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질 정도로 <미생>은 매력적입니다. 직장인이 아니어도 충분히 공감할 수밖에 없는 밀도 높은 이야기의 힘은 한국 드라마의 미래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고등학교 검정고시가 전부인 장그래가 대기업 상사맨이 되어 벌이는 일들을 담고 있는 이 드라마의 힘은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이야기의 힘입니다.

항상 취해 있어야만 한다;
신입사원 장그래에게 더 할 나위 없는 날개를 달아준 오 차장

"장그래, 더 할 나위 없었다. YES!" 크리스마스카드에 적은 오 차장의 이 글귀는 단순히 극중 장그래에게만 전해주는 격려는 아니었습니다. 세상 모든 장그래에게 던지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직장 상사 오 차장이 던지는 따뜻한 위로이기도 했습니다.

요르단 중고차 수출건과 관련된 PT는 영업 3팀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였습니다. 회사의 전통을 어기며 진행하는 사업이라는 점에서 수많은 비난을 감수해야 했고, 이런 상황에서 모두를 감동시키고 이 사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평범한 PT로는 공격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장그래의 제안은 도박과도 같은 의미로 영업 3팀을 흔들었습니다. 평범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극단적일 수 있는 파격을 선택한 오 차장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단순히 장그래를 두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는 직급을 떠나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들을 얻어내 밀고 나가는 대단한 추진력을 가진 이상적인 상사였습니다.

위기에서 좌절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질 줄 아는 인물. 이제 막 입사한 신입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무슨 고민을 하는지 들여다보려 노력하는 따뜻함과 통찰력은 우리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이며 함께하고 싶은 상사의 모습이었습니다.

바둑을 통해 익힌, 전체의 판을 보는 능력이 뛰어난 장그래도 대단하지만 <미생>에서 진정 위대한 존재는 오 차장이었습니다. 굳이 직장 생활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상하관계의 경직성을 경험해본 이들이 많을 듯합니다. 그 지독한 한계는 결과적으로 비효율성을 낳고 인간에 대한 증오까지 만들기도 합니다.

조직을 이끄는 장이 누구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는 극명함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고, 그 관계의 끈끈함이 곧 삶이라는 점에서 제대로 된 상사를 만나는 것은 최고의 행운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지 않고 그런 잘못을 되새김하며 다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오 차장은 그래서 특별합니다. 오직 성공을 위해 몸부림치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는 모든 것을 던지는 저돌적인 오 차장은 인간적으로 뛰어난 인물입니다.

가정적인 남편과 아빠가 되고 싶기는 하지만, 업무에 시달리는 오 차장에게 그런 모든 것은 사치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힘겨움 속에서도 아이들의 친구가 되고, 부인에게는 든든한 남편이 되려는 오 차장의 노력은 모든 남성들이 꿈꾸는 이상이기도 합니다.

회사에서는 자신의 팀원들을 챙기고,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으며 스스로 그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는 사려 깊은 오 차장은 위대해 보일 정도입니다. 현실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은 장그래가 아니라 바로 오 차장인 이유가 거기서 드러납니다.

리틀 오 차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은 장백기의 사수인 강 대리입니다. 자신의 일에 철저한 그는 신입인 장백기에게 기본을 강조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기본에 충실하지 않으면 결코 제대로 된 직장인이 될 수 없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이 장백기에게 이직을 고민하게 했지만, 그는 강 대리를 통해 직장인이란 무엇인지를 조금씩 깨닫고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상율이 이야기했던 사우나 상황이 지독한 운명처럼 다가와 당황해 하는 모습도 흥미롭고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겨내는 장백기는 용기를 내서 강 대리에게 술 한잔을 권합니다.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강 대리는 다시 한 번 천금과 같은 조언을 해줍니다. 누군가의 성공에 비교하지 말고 현재의 자신에 충실하라 합니다. 각자 주어진 임무가 다르고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결과에만 집착하게 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는 강 대리는 미래의 오 차장이었습니다.

