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꼬박꼬박 챙겨보는 드라마는 <미생>, <나쁜 녀석들>, <라이어게임> 세 편이다. 심지어 <미생>은 거의 하지 않던 본방사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라이어게임>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다. <라이어게임>은 2005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일본만화다. 2007년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었고 2009년에는 드라마 <라이어게임2>가 제작되었다. 올해 한국에서 드라마로 리메이크 되었다. 정확히는 일본만화의 판권을 산 것이라 일본드라마의 리메이크로 볼 수는 없다. tvN에서 방영되었고 12회로 끝났으나 시즌2가 나올 듯하다. 여기에서는 tvN에서 방영된 한국판 <라이어게임>만을 다룬다.

원래 이 드라마를 소재로 글을 쓸 생각이 없었다. 글을 써볼까 생각이 들었을 때도 아주 내키지는 않았다. 애초 내가 구상했던 글쓰기는 퓨전요리에 가깝다. 줄거리에는 수학 이야기가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수학적 관점에서 작품을 재해석하는 게 기본 컨셉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는 수학 이야기가 아주 많이 나온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수학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를 보며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이 너무 많아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어게임>은 매단계마다 게임을 통해 승패를 가르고, 사람들을 줄여나가며 최종우승자 1인을 뽑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다. 단계마다 진행되는 게임은 우연이 아니라 수학적 계산에 기초해 승패가 갈린다. 물론 어느 정도 운도 따라줘야 하는 고도의 심리게임이기도 하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은 여러 사건으로 얽히고설켜 있어 심리게임은 한층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운조차도 수학적 계산에 의해 확률이 올라가고 내려간다. 재밌는 것은 상대의 심리를 읽어내는 근거도 수학이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가 역으로 큰 장애가 되기도 한다. 시청률이 내 예상보다 낮게 나온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줄거리 자체는 아주 흡인력이 높은데 막상 게임에 들어가면 규칙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수학을 전공한 내가 이 정도니 보통 시청자가 한 번에 게임 규칙을 이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매게임마다 규칙을 자세히 설명해주지만 어려운 건 여전하다. 그래도 기꺼이 리플레이를 반복해가며 볼 생각이 있다면 꼭 보시라. 그걸 만회해줄 만큼 충분히 재밌다. 게임 규칙을 이해했을 때 순간의 깨달음이 주는 기쁨은 덤이다. 야바위보다는 한층 우아하다. 그리하여 ‘나에겐 필승법이 있어.’라고 한 번쯤 외쳐보게 되는 것이다.

수학으로 상대의 마음을 읽는다?

수학을 잘 하면 게임을 잘할까? 꼭 그런 건 아니다. 더러 확률을 높여줄 수는 있다. 고스톱을 많이 쳐 본 사람은 안다. 상대가 먹은 패, 바닥에 깔린 패를 잘 분석하면 확률적으로 승률을 높일 수는 있다. 그래도 운이 따라 주지 않으면 말짱 허사다. 그리고 인간이 하는 모든 게임은 심리전이기도 하다. 수학이 강심장을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그런데 수학이 상대의 심리를 읽는데 도움을 준다면 어떨까? 수학의 한 분야인 확률이론(probability theory)은 원래 게임에서 유래했다.

“주사위 게임에서 상금은 64만 원이다. 3번을 먼저 이기는 사람이 상금을 모두 가져가기로 했는데 2:1인 상황에서 더는 게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상금을 어떻게 나누어 가져야 하는가?”

