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에 대한 찬반(?)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현실이다. 성소수자의 존재는 물론 찬반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이 굳이 찬반을 말하겠다는데 어쩔 수 없다. 그들을 어떻게 하면 잘 설득해서 보편적 인권에 대한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가 상식을 가진 시민들의 숙제다. 인권을 말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런 사명감을 모두 마음 속에 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성소수자들을 비하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들이 과연 인류에 대한 조건없는 사랑을 설파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말들을 내뱉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시가 추진하는 시민인권헌장과 관련해 성소수자 혐오세력이 공청회와 토론회 등 자리에 난입해 난리가 벌어졌다. 이들은 ‘박원순 OUT’, ‘동성애 옹호 반대’ 등의 그래도 다소 정상적인 수준의 구호부터 시작해서 며느리 운운하는 등의 수준 낮은 구호 등 다양한 슬로건을 내세웠다. 가장 많은 눈길을 끈 것은 십자가를 메고 온 한 중년 남성의 피켓에 적혀있던 구호였다.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비슷한 형태의 조롱이 시민인권헌장 공청회 과정에서 쏟아졌다.

앞서 ‘동성애 찬반 논란’이라는 현실적 부조리를 이미 언급했지만, 인터넷을 둘러보면 위의 ‘십자가 남성’과 같은 형태의 인식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사람들이 내놓는 상식도 없는 표현을 정제해서 말하자면 성소수자들이 성적으로 왜곡됐거나 문란하기 때문에 특정 형태의 성적 행위들에 집착하고 있다는 거다. 이 말이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주장 자체가 사실과 맞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이성에 따라 성소수자의 인권에 관한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이 부분에만 집착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이들이 이런 언행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의 문제는 결국 이성 간이 아닌 다른 형태의 사랑에 대한 문제이지 어떤 특정한 성행위의 양식을 따져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굳이 성행위의 어떤 양식에 집착하고 있는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서 ‘인권’을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보편적 인권의 개념은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누려야 할 어떤 권리가 있다는 공리에 동의를 해야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이다. 어떤 열등한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을 필요가 없다거나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보편적 인권을 말하는 것은 무척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한국인들은 성별과 인종에 따른 차별에 익숙하고 장애인에 대해서는 아예 인권감수성이 없다시피 하다. 한국인들이 ‘단일민족’ 이데올로기에도 익숙해있어서 ‘차이’에 익숙치 않다는 문제제기는 고전의 영역에 있다.

유난히 경쟁을 강조하는 한국사회의 풍토 역시 차별에 익숙하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아왔다. 미시적으로는 공부를 잘 해서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류의 강요가 그랬고 거시적으로는 하루빨리 선진국들을 따라잡아 우리도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국가의 ‘교시’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낙오되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은 늘 당연시됐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자조 섞인 한탄이 대표적이다. 그러니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 27일 인권재단 사람’에서 대립하고 있는 인권활동가들과 성소수자 혐오론자들. ⓒ미디어스

이들의 인권에 대한 몰상식은 인식의 어떤 혼란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사실과 마주쳤을 때 대개 자기가 이해하는 범위에서 그것의 ‘진의’를 파악하고 싶어한다. 한국사회는 유난히 성적으로 보수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이기도 한데, 이러한 사회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성적 지향’이 사회적 문제로 다뤄지는 상황 자체가 충격적이거니와 그 정체가 이성애 외의 사랑의 형태라고 하니 인식론적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이들이 선택하는 것은 “저들은 왜 인정을 요구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이 물음에 ‘보편적 인권’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놓는 것은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이들의 머릿 속에는 보편적 인권에 대한 이해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왜’라는 물음은 “저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로 전화된다. 저들은 도대체 무엇때문에 쓸데없는 시민헌장이라는 것까지 만들어 시끄러운 일을 만드는가?

우리는 같은 상황을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40여일간 단식했던 ‘유민아빠’ 김영오 씨의 예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김영오 씨의 앙상한 팔과 다리를 목격한 보수세력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들의 “저 사람이 40일 넘게 단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모범답안을 내놓는 것은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미 세월호 참사는 법적으로 따지자면 교통사고 정도의 위상이고 아이들은 놀러나갔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에 불과하며 ‘진상규명’은 반쯤 ‘국가전복’과 동의어가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다시 이렇게 바뀌었다. “저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보수세력 스스로의 답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이미 확인한 바 있다. 김영오 씨는 막대한 규모의 보상금과 차기 총선에서의 야당 공천을 원하고 있으며 금속노조 조합원으로서 정권 붕괴의 역사적 사명을 갖고 극단적인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게 이들을 만족스럽게 하는 답변의 형태다. 이러한 답변에 리얼리티를 더하기 위해 김영오 씨가 그간 자식들의 양육에 신경쓰지 않는 나쁜 아빠였으며 국궁이라는 최고급(?) 스포츠를 즐기는 귀족노동자였다는 서사가 따라 붙었다. 즉, 답변은 최대한 ‘통속’적이어야 한다.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이 충격적이면 충격적일수록 그 이면에는 자신들이 일상생활에서 한 번쯤 가져봄직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폭로’가 있어야 안도감이 들기 때문이다.

성소수자의 인권 문제도 마찬가지다. ‘특정한 양식의 성행위에 따른 쾌락의 추구’는 “저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통속적 형태의 답변이다. 이 때에야 이들은 비로소 무릎을 치고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있다. ‘보편적 인권’이라는 답변은 그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지만 ‘성적 쾌락’은 그들이 아주 잘 알고 또 늘상 추구하고 있는 성격의 것이다. ‘시민인권헌장’이라는 커튼 뒤에 바로 이런 통속적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드라마틱한 도식 덕분에 이들은 비로소 안도하고 가열찬 반격에 나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궁금해하는 문제에 대해 언제나 탁월한(?) 답변을 주시는 ‘그들만의 하나님’과 그의 종교적 대리인인 목사의 존재는 이들의 행태가 한 편의 블랙코미디로 이어지게 하는 요소의 ‘화룡점정’이다.

유럽의 역사에서도 같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나치 정권의 유태인에 대한 적대감이 바로 그것이다. 나치 정권은 유태인에 대한 대중적 의문을 조장한 후 그들이 원하는 가장 악랄한 형태의 답변을 제시했다. 왜 유태인들은 존재의 인정을 요구하는가? 유태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중을 속이고 금전적 이득을 취하며 결과적으로는 독일민족을 몰락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떤 비극으로 이어졌는지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지금 이 상황이 우리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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