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급이상 공무원, 공기업 직원, 언론계 인사를 망라하는 우리사회 상당수의 상위층이 사회적 약자인 농민에게 가야할 돈을 가로채는 일이 벌어졌다. 언론계에서도 연평균 5696만원의 연봉을 받는 언론인 463명이 ‘서류 농사’를 통해 쌀 직불금을 가져갔다. 이는 물론 몇십만원되는 직불금이 목표가 아니라 나중에 농지를 팔 때 ‘양도세’를 면제받는 게 최종 목표다.
언론인에게 요구되는 고도의 도덕성을 송두리째 내던져버린 이들이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 언론계를 비롯해 많은 국민들의 눈이 집중돼있다. 하지만 보수신문, 이 가운데 특히 <동아일보>의 지면에서는 직불금을 수령한 언론인에 대한 비판과 명단 공개 요구를 찾아보기 힘들다.
동아일보는 대신, 지난 18일 참여정부가 지난해 쌀 소득보전 직불금에 대한 감사 결과가 최종 확정되기 전에 감사원으로부터 감사 진행상황을 사전에 보고받았다고 보도한 것을 시작으로 ‘참여정부 책임’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오늘자(20일) 동아일보의 직불금 관련 보도를 살펴보자. 동아일보는 쌀 직불금과 관련된 7개 꼭지 가운데 4개의 꼭지를 ‘노무현 정권 겨냥’에 할애했다.
동아일보는 3면 <청, 현안취합→노 집무실서 직불금 회의→감사원, 비공개 결정>에서 노무현 정부와 ‘쌀 직불금 감사’의 전말을 재구성했다. 청와대가 지난해 3월초 현안을 취합하고, 6월 노무현 전 대통령 집무실에서 직불금에 관한 대책회의를 하고, 7월 감사원의 감사결과 비공개 결정이 나왔다는 내용이다.
동아일보는 해당 기사에서 △이호철 국정상황실장이 직불금 문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챙긴 점 △노 대통령이 박홍수 농림부 장관을 강하게 질책한 뒤 얼마 있지 않아 전격 경질한 점 △김조원 사무총장이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 출신이라는 점 등을 들어 “감사위원 회의의 비공개 결정이 청와대의 뜻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이뤄졌다고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대목이 적지 않다”고 재차 꼬집었다.
동아일보는 사설 <쌀 직불금, 노정권의 ‘은폐’가 화 키웠다>에서도 “노무현 정부는 감사로 드러난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고 임기 중에 제도 개선을 매듭짓지도 않아 그 후유증을 지금 고스란히 겪고 있다”며 “미 쇠고기 수입 문제 해결을 미뤄 새 정부 출범후 ‘광우병 사태’를 초래한 것과 여러모로 매우 닮았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노무현 정부는 감사원 보고를 받은 즉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고 대책을 마련했더라면 미비한 제도로 인한 부작용의 확산도 막고 금융위기 극복에 국가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이때에 직불금 소동으로 국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며 “쌀 직불금 제도는 부당 수령자가 공직자 4만명을 포함해 수십만명에 이른다는 사실만으로도 노 정부의 대표적인 국정 실패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고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6면 머릿기사 <감사원장 “공개”…감사내용 보고한 사무총장 “안된다”>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6월 20일 감사 진행상황을 보고받은 것과 7월 26일 감사원이 감사 결과를 비공개하기로 결정한 것을 놓고, 구체적인 근거는 대지 않은 채 비공개 결정에 청와대가 개입했을 개연성을 암시하는 데 지면을 할애하기도 했다.
동아일보의 이같은 ‘노무현 정부 책임 추궁’은 일견 타당하다. 쌀 소득 보전 직불금은 참여정부가 2005년, 기존의 논농업 직불제와 쌀소득 보전 직불제를 통합해 만든 제도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감사원 감사 결과가 공개되지 않은 것도 석연치 않을 뿐더러, 동아일보의 지적대로 정권 차원의 개입 가능성도 충분히 점쳐지는 상황이다.
하지만 문제는 동아일보가 ‘과거’에만 매몰돼있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가 심각한 것은 지난 정권의 사후관리 소홀이나 감사 결과 은폐 때문만은 아니다. 국회의원과 공직자는 물론 언론인 463명까지 포함된 집단적 파렴치 행위가 문제의 더 큰 핵심이다. 더구나 이 문제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따라서 작금의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직불금을 부정하게 수령한 이들의 명단을 공개해 엄중한 책임을 묻는 일이다.
동아일보 말마따나 ‘금융위기 극복에 국가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이때에’ 관련자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국정조사권까지 발동하게 만들고 있는 건 누구인가. 동아일보의 ‘노무현 비판’의 순수성에 의문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노무현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데 쏟는 정성의 10분의 1이라도 ‘부패 언론인 명단 공개 촉구’에 쏟아야 되지 않을까. 동아일보는 진정 명단이 공개되기를 바라는가, 덮이길 바라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