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꿔,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어느 해 국회의원 총선 때 각광을 받던, 그래서 선거방송차량들이 저마다 동네 방방곡곡을 누비며 틀어댔던 가수 이정현의 노래. 그 노랫말대로 이명박 정권은 들어서자 마자 ‘모든 걸 다~’ 바꾸려고 해왔다. 새 정부의 ‘물갈이’는 특히 미디어 진영에서 두드러졌다. 이 바닥은 작금 격렬하게 뒤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미디어스>의 창간 기념 설문조사 ‘방통융합 시대를 이끌어갈 영향력 인물 30’ 중 다수의 얼굴들은 해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자 사라졌다. 당시 설문조사에서 1위로 뽑힌 정연주 KBS 사장도 임기를 다 못 채운 채로 ‘사라진 얼굴’에 이름을 올렸다. (▷ 관련기사 : [창간특집] ‘방통융합시대 영향력 인물 30’ 1위 KBS 정연주 사장)

▲ 이병순 KBS 사장 ⓒ여의도통신
얼굴이 바뀌면 더불어 바뀌는 건 무엇일까? ‘검찰-감사원-KBS이사회-대통령’ 등의 수순을 거쳐 임명된 KBS 신임 사장 이병순씨는 KBS에 어떤 변화를 몰고 왔을까. 일단은 새 사장 선임을 위한 KBS 이사회를 저지하려는 사원들을 진압하러 온 영등포서의 ‘경찰’들. 그리고 취임식 당일, 이병순 사장 취임에 저항하는 사원들을 뚫으려 대거 동원된 청원 ‘경찰’들. 이렇게 KBS 새 사장 임명은 언론사에 있어 유례없이 잦은 경찰 출동으로 시작됐다.

지난 13일 국감장에서 이철성 영등포경찰서장이 “경찰 업무 집행을 위해 필요하다면 이사회 요청이 없어도 경찰을 투입할 수 있다”고 밝힌 것은, 법리논쟁을 떠나 언론사 KBS의 위상 변화를 강하게 시사한다. 과거 독재정권의 폭압에 짓눌려 있던 시절에도 언론사 내부는 기관원이 상주할지언정 무더기로 공권력이 투입돼 물리력을 행사하는 사례가 좀체 드물었던 데 비해, 이제 국가기간방송 KBS는 경찰서장 수준에서 대놓고 관할권을 선포하는 대상이 되었다.

KBS의 또 다른 변화는 일련의 ‘대통령 방송’을 통해 표면화되고 있다. 이 사장 취임 이후 열린 ‘대통령과의 대화’ 방영에서 외압 논란을 아슬아슬 비껴간 KBS는 결국 지난 13일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를 방송사 중 유일하게 방영했다. KBS 내부 구성원들은 대체로 이를 ‘굴욕’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KBS PD협회와 기자협회가 “KBS는 청와대의 입이 아니다”며 “방송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내팽개치고 KBS를 관영방송으로 전락시켰다”는 맹비난 성명을 내놓으며 라디오본부장의 공식사과를 요구하고 나섰지만, 행간에는 ‘자괴감’이 읽힌다.

KBS 내부에서는 벌써부터 “제작국 내부에 ‘자기 검열’의 기운이 나타나고 있다”는 우려가 흘러 나온다. <시사 투나잇> 등 정권 비판적 프로그램 폐지가 점쳐지고 있는 가을개편을 앞두고 시사교양국 모 간부가 회의에서 뜬금없이 “이제는 공정성과 팩트를 제대로 챙겨야 한다”는 발언을 해 반발을 사는가 하면, 보도국에서는 “윗선의 아이템 선정과 데스킹 시간이 배로 늘어났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간부들 중심으로 ‘눈치보기’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간부들의 속내를 어찌 알까마는, 권혁부 KBS 이사가 정연주 전 KBS 사장을 상대로 ‘정권 친화적인 보도’를 노골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는 지난 3월 이사회 회의록을 보면, 대략 짐작이 간다. 권 이사는 “KBS는 허니문이 없는가”라며 “<뉴스9>를 보면서 걱정되는 부분들이 (눈에) 띈다”고 따졌다. 공영방송 이사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싶지만, KBS 출신인 권 이사가 KBS에 대놓고 저널리즘에 대한 자기부정을 요구하는 것이 이명박 정권 아래서 공영방송 일각의 적나라한 모습이라는 걸 새삼 일깨우는 촌극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요즘 KBS 직원들을 만나면 “우리가 청와대 북인가”, “경찰도 들락거리겠다며 조롱하고 있다”, “관제 사장이라 경찰서장한테 한마디도 못하는 것 아니냐”는 한숨 가득한 푸념을 늘어놓는다.

