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다양성협약'이란 것이 있다. 정식명칭은 '문화콘텐츠와 예술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 협약'이다. 2005년 10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148 대 2라는 압도적 표차로 통과되었고, 올 해 3월 정식 발표되었고, 현재 약70여개국이 이 협약을 비준하였다. 우리 정부는 당시 미국과 이스라엘만이 반대표를 던진 2005년 10월 총회에서 이에 찬성표를 던진 바 있다. 이 과정에서 관련 시민사회 단체들의 의견을 수렴하였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2005년 10월 당시 미국이 치열한 반대 로비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한국정부가 이중플레이를 했다는 설도 있었다.

▲ 서울신문 4월10일자 4면.

다시 말해 어쩌다 찬성표를 던지기는 했지만, 별의 별 방법을 다 동원해 협약 체결을 방해하고 있었던 미국의 의중을 혹여 거스르지나 않을까 그저 노심초사했다는 뜻이다. 이는 2005년 10월 당시 외교부가 대변인 명의로 발표한 보도자료에도 잘 드러난다.

당시 보도자료는 협약 제20조에 문제제기를 하면서 친절하게도 미국의 입장을 앵무새처럼 옮겨 적고 있었다. "동 협약 채택시 미국은 문화다양성 협약이 성급하게 성안되어 흠결이 있는 협약인 바, 동 협약의 모호한 규정은 상품, 서비스 및 사상의 자유로운 유통을 통제하고, 인권 및 근본적인 자유를 침해하는데 오용될 수 있으며, 자유무역을 통제하는 근거가 될 수 있어 동 협약의 채택에 반대하였다는 입장을 밝혔다."

외교부로서는 비록 찬성하기 했지만, 이것이 문화다양성협약이 "자유무역을 통제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는 미국의 - 황당무개한 - 고견을 감히 거역한 것은 아니라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둘 필요가 있었을 게다.

그렇다면 당시 미국, 이스라엘에 이어 한국도 문화다양성협약을 반대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세계문화사에 한국은 부시의 미국과 끝까지 함께 했던 충성스러운 가신국가였다고 기록되는 것이 오히려 솔직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한나라당 정병국의원이 이번 국감 질의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여태 문화다양성협약관련 일체의 비준 절차를 진행하지 않던 정부가 마침내 9월 7일 한미FTA 비준동의안 제출직후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즉 9월 21일 외교부장관은 법제처장에게 공문을 보내 문화다양성 협약 가입안에 대한 심사를 의뢰한 것이다.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비준절차를 개시한 것은 좋은 일 아닌가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전혀 아니다. 정병국의원의 질의에 따르면 외교부는 (1) 문화다양성협약 제20조는 "유보"하고, (2) 협약 제25조는 "승인하지 아니함"을 "선언"하고, (3) 국회동의 여부는 "필요 없음"으로 하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하나씩 보자.

(1) 문화다양성협약이란 말 그대로 경제와 시장의 막무가내 세계화에 의해 위협받는 문화생태계를 각 나라의 '문화주권'을 통해 막아보고자 하는 협약이다. 특히 이 협약은 문화분야에 있어서 새로운 거버넌스(governance)를 마련하기 위한 거의 최초의 국제협약이라고 볼 만하다. 따라서 이 취지에 대해서는 심지어 미국조차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WTO, FTA와 같은 경제통상조약과 이 협약의 관계이다. 그래서 협약 20조 <다른 조약과의 관계> 즉 이른바 '관계'조항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호지원성, 보완성 및 비종속성'이라는 3대 원칙을 선언하고 있다. 특히 협약 제20조 제1항 나호는 "다른 조약들을 해석, 적용하거나 다른 국제적인 의무를 부담할 때, 이 협약의 관련 규정들을 고려(take into account)"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달리 말해 한국이 FTA등과 같은 통상조약을 체결할 경우 한국정부는 상호지원성, 보완성, 비종속성의 원칙하에 문화다양성협약의 관련 조항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뒤집어 말하면 외교부가 바로 이 제20조 제1항 제2조를 '유보'하겠다는 말은, 통상조약을 체결할 때 문화다양성을 보호, 증진하기 위한 문화다양성협약의 관련 규정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의미에 다름아니다.

더군다나 협약 제20조가 협약내에서 차지하는 그 비중을 고려해 볼 때, 제20조를 유보한다는 말은 사실상 문화다양성협약의 의미를 그저 선의의 성명서수준으로 격하시켜 이를 무력화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이미 한국정부 스스로 찬성의사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또 2007년 3월이후 정식 발효중인 국제조약에 대해, 유독 한국정부가 나서서 핵심조항을 거세한 협약비준을 운운하는 것은 국제문화 공동체에서 미국의 나팔수를 자임하는 꼴이다. 스스로 망신을 자초하는 것이 정부가 입만 열면 외쳐대는 소위 '국제신인도'에도 아무 보탬이 되지 않음은 자명하다.