파격적인 PT로 사장 이후 모든 임원들을 사로잡은 오 차장은 완벽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그리고 과감하고 무모하게 사업을 제안한 장그래는 화제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회사니까요"라는 장그래의 답변은 오 차장에게 받은 감동이 장그래에게 얼마나 강하게 각인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습니다.

고졸 검정고시에 낙하산인 자신을 위해 다른 부서 과장과 싸워주던 오 과장. 그것도 모자라 "우리 애가..."라는 말로 자신에게 강한 소속감을 부여해준 오 과장은 장그래에게는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항상 혼자 바둑을 두며 살아왔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소속감을 느끼게 해준 "우리"라는 단어는 그렇게 가장 중요한 순간 다시 한 번 빛을 발했습니다.

인정을 받아가거나 여전히 자신과 그 자리에서 맞서 싸우는 신입들의 모습은 반갑고 흥미로웠습니다. 완벽한 모습만 보이던 장백기가 무너지는 모습을 통해 자신을 한 꺼풀 벗겨내는 과정도 미생들이 완생으로 향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안영이가 지적하듯 최고 학부의 장백기가 바닥에서 몸부림을 치는 장그래를 질투하지 말라는 조언 아닌 조언은 그에게는 중요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해지는 듯하던 장그래는 발걸음부터 달라졌습니다. 사장님 앞에서 PT까지 참여한 그는 같은 신입들과는 차원이 다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부서의 상사들 역시 장그래를 주목하고, 그가 회의에 참여하도록 요구할 정도로 장그래는 인기스타였습니다. 하지만 장그래가 인지하지 못한 것은 그의 현실이었습니다.

다른 신입 동료들과 달리, 장그래는 그저 2년 계약직일 뿐이었습니다. 정사원이 아닌 계약직은 소속감을 가질 수 없고, 그런 불안정한 현실은 고질적인 문제로 다가옵니다. 어차피 떠날 수밖에 없는 파리 목숨인 계약직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장그래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최근 정부는 정규직마저 쉽게 해고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들자고 요구할 정도입니다. 정규직으로 인해 회사가 힘들다는 이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모두를 비정규직으로 묶어 노예로 만들려는 한심한 작태가 실제 진행 중인 현실에서 <미생> 장그래의 계약직은 아프고 따갑게 다가옵니다.

계약직이라는 한계에 힘겨워하는 장그래를 본 오 차장은 특별한 선물을 그에게 줍니다. 매년 손수 쓴 감사 카드를 돌리는 오 차장은 그 첫 번째 카드를 장그래에게 건넵니다. 첫 번째 메리 크리스마스라며 건넨 카드에는 "장그래, 더 할 나위 없었다. YES!"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무색하게 한 이 한 문장의 격려는 장그래만이 아니라 시청자들마저 울컥하게 만들 정도였습니다.

어설프게 장그래에게 확신을 심어줄 수 없는 그 역시 하루살이 직장인인 상황에서, 오 차장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열심히 노력한 장그래를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입사원 중에서도 가장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장그래. 그는 좌충우돌하면서도 최고의 성취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는 넘어서기 어려운 비정규직이라는 한계가 가로막고 있었고, 그 현실을 잘 알고 있는 오 차장의 이 따뜻한 글 하나는 감동을 넘어서는 감격이었습니다.

이제는 취할 시간이라는 장그래의 독백은 시청하던 모두를 위한 이야기였습니다. 모든 일에 취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미생>은 그래서 반가우면서도 서럽게 다가왔습니다. 오 차장의 따뜻한 그래서 더욱 애틋함으로 다가오는 글귀와 취해야만 한다는 장그래의 발언 속에는 우리 각자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철없는 흥겨움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힘겨움으로 다가오는지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는 dramastory2.tistory.com를 운영하는 블로거입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재미없게 글을 쓰는 '자이미'라는 이름과는 달리 유쾌한 글쓰기를 통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하도록 노력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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