파스칼(1623~1662)의 친구였던 메레가 던진 질문이다. 파스칼은 확률이란 용어를 아직 쓰지 않았지만 이 사례는 확률의 역사를 언급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한다. 확률이론은 비교적 늦게 발달한 수학이론이다. 도형을 연구하는 기하학(Geometry)과 수와 식을 연구하는 대수학(Algebra)은 문명시대와 함께 시작되었다. 함수와 그래프를 연구하는 해석학(Analysis)은 대략 17세기 정도 시작되었으며 확률계산과 자료분석을 주로 하는 통계학(Statistics)은 그 뒤를 이어 가장 늦게 시작되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수학이론 중에 ‘게임이론’이란 것이 있다. 특히 경제학에서 많이 활용되는 응용수학의 한 분야로 단일한 이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과 관련된 이론 체계 전반을 지칭하는 용어다.1 게임이론은 다양한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가를 수학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아주 간단한 예로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가 있다. (쉽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무한도전 392회를 보시라.) 이해하기 쉬우니 1분만 뇌를 사용해보자.

사건 용의자 두 명이 체포되어 서로 다른 취조실에 격리되어 있다. 당연히 둘은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이들에게 주어진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둘 중 하나가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자백한 사람은 즉시 풀어주고 나머지 한 명이 10년을 복역해야 한다.
2. 둘 모두 서로를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둘 모두 5년을 복역한다.
3. 둘 모두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둘 모두 6개월을 복역한다.

자 이제 상상훈련을 해보자. 당신이 체포된 사람 중 하나라고 해보자. 상대가 침묵하는 경우 당신은 자백을 하는 게 유리하다. 상대가 자백을 하는 경우에도 당신은 자백을 하는 게 유리하다. 결국 당신은 자백을 선택하게 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상대도 자백을 선택하게 된다. 둘 모두 침묵을 지키면 6개월을 복역하면 그만인데, 결론은 둘 모두 자백을 하고 5년을 복역하는 쪽으로 났다. 각자가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는데 결과는 서로 침묵하고 6개월을 복역하는 것보다 나쁜 쪽으로 기울었다.
여기에서 전제는 개별 행위자들이 항상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사고한다는 것이다. 개별 행위자들 사이에는 어떤 감정도 개입하지 않는다. 즉 신뢰든 불신이든 측정불가능한 요소는 배제한다. 이런 전제를 깔면 둘 사이 의사소통을 허용해도 결과는 똑같다. 뭔가 끔찍하지 않은가?

라이어게임 줄거리

<라이어게임>으로 돌아가보자. 남다정은 신뢰의 강자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일단 상대를 믿고 본다. 당연히 사기를 당하기도 제일 쉬운 캐릭터다. 아버지는 빚에 쫓겨 집을 나갔고 그 빚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넘어왔다. 다니던 학교를 중단하고 알바를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자조차 갚기 버거운 상황. 집에는 사채업자들이 들끓고 삶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잘 웃고 남을 잘 돕고 쉽게 믿는다. 아마 주위에 이런 친구가 있었다면 성질나고 짜증나서 보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다.

하우진은 천재다. 명문대 최연소 심리학과 교수였으나 어쩐 일인지 범죄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출소한다. 행동, 몸짓, 얼굴표정 등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고 거의 정확하게 읽어내 상대 심리를 파악한다. 이런 능력을 십분 발휘해 경찰을 돕기도 한다. 드라마는 ‘그 누구도 믿지 말라.’는 하우진의 대사로 시작한다. 또 매게임마다 내뱉는 ‘내겐 필승법이 있어.’라는 대사의 중독성이란.

강도형은 냉혈한이다. 좀처럼 자기감정을 들키는 법이 없으며 상대의 감정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영리한데 차갑다. 경제적 이해에 밝으며 거대한 게임을 기획하고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이다. 차가운 카리스마 뒤로 숨겨진 상처가 얼핏 얼핏 보이지만 어느 쪽이 진짜이고 어느 쪽이 가짜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연기하는 자신을 연기하고 가면을 쓴 자신을 다시 가면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라이어게임이라는 TV쇼는 이 셋을 포함한 40명으로 시작한다. 단계를 거칠 때마다 생존자는 줄어들고 상금 규모는 점점 올라간다. 최종 우승자에게는 100억이라는 엄청난 상금이 걸려있지만 중간에 탈락하면 거꾸로 지금까지 받은 상금을 내놓아야 한다. 중간에 그 상금을 쓰기라도 하면 빚더미에 앉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게임은 사람이 줄어들수록 더욱 고도의 심리전 양상을 띠게 되고 그저 게임으로 즐기기엔 살벌한 기운마저 감돈다. 게다가 이 게임의 참가자는 애초에 기획된 각본에 따라 선별되었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이 참가자들을 둘러싼 과거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긴장감이 상당하다. 그리고 라이어게임이라는 TV쇼는 점점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한 스릴러물이 되어간다.