▲ 엄기영 MBC 사장
그렇다면 같은 여의도에 자리한 MBC의 경우는 어떨까. 지난 3월 취임한 엄기영 사장은 4월말 이른바 ‘<PD수첩> 광우병 보도’ 사태를 맞는다. 언론보도 오역 논란에 이례적으로 검찰이 뛰어들면서 ‘PD수첩을 지키자’는 촛불 시민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엄 사장은 사원들의 격렬한 저항을 뚫고 지난 8월12일 밤 전격 사과방송을 내보냈다. 형식상 시청자 앞에 머리 숙였지만,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사과 결정을 수용함으로써 현실 권력에 석고대죄하는 모양새가 됐다.

엄 사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PD수첩> CP와 진행자 교체, 총책임자인 시사교양국장 교체 등 ‘제작진 물갈이’를 이어갔다. 삭탈관직과 귀양 보내기의 조선시대 ‘사화’까지 재현한 것이다. 그러나 MBC 내부는 “사과방송은 PD수첩 정당성을 훼손한다”면서 “정권 눈치보기 하는 것이냐”고 반발했고, ‘집단 연가 투쟁, <PD수첩> CP·진행자 보직 사퇴, 일부 PD들의 보직 줄사퇴, 후임 시사교양국장 사퇴, 부사장 퇴진 요구’ 등 강한 저항으로 맞서고 있다.

하지만 격렬한 제작국 분위기와 달리, 일각에서는 MBC 프로그램의 ‘정체성 우려’가 등장하고 있다. <경향신문> 문주영 기자는 14일자 ‘문화수첩’에서 최근 정통다큐 프로그램 <MBC 스페셜>이 가수 비와 배우 이영애 관련 방송을 내보낸 것에 대해 “‘인간과 환경, 사회에 대한 깊이있는 해석을 하고자 한다’는 기획의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며 “스타들의 홍보방송이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려워 보인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러한 흐름이 PD수첩 제작진 물갈이, KBS 사장 교체, YTN사장 낙하산 인사 등 일련의 상황과 연관있는 게 아니냐는 걱정을 덧붙이기도 했다.

문 기자의 걱정이 ‘괜한 걱정’이 되길 바라면서, 여기서 주목할 점은 MBC와 KBS의 차이다. 두 공영방송의 차이는‘외부 공권력에 대처하는 자세’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언론의 권력에 대한 독립성과 자유는, 국민의 알권리 보장과 공정 보도에 직결되므로 지켜야 마땅하다’는 ‘언론학 개론’ 수준의 내용을 굳이 들이대지 않더라도, 모름지기 경찰이나 검찰, 혹은 추억의 안기부 등 공권력의 언론사 투입의 역사들은 ‘기자들의 목숨 건 투쟁’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래서인지 현재 MBC 경영진이 <PD수첩>의 광우병 보도에 대한 법원의 정정·반론보도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하거나, 노조 등이 <PD수첩> 제작진들의 검찰 강제구인을 맹렬히 막고 있는 상황은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인다.

반면 KBS에서는 지난 8월8일 경찰들의 진압사태와 13일 국감장에서 나온 영등포경찰서장의 ‘언제라도 알아서 판단하여 들어가겠다’는 무지막지한 발언에도 경영진이나 노조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KBS의 6000여명 직원들 중 700여명이 속해있는 ‘사원행동’ 등을 제외하고는 잠잠한 상황이다.

