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재단이 지난 8월27일부터 9월2일까지 서울지역 중·고등학생 408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인 결과, 이들이 학교에서 가장 많이 읽는 신문으로 <한겨레>가 꼽혔다고 한다(35.1%, 복수 선택). <경향신문>(24.6%)은 <조선일보>·<중앙일보>(공동 2위·29.8%)에 이어 4위를 차지했지만, 두 신문과 격차가 좁아 사실상 2위권을 형성했다. 이보다 더 눈에 띄는 수치는 이들이 성인이 된 뒤 구독하고 싶은 신문에 대한 조사 결과다. 한겨레(22.5%)가 조선일보(12.5%)나 중앙일보(11.8%)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선호도를 보였다. 경향신문(7.8%)은 여기에서도 4위를 차지했고, 2위와 격차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들 수치는 가까운 미래의 한국 신문시장 지형도를 짐작해볼 수 있게 하는 자료여서 눈길을 끈다. 모집단이 작고 표본 추출방식에도 한계가 있지만, 답변자에게 고민과 갈등을 일으키게 하거나 뜻을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설문이 들어 있지 않아 정성적(定性的) 신뢰도는 높은 편이라고 봐야 한다. 미국 대선 여론조사의 ‘브래들리 효과’(흑인 후보에 대한 백인들의 설문답변과 실제 투표행위가 다른 이중성)처럼 응답자의 정치적 꼼수를 경계할 필요도 없다. 미국에서의 인종차별과 한국에서의 신문 선택은 정치적 부담에 있어서 비교대상이 못된다.

머지않아 한겨레가 조·중·동을 앞지르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런 희망에 고무되는 건 한겨레 내부 구성원만이 아니다. 한국사회를 위해 한겨레가 잘 돼야 한다고, 창간 이후 20년 넘게 한 번도 믿음을 내려놓지 않은 많은 독자들과 (독자는 아니지만) 많은 지지자들에게도 무척 반가운 얘기다. 한국 신문시장의 점유율 분포가 독자들의 선호도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현실을 들어 조사 결과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경품으로 구축된 신문시장 지형도가 한없이 계속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자금력에 한계를 드러내며 ‘독자 매수’ 경쟁에서 뒤처지는 대형 신문이 등장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희망과 백일몽 사이의 거리는 대개 내일이 오늘이 되는 시간의 거리, 딱 그만큼이다. 살아서는 끝내 검증되지 않는 미래, ‘죽어서 천당 간다’는 믿음만이 이런 경험칙에서 유일하게 자유롭다. 이번 조사 결과가 촛불 정국을 거친 청소년들의 정치적 학습 효과와 전혀 무관하지 않은 것부터 주목해야 한다. (조사의 첫 번째 목적과 설계부터가 “촛불집회 기간에 드러난 10대의 정치 및 사회의식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이 결과가 촛불의 반사효과를 반영한 것이라면, ‘거리’는 더욱 좁혀질 것이다. 한겨레 창간 초기, 중앙도서관이나 학과 사무실에 줄지어 서서 한겨레를 읽던 대학생들 가운데 얼마가 40대가 된 지금도 한겨레를 꾸준히 구독하고 있을까.

이쯤 되면 이번 여론조사 결과를 처음 접했을 때 받았던 인상을 조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지레 멀리 달아날 것까지는 없다. 적어도 희망을 ‘재충전’할 수 있을 정도의 메시지는 담겨 있다. 창간 당시 충만했던 희망은 지난 20여년 동안 방전만 계속돼왔다. 재충전이 불가능할 만큼 완전 방전이 되기 직전 ‘차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 보험사’에서 배터리 점프선을 들고 출동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한겨레는 조·중·동을 끝내 앞지를 수 없을 것이라는 객관적 전망이 고착될 무렵,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는 메시지가 구체적인 가능태로 현장에서 울려온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복된 일이다. 일단 벅찬 가슴부터 진정시키자.

중요한 것은 지난 20여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희망의 실천을 기획하는 일이다. 창간만 하면 몇 년 안에 신문시장을 양분할 것 같았던 한겨레가 지난 20여년 동안 희망을 실천하지 못한 원인은 복잡하다. 가장 먼저, 그리고 쉽게 꼽는 게 자본력의 한계와 시장의 장벽 문제다. 그렇다면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겨레는 그런 한계 속에서 과연 최대치를 달성했는가. 어차피 자본력은 고정상수고, 시장 장벽은 좀체 흔들리지 않다가 최근에야 미세한 진동이 감지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가정법 질문도 던져볼 필요가 있겠다. 조·중·동과 똑같은 자본과 똑같은 조건이 주어졌다면 한겨레는 시장을 양분했을까.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다.

도발적으로 말하자면, 지난 20여년의 성적표는 한겨레 내부의 실력 한계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니 그것에 관심조차 없었던 태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여기서 실력이란 신문 만드는 잔기술을 일컫는 게 아니다. 세상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읽어내고, 이를 통해 저널리즘의 틀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할 만한 실력이다. 한겨레는 자신의 실력 한계를 직시하지 않았다. 관심이 없으니 노력이 있을 리 없고, 기존 신문의 틀에 반대 색깔만 입혀 넣는 쉽고 편한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역설적으로 한겨레는 조·중·동 카르텔의 적대적 딸림변수이면서, 조·중·동 카르텔에 의한 반사이익의 최대 수혜자였다. 그래서 지난 시간은 한겨레에게 초라하면서도 아늑한 세월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이런 주장은 지나친 단순화이고, 그에 따른 필연적 과장이다. 하지만 이번 조사 결과 속에서 잘 도드라지지 않은 어떤 수치 하나를 살펴보면 이 주장의 시의성과 시급성마저 평가절하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명확해진다. 교실 안에 존재감 없이 앉아 있는 아이가 나중에 큰 사고를 치는 법이다. 지금의 청소년들이 어른이 되면 신문 가운데 한겨레를 가장 많이 보겠다고 하고, 그 초심이 변하지 않는다 해도, 한겨레의 미래는 재앙으로 다가올지 모른다고, 교실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한 다크서클 아이가 낮게 말을 걸고 있다. “성인이 되면 주로 이용할 미디어로 일간신문을 꼽은 청소년은 4.9%에 불과하다. 인터넷신문(11.5%)은 물론 무료신문(6.9%)보다 낮은 비율이다.”


