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세상 돌아가는 일에 짜증나고 한마디 쏘아붙여 주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때 우연히 그 상황에 딱 들어맞는 사자성어나 누군가 써놓은 글을 만나면 통쾌하기 이를 데 없다. 대운하 문제로 시끄러운 상황에서 “명박스럽다”는 표현을 만났을 때나, 미국산 쇠고기 파동 와중에 인터넷에서 “대통령을 때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처음이다”는 패러디 만화를 만났을 때가 꼭 그랬다. 내가 하고픈 이야기를 어쩜 이리도 기가 막히게 대변해줄 수 있을까. 감동 먹은 적도 있다.

요즘 광주에서 열리고 있는 제7회 광주비엔날레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은 적 있다. 비엔날레 본전시관 제2전시실(5전시실까지 있다)에 가면 이번 전시 중 가장 황당하면서도 묵직한 작품이 있다. 독일 출신으로 미국에서 작업하고 있는 한스 하케(Hans Haacke)라는 작가인데, ‘정치적 미술을 탐구’하는 그는 국제 미술계에선 꽤나 유명하다고 한다.

그가 이번 비엔날레에 내놓은 작품들 중 <Trickle Up>이라는 작품이 있다. 낡은 소파와 그 위에 쿠션 하나가 달랑 놓인 건데, 처음 볼 때의 황당함이라니. 이게 작품이라고? 그 옆에 붙은 작품해설은 이렇게 쓰여 있다.

“1992년 작품인 ‘빈민층(빈국)에서 부유층(부국)으로의 이동 Trickle Up’- 십자수가 놓인 베개의 높이와 병렬구조를 만들기 위해 개조한 낡은 소파의 닳아 해진 부분들은 기록의 물질성을 보여준다-과 같은 하케의 작업은 알레고리와 메타포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도통 무슨 소린지. 거의 ‘괴담’ 수준이다. 전시장 내 다른 작품들의 설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엔날레 예술총감독은 “그냥 작품 그대로를 느껴봐라”고 했지만, 참으로 막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시작품을 해설해주는 도슨트가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나마 도슨트들마다 설명도 제각각이다.

다행히 연륜 있는 도슨트 덕에 이렇게 정리가 됐다. 경제용어 가운데 트리클 다운(Trickle Down-누수효과)이라는 말이 있다. 1980년대 미국 레이건 정부시절, 경제를 활성화한다면서 추진한 각종 규제완화와 세금인하 정책을 이르는 말이다. 당시 정책입안자들은 “구멍 뚫린 양동이에 물을 담아주면 결국은 그 물이 아래로 흘러내려 대지를 적시듯(Trickle Down), 가진 자나 대기업들에게 혜택을 주면 일자리와 소비가 늘어 결국 서민에게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결국 가진 자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는 반론이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작가는 작품으로 비판에 나섰다. 빈민층(또는 빈국)을 의미하는 해진 소파를 놓고, 그 위에 부유층(빈국)을 의미하는 쿠션(백악관이 수로 놓아진)을 올려놓아 상하관계를 만들었다. 그리곤 제목을 <Down→Up>으로 뒤집었다.

작가의 의도인 ‘트리클 업’은 작품 그 자체로만 봐선 한눈에 찾기 힘들고, 제목을 보고 의미를 이리저리 굴려봐야 가늠할 수 있다. 어쨌거나 이런 복잡한 설명과 이해의 과정을 거쳐 얻게 된 건, 부자들을 위한 정책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각이다.

재밌는 건 공교롭게도 레이건 정부 당시 부통령은 ‘아버지 부시’였고,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기득권과 보수주의자들을 위한 정책들을 폈다. 지금 미국 대통령은 비록 임기가 얼마 남진 않았지만 그 ‘아들 부시’다. 부전자전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 대선전에서 보듯, 아버지를 이어 부자들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펼쳐온 아들 부시의 신세는 처량하다. 같은 공화당 매케인 후보가 민주당 오바마 후보에게 꾸준히 밀리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니.

다시 돌아가 먼 나라 작가의 작품을 보며 떠오르는 건, 이 나라 이명박 정부의 친 부자 정책들이다. 1% 부자들을 위해 종합부동산세를 깎아주고, 건설사 사장 출신답게 건설업자들을 위해 각종 규제를 풀어주며, 여의도 면적의 몇 배에 달한다는 그린밸트도 풀어줬다. 여기에 마구잡이로 쌓아올려 발생한 아파트 미분양 사태까지 정부가 세금으로 해결해준다고 한다. 대운하를 파겠다는 것도 이들을 염두에 둔 공약이었다는 의구심이 여전하다.

이명박 정부 역시 ‘트리클 다운’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히지만 이명박 정부 아래서 이 나라 부자나 기업들 양동이엔 바늘만큼의 구멍도 뚫려 있지 않은 것 같다.

광주지역 일간신문 광주드림 행정팀 기자입니다. 기자생활 초기엔 지역 언론에 대한 감시자 역할을 주로 했는데, 당시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많이 절감했구요. 몇 년 전부턴 김광석의 노래가사 중 "인정함이 많을수록 새로움은 점점 더 멀어진다"는 말을 새기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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