김선달도 울고 갈 높은 분양가에서 비롯됐지만, 분양가를 낮춘다든가 하는 서민을 위한 조처는 전혀 없다. 은행권에 1000억달러를 무조건 지급보증하겠다고 발표한 지 사흘 만이었다. ‘무조건 8조원’과 ‘무조건 1000억달러’는 국민 혈세가 아닌가.

▲ 지난 9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2008년 세제개편’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기획재정부
정권과 자본의 이 거대한 ‘세금 짬짜미’는 국민들이 직불금 가로채기에 비분강개하고 있을 때 벌어졌다. 그 ‘시간차 공격’이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직불금 몇십만원에 파르르 떨던 그 언론들이 여기에는 아무 말이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상위 1%의 종합부동산세와 소득세, 상속세를 깎아주면 4년 동안 세수가 17조원 가까이 줄어든다. 국민경제 관점에서 보면 국민을 위해 쓰여야 할 17조원이 사라지는 것이고, 그만큼의 부담이 나머지 99%에게 떠넘겨진다는 얘기다. 국민경제를 책임진다는 강만수 장관이 “왜 1%가 내는 돈을 99%가 따지느냐”고 지극히 ‘비국민경제적’인 막말을 해도, 그 언론들은 역시 대거리 한 번 없다.

언론의 효과이론 가운데 ‘밴드웨건’ 효과라는 게 있다. 언론의 강력한 의제 설정 기능을, 북치고 나팔부는 악대차가 지나가면 군중이 아무 생각 없이 휩쓸려 따라가는 현상에 빗댄 이론이다. 언론이 이 전지전능한 힘을 착하게 쓰면 좋겠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유독 직불금 문제에만 거품을 물며 농민과 농촌 문제에 가슴아파하는 일부 언론의 모습이 곧이곧대로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다. 이 사태에서마저 이런저런 꼼수를 부리며 본질을 흐리고 있지만, 작은 꼼수에 눈이 팔려 큰 도둑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악어의 눈물을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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