MBC와 KBS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가 비록 미세(?)할지라도, 두 방송사의 앞날은 크게 다를지도 모른다. 두 방송사의 차이가 외부 억압 강도의 차이보다는 경영진과 대중조직(노조)라는 내부의 차이에 더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관제 우듬치와 관변 뿌리로 된 나무는 여린 풀잎보다 취약한 법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두 공영방송의 위상이 휘청거리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 사이 미디어판의 절대강자로 떠오른 곳은 다름 아닌 방송통신위원회다. 공영방송의 위상 저하와 방통위의 급부상이 맞물려 있다는 것은 언론사와 정부기구의 상대적인 역학관계를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여의도통신
방송위와 정통부가 통합된 방통위는 출범 전부터 ‘대형 기관’이 될 것으로 예측됐다. 하지만 ‘합의제 독립기구’라는 설립취지가 무색하게도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인 최시중씨가 방통위의 수장을 맡게 되면서 방통위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울트라 슈퍼 파워’가 됐다. 조직의 힘과 위상이 현실권력과의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한국 미디어 판의 봉건적 취약성을 드러낸 셈이다.

최시중 위원장은 취임 이후 새 정부의 트랜드인 ‘비즈니스 프랜들리’에 맞춰 영어 FM 추진, 대기업의 방송진출 폭 확대 등을 잇달아 몰아붙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 영역보다 훨씬 두드러진 것은 최 위원장의 막강한 ‘정치력’이다. 그는 이른바 ‘KBS 대책회의’ 등 청와대 및 정치권 등과 자리하는 각종 ‘밥 약속’을 만들어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 자리들은 박래부 언론재단 이사장 강제 퇴진, KBS 사장 인선, YTN 구본홍 사장 선임 등 각종 언론계 현안을 ‘정리’하는, ‘방통위원장 권한 밖 사안’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급작스런 위상 강화에도 불구하고 방통위 내부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새어나온다. 방통위의 한 관계자는 “방송장악 논란 때문에 방송정책을 시작도 못하고 있다는 자조섞인 평가도 나온다”고 귀띔했다. KBS에서 보듯 ‘바지’ 관제 기관장은 조직 전체를 취약하게 만들지만, 권력을 배후에 둔 막강 기관장의 힘은 조직 전체로 스미지 못하고 기관장 개인에게만 수렴되는지도 모른다.

▲ 박명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
미디어 판의 역학관계가 복잡하고 작용기전이 다중적이면서, 틈새를 비집고 ‘벼락부자’가 되는 곳도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타고 뜻하지 않게 떠오른 기관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옛 방송위의 방송프로그램 내용심의 기능과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기능을 통합한 ‘작은 조직’으로 출발했다. 심의 기능만 맡고 제재를 내릴 처분 기능도 없어서 애매한 위상이라는 지적도 있어왔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전혀 딴판이었다. 방통심의위는 ‘PD수첩 광우병 보도’와 ‘조중동 불매운동 게시물’ 등의 사안에서 ‘작은 고추’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MBC의 사과방송과 사이버 공안선풍을 이끌어냈다.

존재감이 미미했던 KBS 이사회가 정연주 사장을 강제퇴임 시키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며 위상을 끌어올렸지만, 그 힘은 어디까지나 KBS 내부에 그친다. 그러나 민간기구의 외피를 쓴 방통심의위의 힘은 모든 방송사는 물론 누리꾼, 시청자, 사실상 모든 국민에게 미치며 한국사회 전체를 원형감옥(파놉티콘)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다.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임명한 6명의 위원은 문화산업의 콘텐츠를 재단하는 문화 권력이자, 사법부의 권능조차 넘어서는 행정·사법 권력이며, 전 국민에게 사과받기를 강요해 마침내 국민의 사과를 받아내려는 이데올로기 권력이기도 하다.

정권 교체와 함께 찾아온 몇몇 인물 교체와, 이에 따른 미디어 판의 부침은 ‘언론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언론학 교과서’의 개념이 현실 속에서는 깨지기 쉬운 유리 그릇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희망 찾기는 교과서 속에 숨어 있는 ‘피로 쓴 언론자유와 독립 투쟁사’ 페이지를 찾아내 다시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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