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자신이 지금 십대를 보내고 있거나 이십대 초반이었다면 장래에 글을 쓰며 살고 싶어 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그리고 아마도 그렇지 않을 거란 대답을 내놓는다. 적어도 ‘비소설 산문’을 쓰고 싶어 하진 않았으리라.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사회는 ‘말의 힘’이 사회변혁에 도움이 되리라는 믿음이 가능했던 곳이었다. 지금은 충분치 않더라도, 시간이 나아질수록 더더욱 그렇게 되리라는 믿음이 가능했던 곳이었다. 물론 현재도 그러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있을 것이며, 그들의 견해에 반대하거나 그것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지금도 그러한 믿음을 간직하려면 그때보다 더한 낙관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낙관’ 쪽에 서거나 ‘비관’ 쪽에 서는 것이 개개인의 선택이라면, 아마도 자신은 그러한 환경에선 ‘비관’ 쪽에 섰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한때 누군가들에겐 ‘공론장’이 될 거라 여겨졌던 우리의 인터넷 소통이 어떤 식으로 ‘오염’되었는지를 본다면 놀라울 정도다. 한편은 검찰이 국정원 수사를 시작했을 때 특정 패턴의 댓글이 ‘사라졌다’고 증언하며, 다른 한편은 북한의 인터넷이 멈췄을 때 특정 패턴의 댓글이 ‘사라졌다’고 증언한다. 사실 여부를 가릴 방법은 없지만, 그러한 의혹 제기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편으론 차라리 우리의 인터넷이 ‘북한’과 ‘국정원’의 사이버심리전의 현장이라 믿고 싶을 만큼 참혹할 때가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들 그대로가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한다면 그거야말로 더욱 비관적이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렇지만 현 시대를 살아가는 소설가들이 부럽느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는 않다. 비록 한때 소설가를 지망한 적이 있었고 그것이 좌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찬찬히 돌아봐도 이것은 단지 박탈감에서만 나온 감정은 아닌 것 같다. 소설가도 근본적으로는 ‘이야기꾼’이다. 그리고 현실이 이미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사회에서, ’이야기꾼‘은 그것에 대해 말을 덧붙이려는 욕망을 억제하기 힘들다. 그래서 이왕 떠들어야 한다면, 좀 더 그럴듯하고 심층적인 얘기를 떠들 수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것은 ‘정치’가 불가능한 듯 보이나 외려 그렇기에 회피할 수 없는 시대에 ‘이야기꾼’ 기질을 가진 이가 지닌 어떤 딜레마다.

▲ 성탄절인 25일 오후 서울 명동 거리가 나들이 나온 인파로 붐비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34개월간 ‘기자’로서 글을 썼다. 그전엔 더 오랜 시간을 ‘자유기고가’ 내지는 ‘칼럼니스트’로 글을 썼다. 학문의 영역에 속하지 않거나 직능 전공이 없다면 ‘자유기고가’의 글쓰기와 ‘기자’의 글쓰기는 비슷한 측면도 있다.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다뤄야 하기 때문에 여기저기 물어 가면서 써야 한다. 그런 글쓰기에 ‘깊이'를 갖추려면 다양한 맥락을 교차검증하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는 집요함이 필요하다.

물론 자유기고가 때도 여기저기 묻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는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를 글 속에 표시하기는 조심스러웠다. 뒷 얘기는 모른 척하고 추론으로 알게 된 것처럼 지나가는 것이 공정하다 여겼다. 들은 얘기는 맥락적 차원에서 고려될 뿐이었다. 그 시절엔 그렇게 썼는데도 “어디 물어보지도 않고 소설을 쓴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한편 기자가 되니 다른 이의 발언을 빌리지 않고는 견해를 밝히는 것이 금기시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매체비평지에서 신문비평이나 정치비평을 쓰는 처지는 일반적인 기자들보다는 훨씬 자유기고가에 가까운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기자적 글쓰기’에 대한 압박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유기고가 시절 기자들이 전화를 걸어 코멘트를 요구한 건 본인의 잘남과 큰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특정한 결을 필요로 할 땐 다만 몇 명만 전화를 받지 않아도 코멘트할 사람이 없어 본인의 코멘트를 받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아마도 다른 기자들도 그런 심정으로 내게 전화를 걸었으리라.

또한 기자들 역시 자신들의 뚜렷한 주관을 가진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자의 글쓰기'에 파묻혀 살다 보니 그 주관을 표시할 기회를 잃는다. 칼럼니스트들은 자신의 견해를 마음대로 표출할 수 있는 한국 사회의 몇 안 되는 직업군에 속하기 때문에, 자신의 주관이 굉장히 독창적이며 시대를 앞서간다는 착각에 쉽게 빠진다. 하지만 비록 옥석을 가려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런 종류의 통찰은 생활인의 술자리에서도, 기자들의 발화에서도 있는 것이었다.