람보와 코만도가 내기를 했다. 각자 50대씩 때려서 누가 버티나 보자고 했다. 먼저 람보가 코만도를 50대 때렸다. 아픔을 꾹 참고 버틴 코만도가 드디어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람보가 말한다. “됐어. 내가 졌어.” 코만도가 이겼고, 람보는 졌다. 그러나 이긴 코만도는 피떡이 되었고, 진 람보는 주먹만 얼얼할 뿐이다. 한겨레 구성원과 독자, 지지자들을 달뜨게 했던 그 청소년들이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 한겨레는 피떡이 된 코만도 신세가 될지 모른다. 적어도 위의 수치를 신뢰한다면 한겨레는 머지않아 밤톨 키재기 리그에서 조·중·동과 동반하락해, 3부리그인 도토리 키재기 리그에서 1등을 차지할 것이다.

어쩌다 말(언어)로 파들어가다 보니, 이번 조사 결과에 대한 첫인상을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이건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라 좌절의 메시지다.’ 물론, 신문시장의 쇠퇴는 이미 전 지구적 현상이고, 신문시장 내부보다 외부(IT와 뉴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더 강한 지배를 받고 있다는 건 맞다. “그걸 한겨레더러 어쩌란 말인가”라는 반문이 나올 법도 하다. 도대체 한겨레의 과거에 ‘무능’과 ‘게으름’의 딱지를 붙여 욕을 보이는 단순무식한 공격으로 이런 전 지구적 현상과 외부환경에 무슨 변화라도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인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한다.)

하지만 신문의 쇠퇴 속도가 한국 시장에서 유별나다는 사실에 애써 눈감으면 안 된다. 한국이 유일한 IT강국이 아닐진대, 외부환경 탓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 큰 원인은 신문시장 내부에 있다. 그럼 신문시장의 혼탁한 출혈경쟁이 쇠퇴의 주범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단독범은 아니다. 신문은 상품 자체로서 구매가치가 급락했다. 한국의 프로레슬링과 다를 바 없다. 미국의 프로레슬링은 이종격투기가 등장한 뒤에도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한국의 프로레슬링이 인기가 없는 건 이종격투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고, 재미가 없는 것은 기술이 단조롭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실력의 한계다.

한국의 신문들은 세상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읽어내고, 이를 통해 저널리즘의 틀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할 만한 실력이 모자랐다. 더구나 한겨레는 경량급에다 신인선수이면서도, 헤비급 베테랑 선수들이 쓰는 기술만 따라하며 그들과 맞장뜨기에 바빴다. 한겨레가 20여년 동안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가장 손쉽게 택한 것이 계몽주의 전략이었다고, 나는 본다. 기사가 딱딱하네, 재미가 없네 하는 내부 반성은 지엽적이거나 현상적인 문제를 근본 원인으로 잘못 진단한 오류다. 주례사는 본디 재미가 없는 법이다. 기사가 딱딱하고 재미없는 건 바로 그 기사 안에 숨어 있는 주례 의식, 계몽주의 탓이다.

그건 한겨레가 한국사회와, 한겨레 구성원들이 독자와 맺고자 하는 관계방식에서 비롯된다. 한겨레는 한국사회보다 우위에 있고자 했고, 한겨레 구성원들은 독자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을까. 정말 미안한 말씀이지만, 그건 조·중·동이 짜놓은 한국사회·독자와의 관계방식에 쉽게 편승해, 그 권위와 안락을 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겨레는 한국사회에 대해 폐쇄적이고, 한겨레 구성원들은 독자들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건 아닐까. 한마디로 ‘권력감정’이다. 더욱 안 된 말씀이지만, 요즘 독자들은 계몽하기엔 너무 똑똑하다. 특히 청소년들은 계몽하려 드는 걸 무척 재수없어 한다. 그러고 보니 지금 청소년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브레들리 효과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어 보인다. ‘한겨레, 밥맛이야!’


그러나, 좌절 금지! 그렇게 20여년을 하고도, 한겨레는 아직 한국사회에서 가장 신뢰도 높은 신문이다. 더구나 미래의 주력독자인 청소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신문이다. 적어도 희망을 재충전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무엇보다 이 글은 지나친 단순화와 그에 따른 필연적 과장법으로 쓰인 것이다.) 구체적 전망과 전략을 수립하는 것보다 당장 급한 건 뉘엇뉘엇한 석양에 언 몸을 녹이려고 하는 ‘게으른 욕망’을 내려놓는 게 아닐까 싶다. 한줌 볕은 갈수록 빠르게 비좁아지고, 그 안에 오글오글 모여 있어봐야 금 밖으로 밀려나기 전까지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것 말고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게으른 욕망을 내려놓기 전에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서둘러 모닥불을 피우고, 추위에 떠는 이들을 그곳 주변으로 불러 모으시길. 20여년 전 한겨레 희망의 원형도 그랬을 것이다. 초심에서 멀어진 게 문제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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