당신은 게임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게임 참가자들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 여러 가지 거짓말을 동원한다.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안 된다. 게임 내에서 체결한 계약은 게임 내에서 유효하며 반드시 지켜야 한다. 때에 따라 돈을 동원하기도 하고 계약과 배신이 밥 먹듯 이루어진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가 하면 내 팀 안에 적의 내통자가 암약하기도 한다. 조금 머리가 아프기는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드라마 설명대로 한 번 따라해 보는 것도 재밌다. 그런 성의가 없다면 게임장면을 자주 건너뛰게 될지도 모른다. 고백하자면 나도 몇 번 건너뛰기를 눌렀다. 그래도 전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크게 지장은 없다.

개별 참가자들의 행동에는 기본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각자가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매게임에는 제법 간단치 않은 수학적 계산이 등장한다. 게임이론과 비슷한 상황도 자주 벌어진다. 참가자들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이라고 머리를 굴리지만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모든 인간이 수학적 계산에 따라 움직인다면 세상은 언제나 예측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게임판을 흔드는 가장 강력한 존재는 역설적으로 가장 게임을 못할 것 같은 남다정이다. 기본적인 게임이론의 전제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남다정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심지어 남다정은 중간 생존자들에게 모두 똑같은 선택을 하면 승패가 갈릴 일이 없으니 최종상금을 골고루 나눠갖자는 제안을 한다. 누가 보더라도 말도 안 되는 제안이다. 애초에 게임의 전제를 무시하는 발상이다. 그런데도 남다정의 제안은 묘한 울림을 갖는다. 게임 참가자들의 사연이 처절하면 처절할수록.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패배한 낙오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가자는 제안에 조금씩 흔들린다.

여기에서 하우진과 강도형의 복잡한 셈법이 개입한다. 하우진은 남의 말을 믿지 말라면서도 정작 자신은 절대적 믿음을 갈망하며 남다정을 돕고, 강도형은 사람들의 관계를 적절히 이간질하며 효과적으로 자신의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게임은 남다정을 사이에 두고 하우진과 강도형이라는 이질적인 천재들이 벌이는 처절한 사투의 양상이 되어간다. 결론은 생략하겠다. 당신이 예상한 그림을 그려보라.

라이어게임에서 우리는 선의를 믿어야 하는가? 아니라면 수학을 믿어야 하는가?

물론 판은 남다정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그렇게 세상이 간단한 것이라면 인간은 진즉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남다정의 선의는 당연히 배신당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남다정의 생각을 박살내는 건 단 한 명의 배신자면 충분하다. 잠깐 또 머리를 써보자.2

A, B 두 도시가 있다. 인구는 무한히 많다. 정보는 앞사람이 뒷사람에게 말해주는 방식으로 일자형으로 전달된다. 앞사람은 뒷사람에게 자기가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거나 반대로 전달하거나 둘 중 하나다. A도시 사람들은 매우 정직한 편이라 확률적으로 99%는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고, 1%만 반대로 전달한다. 반면 B도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거짓이 만연해서 확률적으로 60%가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고, 40%는 반대로 전달한다. 최초 전달자는 올바른 정보를 갖고 있다. 자 두 도시에서 어떤 정보가 무수히 많은 사람을 거쳐 전달된다고 하자. 단계를 거칠수록 전달되는 정보의 진위여부는 어떻게 될까?