▲ KB금융의 전산·통신 납품비리 의혹과 관련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된 임영록 전 KB금융지주 회장이 24일 새벽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마친 뒤 검찰 청사를 나오며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지만 그 기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지면에 표현하기 어렵고 사실전달을 하거나 다른 이의 발언에 숨어야만 했다. 그런 상황은 매체비평지 기사를 ‘독창적으로 보이게' 쓰도록 하는 데엔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에게 좀더 다양한 형식의 글쓰기가 가능한 여유나 매체환경이 주어진다면 더 많은 양질의 정보가 유통되지 않을까란 아쉬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흔히들 한국 정치가 지나치게 당파적이라서 문제라고 한다. 생활인들이 이런 말을 할 때는 주로 여권과 야권의 극한 갈등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서 관찰한 한국 정치는 야권 내부의 당파적 행태가 더욱 문제였다. 이해당사자들이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서사'를 쓰고 거기에 맞춰 내부정보를 회람하고 전문가의 견해도 동원하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는 ‘서사' 중 특정한 하나에 몸을 던져도 논리적으로 매끄러운 글을 쓰기에 무리가 없다. 그런 각각의 주장들은 내적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나 각각 현실의 일면만을 대변하기에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이 경우 그들은 서로에게 “정치를 몰라서 그런다", “속사정을 몰라서 그런다"는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문지식으로 검증할 수 없는 맥락적 글쓰기의 ‘질'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지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결국엔 각자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현실성을 판단하게 하지만 대부분의 생활인이 이미 당파적으로 어느 편을 들고 있다면 그 판정은 ‘팬심'을 벗어나기 어렵다. 기사를 쓰면서 서로를 욕하는 그 당파들이 특정한 기사가 서로 상대 당파를 편들고 있다고 공격하는 우스운 꼴을 많이 당했다. 그렇지만 시간을 두고 꾸준히 쓰면 그런 평가를 내리는 이들도 특정한 상황에선 그런 기사를 인용하기도 한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한국 정치의 큰 문제 중 하나는 평범한 생활인들조차 모두가 ‘전략가'인 양 처신한다는 것이다. 어떤 진보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제대로 된 ‘정치적 주체'가 없다고 혀나 끌끌 차고 말겠지만 이 역시 어쩌면 환경의 산물이다. 한국 사회에선 개인이 어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신념을 가진 이들이 늘어날 경우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는지까지 설명해야 한다. 심지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소수자적 입장에 선 이들 중 하나일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평화주의자들조차도 “나는 평화주의자의 신념을 가지고 있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화주의자가 (가령) 정치적 유권자의 1할을 차지하는 사회는 우리 사회와 많이 다르다"며 사람들을 설득해야만 한다.

역설적으로 이토록 당파적인 상황에서 모두가 전략가인 양 처신하기 때문에 야권에겐 어떠한 전략도 가능하지 않다. 원칙의 문제라면 토론이 가능하지만, 각 이해당사자가 전략을 자기정당화의 근거로 삼는다면 논의는 쳇바퀴를 돌게 된다. 상대방이 멍청하다는 공박이나 소수자라는 빈정이 설득을 대신하게 된다. 결과가 나쁘게 나오면 상대 당파의 책임을 묻는 ‘전략적 분석'이 난무하게 된다.

정치판과 운동판에서 흔히 쓰는 말로 ‘선수'라는 말이 있다. 활동하는 사람, 혹은 활동의 영역의 판세를 잘 읽는 이들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선수'인지는 누가 정할까. 자칭 ‘선수'들은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누가 ‘선수'인지에 대한 합의 자체가 이미 당파적이다. 여기선 ‘대단한 선수'인 사람이 저기선 ‘저능아'다. 물론 결국에는 모든 것이 그렇듯 시간이 검증하는 측면이 있으나, ‘선수'가 ‘선수'를 증명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은 결국엔 또 한 번 모든 논의를 피로하게 만든다.

이 아수라장을 조금 더 가까이서 지켜본 경험은 물론 소중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영역에서나 ‘선수'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자칭 선수'들이 상대방이 선수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일이 빈번한 이 세계에서 그런 종류의 평가가 실제의 정치현상을 이해하는데에 도대체 어떤 도움을 주는지에 대한 질문은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는 ‘선수'들의 시선이 아닌 좀 더 거시적인 문맥에서 이 아수라장을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변혁의 가능성이 잘 보이지 않는 시대라도, 그렇기에 그 가능성을 늘리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간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작성된 부족한 글로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그보다 과한 미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 부분은 생략하기로 하자). 이 글은 연말특집을 제외하면 <미디어스>에서의 34개월 기자 생활을 통해 작성된 마지막 글이 될 예정이다. 글을 쓰는 일이 세상사에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을까란 의문은 ‘자유기고가' 때에도 ‘기자'일 때에도 늘상 가진 것이었다. 본인의 역할에 대해 큰 환상이나 기대를 품고 있지는 않지만, 이곳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도 이 세계와 사회를 드러내는 진솔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 기자 생활을 마쳐도 글쓰기는 계속될 것이고, 이왕 이렇게 살게 된 바에야 무언가 사회에 기여를 하는 글을 써야겠다는 불가능한 욕망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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