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을 돌이켜볼 때 피로감을 느끼지 않는 한국 사회의 시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2013년을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자녀 보도로 시작된 찍어내기 논란 아수라장’과 ‘철도파업 및 경찰의 민주노총 건물 침탈했는데 노조 간부 못 찾는 굴욕 아수라장’으로 마무리한 한국 사회의 시민들은 박근혜 정부 집권 2년차 때는 한국 정치가 좀더 생산적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대면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첫 기자회견이자 신년 기자회견이 열린 1월 6일 무렵엔 그러한 기대를 유지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조선일보>의 갑오년 신년특집 <통일이 미래다 One Korea, New Asia>에 부응하여 “통일은 대박”이란 발언을 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동북아 평화협력구상’ 등의 화려한 수식어 뒤에 ‘통일대박론’이 추가되었다. 이어서 3월엔 독일을 국빈 방문인 대통령이 ‘드레스덴 구상’을 내놓기도 했다. 적어도 남부교류협력 부문에선 박근혜 정부가 전임 이명박 정부와는 다소 다른 접근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조성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모든 것이 무망해졌다. 연초의 ‘설레발’은 남북교류협력에 대한 진지한 구상이 아니라 북한 김정은 정권의 장성택 숙청 및 처형 이후 북한 붕괴에 대한 섣부른 기대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결과적으로는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정치논의가 공전하면서 박근혜 정부는 ‘임기 2년’을 허송세월했다. 문창극과 같은 총리후보가 지명되고 청와대에서 생산된 ‘찌라시’(?)가 흘러나오는 ‘시련’은 어쩌면 그때 이미 예비된 것인지도 모른다.
박근혜 정부의 ‘허송세월’에 대한 전망은 사실 신년 기자회견 내용을 꼼꼼히 뜯어본다면 새삼스러울 게 없는 예측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기자회견에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제시했으며, 그 구체적인 구상으로 첫째,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개혁, 둘째, 창조경제를 통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혁신경제, 셋째, 서비스산업을 육성해서 만드는 내수활성화 경제를 제시했다.
‘비정상의 정상화’의 사례로는 원전비리, 공공부문 개혁, 세제개혁 등이 제시됐고 창조경제에 관련해선 벤처창업 생태계 육성과 기후변화 대응을 통한 신재생에너지산업 육성 등을 언급했다. 내수경제 활성화에 대해선 보건·의료, 교육, 관광, 금융, 소프트웨어 등 5대 유망 서비스 산업을 집중 육성하여 내수와 수출이 균형잡힌 경제를 만들겠다고 밝히며 “투자의 가장 큰 장벽인 규제를 풀겠다”고 말했다.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26일 오후 국회 당대표실에서 열린 '공적연금강화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지도부 간담회'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제안들은 얼핏 보면 한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대면한 듯했다. 각론을 들어다보지 않고 얼핏 그 자체로만 보면 ‘진보적 경제정책 방향’으로 보일 수도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각론을 살펴보면 2012년 내세웠던 경제민주화는 완전히 사라지고 정책목표의 방향전환이 완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령 내수진작을 위한 서비스산업 육성의 각론이 규제완화로 채워진 것은 재벌들의 서비스산업 진출로 해당 영역의 비용은 상승하고 저임금일자리나 양산될 상황을 의도한 것이었다. 부동산 문제에 대한 해법을 말하면서 하우스푸어 구제를 위한 부동산경기 활성화와 공공임대주택 건설을 통한 전월세 가격 통제를 동시에 말했는데, 양립할 수 없는 정책적 목표를 말한 것은 극히 일부의 정책수혜자를 만들어내면서 부동산시장에 대한 영향은 최소화하고, 어떻게든 현재의 가격을 임기 동안에는 유지하겠다는 ‘시간 떼우기’ 복안에 다름 아니었다. ‘개혁’보다는 ‘유지’를 원하는 박근혜 정부의 기조는 이미 이 시점에 완성되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2014년의 정치상황이 이러한 대통령과 정부의 의지에 대항할 정치세력, 즉 정당의 역할이 실종되는 것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최소한의 정부 견제 역할도 포기한 채 완전히 ‘대통령 시다바리’로 행사했고 새정치민주연합으로 대표되는 야당은 ‘대통령 안티’에 머무른다는 편견을 벗어나지 못했다. ‘안철수 신당’에 대한 기대가 야권 일각에 있었으나 3월의 합당 선언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이 탄생했고 제 진보정당 진영은 2013년에 터진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판결이 나오고 정당 해산심판이 진행되어 해산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에게 점점 더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2014년 2월 25일 JTBC <뉴스9>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 1년을 평가한다> 토론회의 새누리당 의원들의 발언을 보면 새누리당이 대통령을 옹호하는 수준을 볼 수 있다. 이날 방송에서 새누리당 홍문종 사무총장은 박근혜 정부의 점수를 “7~80점”이라 평했고 김재원 전략기획본부장은 “비행기로 치면 이륙하기 직전”이라 말했다. 공약이행률에 대해서도 홍문종 사무총장은 “야당이 발목을 잡아서 문제일 뿐 1년 만에 공약이 40% 달성되는 초유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하자는 대로 의회가 다 했다면 정부 평가를 100점 줬을 기세였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시다바리’들의 행진은 이때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셈이다. 여당은 처음에는 그 시다바리짓이 달콤했을지 모르나 이제는 자신들도 숨을 쉬기 힘든 분위기에 질색하면서도 출구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월호 특별법 합의 문제에 있어 새정치민주연합의 양보만 촉구하다가 막상 두 차례 합의안이 유족들의 집단인 세월호 참사 가족대책위에 거부당한 새정치민주연합이 나가 떨어지자 그들을 만나서 설득하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여당의 모습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야당은 어땠던가. 그들은 ‘과격함’을 추구할 때는 ‘대통령 욕’이나 하기에 바빴고 ‘온건함’을 추구할 때는 모든 이슈에서 타협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대통령에게 ‘박정희 딸’이라고 욕하는 걸 급진성으로 착각하는 해괴한 정치세력이 됐다. 더 이상 한국 사회에 새누리당 지지층과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층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새누리당 지지층과 반새누리당 지지층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타개할 정체성 수립에 나선 정치인은 희귀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안철수 세력’과 힘을 합친 후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 체제가 재보궐선거 패배로 무너진 이후 박영선 비대위는 세월호 특별법 합의로 무너지고 문희상 비대위는 대한항공 처남 인사청탁으로 무너져야 할 거 같은데도 전당대회 준비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 한심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야말로 ‘시다바리’와 ‘안티’의 대결로 집약할 수 있는 한해였다. ‘시다바리’들이야 대통령 힘이 빠지는 시기나 기다리고 있겠지만, ‘안티’들의 현황은 더 처참하다. 세계관의 혁신이나 정치전략의 변경은 검토하지 않고 그들이 ‘친노’라서 문제라는 정신승리나 ‘반노’ 그룹에서 횡행하는 형편이다. 그런 연유로 만들겠다는 새로운 정당에 이석기 이후 맥을 못 추는 진보정당 구성원들조차 현혹되는 기도 안 차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헌법 8조에 등장하는 정당민주주의에 대한 규정을 차라리 삭제하고 싶은 지경이다. 그게 있다고 헌법재판소가 사려 깊은 판결을 해주지도 않는 다음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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