수학적으로 두 도시에서 올바른 정보와 거짓 정보가 전달될 확률은 똑같이 1/2로 수렴해간다. 아 슬프다. 이론적으로 100명 가운데 단 한 명꼴로 거짓말을 해도 결국 수많은 단계를 거치면 원정보가 그대로 전달될 확률과 거짓이 전달될 확률은 반반이란 이야기다. 많은 사람을 거치고 나면 A도시나 B도시는 모두 절반의 거짓말로 채워진다. 온 세상에 고담시 천지다. 악플러들은 A도시의 선의를 비웃는다. 수학은 당신에게 디스토피아를 선물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의 선의를 믿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남다정의 선의는 단 한 명의 배신으로 쉽사리 망가진다. 단 한 명이라도 배신자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왜냐하면 단 한 명만 거짓을 말하더라도 내게 전달된 정보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게 전달된 진실이 거짓에 거짓을 더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는 것이다. 신뢰는 바닥부터 무너진다.

똑같은 수학적 사실을 두고 세상은 무슨 말을 하는가?

수학/과학법칙을 흔히 진리라고 부른다. 이것은 조건 없이 참이라는 말이다. 수학이론은 항상 매우 가치중립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그 동일한 결과를 써먹는 사람에 따라 결론은 완전 판이하다.

맬더스라는 유명한 고전경제학자가 있다. 맬더스는 『인구론』이란 책에서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이론을 전개한다. 쉽게 말해 식량은 100, 101, 102, 103, 104, ... 이렇게 일정한 양이 증가하는데 인구는 1, 2, 4, 8, 16, 32, ... 이렇게 일정한 비율로 증가한다는 의미다.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당장엔 식량이 훨씬 많아도 시간이 흐르면 인구가 식량을 추월한다. 맬더스는 이 이론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시간이 흐르면 인구에 비해 식량이 모자라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따라서 인간이 굶주리고 죽는 것은 사회나 경제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자연법칙이다. 따라서 죄책감을 느끼지 마라. 그렇게 자연스럽게 세상은 다시 균형을 잡아간다.

맬더스는 19세기 중반 영국 산업혁명 시기에 자본가 입장을 대변한 고전경제학자다. 1842년에 도입된 광산법은 10세 이하 아동노동을 법적으로 금지시켰다.3 이 말은 거꾸로 당시에 10세 이하의 아동노동이 횡행했다는 이야기다. 19세기 런던 노동계급의 평균수명은 20세를 넘지 못했다.4 맬더스는 이런 잔혹한 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수학을 끌어들인 것이다.

맬더스 인구이론은 19세기 영국에서 몇 십 년간 잘 들어맞다가 용도폐기 된다. 일단 출산율이 일정하다는 가정 자체가 맞지 않았고 식량증가나 인구증가 패턴도 예상과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견강부회식 이론은 엄청나게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슬프게도 이 이론들이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수학을 동원한다.
게임이론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된다. 어떤 사람은 개별적 인간의 합리적 행동만으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중재자의 역할로서 정부 역할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은 합리적 행동에 따라 산출되는 결과물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맬더스처럼 삐뚤어지면 그건 자연의 법칙이니 냅둬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개별행위자로서 국가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가면 환경을 해치고, 자원을 남획하며, 분쟁 지역에 무기를 판매하는 등의 행위도 모두 정당화될 수 있다.

남다정이 많아지면 세상은 좋아지는가? 선의는 언제나 선한 결과를 만드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이 조금 더 좋아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수학에는 도덕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수학을 사용하는 사람은 도덕을 개입시킨다. 특히 통계학과 경제학이란 학문에 두드러지는 특성이다. 사람에겐 어떤 의지가 먼저 있고 그 의지를 위해 지식을 동원하는 경우가 숱하다. 경제학은 진리가 아니다. 사람의 문제에 고정된 진리라 없다. 그러니 무조건 믿지 말라. 당신의 선의조차도. 다만 그 선의가 어떻게 선한 결과로 이어질지 부단히 고민해야 한다. 아아 이 한마디로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겐 필승법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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