(2) 모든 국제조약은 약속의 준수를 전제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발생한다. 그래서 분쟁해결절차를 조약에 정해놓기 마련이고 이 절차는 대개의 조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중 하나이다. 문화다양성협약 역시 제25조에 협약의 해석이나 적용에 관한 당사국간의 분쟁은 교섭, 주선, 중재에 의해 해결하도록 하고, 만일 이를 통한 합의가 이루어 지지 않을 경우 협약 부속서(Annex) <조정절차>에 따른 분쟁해결을 규정하고 있다. 물론 협약은 이 조정절차를 각국이 승인하지 않을 수 있다고도 규정하고 있다. 이 협약 부속서상의 조정절차에 따르면 분쟁당사국은 각각 지명한 조정위원회의 조정안을 성실히 '고려'해야 한다. 외교부는 법제처에 보낸 공문에서 문화다양성협약 가입시 이러한 조정절차의 불승인을 선언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는 한국 정부가 분쟁해결절차와 관련 한미FTA협상에서 '투자자-정부 중재제도'(ISD)를 미국의 요구에 따라 수용했음을 잘 알고 있다. 이 제도에 따라 투자자는 분쟁발생시 상대국 정부를 직접 제소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화다양성 분쟁과 관련해서는 국가간 조정절차 마저 거부하는 정부가, 한미FTA 투자분쟁에서는 심지어 사기업에게까지 제소권한을 인정하는 것은 경제와 문화사이에서 최소한의 균형감각마저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대개 외교부는 조약에 대한 국회동의를 회피하기 위해 꼼수를 쓰게 마련이다. 문화다양성 협약도 그렇다. 정병국의원 질의에 따르면 법제처 심사의뢰서에서 국회동의여부를 묻는 항목에 '필요없음'이라고 적시되어 있다. 쉽게 말해 관련 행정부처가 합의하였기 때문에 국회의 비준동의는 불필요하고, 따라서 대통령비준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헌법 제60조 제1항은 '국회는, 상호원조 또는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 중요한 국제조직에 관한 조약, 우호통상항해조약, 주권의 제약에 관한 조약, 강화조약,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위 7가지 사안에 해당되는 중요한 국제조약에 대해서는 반드시 국회의 비준동의를 받도록 하고 있다. 문화다양성협약의 경우 문화다양성의 보호, 증진을 위한 각국 정부의 권리와 의무, 이를 위한 '정부간위원회'의 설치, 재정적 부담, 국제협력의 의무등을 자세히 규정하고 있다.

협약의 비준과 더불어 한국 정부는 이 조약의 이행에 따르는 권리와 의무를 당연히 부담하게 되고, 따라서 이는 헌법 제60조 제1항에 규정된 '주권의 제약'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문화다양성의 보호, 증진을 위한 각종 조치는 어쩔수 없이 우리의 현행 법률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데, 이 경우 문화다양성협약은 헌법 제60조 제1항의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에 해당된다. 예컨대 문화다양성 협약 제6조를 보자.

제 6조 당사국의 자국내 권리

1. 제 4.5조에서 정의된 바 문화 정책의 틀 내에서 각 당사국의 특정한 상황과 필요성을고려해 각 당사국은 자국내에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2. 이러한 조치는 다음의 사항을 포함한다.

가)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규제 조치

나) 문화 활동, 상품 및 서비스에 이용되는 언어에 관한 규정을 포함하여, 당사국 영토 내의 모든 문화 활동, 상품 및 서비스 가운데 자국의 것이 창조, 생산, 보급, 유통, 향유될 수 있는 기회를 적절한 방식으로 제공하는 조치

다) 비공식 부문의 독립적 문화 산업과 활동이 문화 활동, 상품 및 서비스의 생산, 보급, 유통 수단에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마련한 수단

라) 공공 재정 지원을 위한 조치

마) 비영리 조직, 공공, 민간 기관, 예술가 및 기타 문화전문가들이 생각, 문화적 표현, 문화 활동, 상품 및 서비스를 자유롭게 교환하고 유통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그들의 활동에 창조적 정신과 기업가적 정신을 고취시킬 수 있도록 장려하는 조치

바) 적절하게 공공 기관을 설립하고 지원하기 위한 조치

사) 예술가 및 문화적 표현의 창조에 관여하는 사람들을 육성하고 지원하기 위한 조치

아) 공영 방송 이용을 포함하여 미디어의 다양성 증진을 위한 조치 ..

(자) 공영 방송을 포함한 미디어 다양성 제고를 목적으로 한 조치

▲ 서울신문 4월10일자 4면.
다시 말해 문화다양성을 제고하기 위한 협약 제6조에 열거된 이러한 조치들이 '입법사항'을 포함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이다.

그러므로 외교부가 단순히 관련 행정부처의 합의를 이유로 문화다양성 협약에 대한 국회 비준동의를 회피하는 것은 행정편의주의에 불과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협약의 핵심에 해당되는 제20조를 일방적으로 유보하고, 조정절차를 거부하는 것 역시 국제상식에 벗어나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이다.

요컨대 외교부는 한미FTA를 위해 문화다양성협약의 비준절차를 정당한 이유없이 지연시켜왔고, 이제는 핵심조항을 들어내고 그것도 국회와 주권자인 국민을 아예 무시한채 일방주의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일러 나는 '통상독재'라 부른다. 때만 되면 한류를 들먹이며 문화콘텐츠를 운운해온 이 정부의 문화마인드가 얼마나 후진적이고 기만적인지 문화다양성협약의 비준절차가 여실히 보여준다.

젊은 시절 운동권 주변을 '대충' 서성댄 기억이 있는데, 아직도 손을 못 씻었다. 태어나 한 일이라고는 읽기, 쓰기가 다이고, 여태 모자라 아직도 계속한다. 그래서인지 학문적 오지랖이 꽤나 넓다. 주특기가 정치사상사이고, 누가 보든 말든 통일문제, 한미관계, 국제통상도 오래전부터 계속해오고 있다. 스크린쿼터 때문에 한 10년 가까이 영화인들과 손발을 맞추어 왔고, 한미FTA 때문에 너무 자주 TV에 등장했다고 핀잔도 많이 먹었다. "불신(不信)만이 살 길이다"를 모토로, 불신의 정치철학을 세워보는 프로젝트를 혼자 추진 중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