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과 소속 의원들의 의원직 상실을 결정했다. 반응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민주주의가 유린당했다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종북세력을 처단해서 속이 시원하다는 반응도 나온다. 그러나 정치의 세계는 비정하다. 통쾌함과 안타까움을 떠나서 이 결정으로 인한 정치적 득실 또한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대의제 정치는 바로 이러한 동력을 통해 굴러가도록 돼있기 때문이다.

▲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19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청구 선고에서 판결 주문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흔들리던 '영남'과 '50대' 분위기 반전 전환점 잡은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일단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으로서는 이번 판결로 긍정적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됐다. 그간 정윤회-박지만 권력암투설과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으로 핵심 지지층을 뿌리까지 흔들리는 어려움 겪던 상황에서 이를 반전시킬 수 있는 전환점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체제를 훼손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대국민담화를 발표하였는데 이 역시 이러한 맥락을 충분히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간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으로 인한 위기의 핵심은 영남과 50대로 요약되는 보수적 지지층까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박근혜 정권 국정지지율이 40%대가 무너지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중간층이나 상대적으로 충성심이 덜한 지지층이 이반하는 경우는 다른 정책적 수단을 통해 만회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언제나 ‘기본’을 든든하게 떠받쳐줘야 할 핵심지지층이 흔들리는 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소위 ‘정윤회 문건’ 논란에서 보수언론이 그들답지 않게 정권에 비판적인 스탠스를 잡았던 것은 이 핵심 지지층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정권 재창출까지 위협당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 정홍원 국무총리가 19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심판 헌법재판소 결정 관련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헌법재판소 결정은 이념적으로 보수적이고 반공의식이 강한 영남 및 50대에게 상당한 안도감을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상당기간 이른바 ‘공안정국’이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정윤회 문건’ 사건에 대해 수사가 마무리 되는 과정에서 헌법재판소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에 대한 검찰의 고뇌도 상당 부분은 해소될 수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 결정으로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졌을 때 청와대의 어려운 요구에 맞춘 수사 결과를 만들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연대'는 불가능해지고, '선 긋기'는 애매해진 새정치 민주연합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경우에는 좀 애매한 입장이다. 굳이 이득을 말하자면 새정치민주연합은 앞으로 지방선거나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이 요구했을 ‘선거연대’ 등의 문제에 대해 자유로워졌다. 2012년 전면적인 야권연대를 할 당시에는 통합진보당이 여러 정파가 모인 당으로 인식됐으므로 ‘종북몰이’에 대처할 수 있는 근거라도 있었는데 이석기 사건 이후 이러한 근거가 없어져 또다시 야권연대를 추진할 경우 ‘종북’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묶여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해산됐으므로 더 이상 당대 당의 형식으로 선거연합을 모색해야 하는 곤궁함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새정치민주연합 입장에서는 약간의 다행스러움이라고 할 만 하다.

▲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비대위원장(왼쪽)과 우윤근 원내대표가 19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문제는 앞으로의 공안정국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역시 자유롭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새누리당의 입장에서는 이번 결정으로 인한 최대한의 정치적 효과를 누리기 위해 어떻게든 통합진보당 문제와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제를 엮어야 한다. 최근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이 김정일 3주기를 맞아 개성에서 조화를 전달한 것 등에 대해 새누리당이 과도한 비판을 내놓은 것도 이러한 문제를 고려한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2012년 통합진보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선거연합을 했다는 사실 역시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새누리당은 당시의 통합진보당이 정파연합적 성격이 있었던 당이라 할지라도 새정치민주연합이 이번에 의원직을 상실한 의원들의 당선에 일조했다는 점을 꾸준히 언급할 것이다.

이런 정국이 이어지면 새정치민주연합이 정당 해산 반대 촛불집회 등을 통합진보당 세력과 함께 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주장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정치공학적 손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로서는 ‘중도’를 반복 호출하며 일정한 ‘우클릭’을 감행해야 하는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럴 경우 당 내에서 일부 초선의원들의 반발을 겪게 되거나 심각한 계파 갈등에 휘말릴 우려도 있다.

'진보=종북' 상황의 공멸적 타격 입은 '진보정당', 주요 사회 이슈 '공안 몰이' 대상 될수도

진보정당들의 경우 이번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상당한 위기를 맞게 됐다. 위에 언급한 공안정국 자체가 진보정당들에겐 위협이다. 정의당과 노동당, 녹색당 등의 정당의 경우 그동안 통합진보당의 북한에 대한 태도 등에 상당한 거리를 둬왔음에도 불구하고 통합진보당 해산으로 인한 공안정국에서의 피해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이들이 주요하게 여기는 간접고용이나 해고 등 노동문제나 송전탑 문제와 같은 사회적 이슈들 역시 공안정국의 주요한 통제대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에 대해 해산을 명령한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운니동 재동로터리에서 열린 집회에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가 굳은 표정으로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반 유권자의 수준에서 ‘진보’라는 이름 자체가 ‘종북’과 동의어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도 문제다.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등은 각기 주장하는 바가 다르고 지향하는 가치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진보정당’이라는 분류로 묶여 언급돼왔다. 특히 정의당과 노동당은 통합진보당의 주요 세력과 같은 정당 활동을 한 바도 있다. 따라서 이들이 점하는 ‘진보’라는 브랜드 자체가 통합진보당 세력과 엮여 사고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점은 장기적으로 진보정당들에 ‘질곡’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진보정당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향후 통합진보당 세력과 일정 정도는 행보를 같이 해야 한다는 점도 정치공학적으로는 손해의 요인일 수 있다. 비록 헌법재판소가 강령과 주체의 문제를 엮어서 판단하기는 하였으나 어쨌든 문제가 된 통합진보당의 강령은 진보정당임을 감안할 때 그리 강경한 내용을 시사하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즉, 진보정당들로서는 어쨌든 통합진보당의 강령이 문제라면 나머지 정당들이 갖고 있는 강령도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진보정당들의 입장에서는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통합진보당의 해산 결정에 대항하는 하나의 흐름 속에서 행보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물론 정당이 항상 정치공학적 이득을 쫓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대의제 정치에 몸을 담고 있다면 이러한 부분을 따져볼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진보정당들로서는 앞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통합진보당의 해산 결정을 비판하면서도 노선과 당의 형식에 있어서 일정한 변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이 진보정당의 고질적 문제를 벗어나자는 ‘진보의 재구성’과 같은 문제의식으로 귀결된다면 장기적으로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이할 수 있겠지만 이념적 우회를 선택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진보정당 운동은 상당한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행히 현재 상황에서 진보정당들이 후자와 같은 선택을 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그와는 별도로 상당기간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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