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만큼 법 지배의 현실, 법정을 통한 통치의 구조를 명징하게 간파한 작가는 없다. 그는 <법 앞에서>, <소송>, <법에 대한 의문>과 같은 일련의 작품을 통해 법치(法治)의 미래상을 오싹하게 예측했다. 권력은 법을 통해 지배한다. 법을 통해 통치하는 권력을 두려워하라! 끝없는 소송의 미로. 의문스러운 법의 존재. 특히 <법 앞에서>의 도임 부분은 그 상징적인 서사성은 물론이고 풍자적인 현실성 측면에서 가히 압권이다. 우리에게도 익히 잘 알려져진 대목이다. 카프카는 과거를 말하지 않았다. 슬픔과 분노, 불안과 좌절이 짙게 깔린 2014년 바로 이 땅의 권력통치 메커니즘, 권력지배 구조를 놀라운 현실로 그려낸다.

▲ 2008년 10월 10일, YTN노조가 MB특보 출신 구본홍 사장 반대 투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 (사진=미디어스)

법의 좁은 문 앞으로 한 사나이가 비틀거리며 다가온다. 들어가 볼 것을 요청한다. 버티고 선 문지기는 이렇게 시큰둥하게 답할 것이다. ‘내가 들어가는 걸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들어가고 싶다면, 한번 들어가 보시오. 나는 힘이 오히려 약한 편이라는 걸 명심하시오. 나는 최하급 문지기에 불과하오. 법정 하나를 지나 다른 법정으로 들어갈 때마다 더욱 힘이 센 문지기가 버티고 서 있을 것이오. 세 번째 문지기 얼굴은 보기만 해도 무서워 견딜 수가 없을 정도일 것이오.’ 문학적 서술이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자본국가에서 이 하급 법정 문지기의 경고는 일말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정의를 물리치는 겹겹의 상층부 문지기들. 정의를 가리기에는 너무나 정치적이고 이념화된 최고층 문지기들. 미로(迷路). 결국은 YTN의 공정성 기반을 처절하게 무너뜨려버린 구본흥 전 사장의 선임에 반대해 출근저지 농성을 벌였다가 해고된 YTN 기자들에 대한 어제 대법원의 판결이 정확히 그러했다. 힘센 최종 문지기 대법원들은 사내들을 비정하게 내동댕이쳤다. 냉정한 망치질. 세 명의 해고는 부당하나, 다른 세 명의 해고는 정당하다! 기막힌 분할. 함께 투쟁한 기자, 똑같은 대의를 지녔던 언론노동자들을 뚝 잘라버린다. 칼질한 권력에게 승리를 선언한다. 공익을 위한 사회적 저항을 불법적인 것으로 낙인찍는다.

최종 문지기들의, 냉혹한 현실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재판이다. 법은 결코 정의와 함께 하지 않음을 공시하는, 판결이라는 이름조차 수치스러운 부정한 결정. 아, 최소 수준의 민주주의조차 무너져내리는 것을 목도하는 우리에게는 저주와 같은 주문(呪文)이다. 사회적 선의, 사회적 이익이 또 일방적으로 망치질을 당한다. 사측의 해고는 정당하다! 뚝딱. 3명은 남고, 3명은 아웃! 똑똑. 심판 끝! 대법원 민사1부(주심 김용덕 대법관)는 노종면 전 YTN 노조위원장과 노조 조합원 등 9명이 ㈜YTN을 상대로 낸 징계 무효소송 상고심(2011다41429)을 그렇게 원고패소 판결 원심을 확정하는 걸로 정리한다.

▲ YTN 해직사태 2244일째였던 27일, 대법원 선고를 듣기 전 YTN 해직기자 6명의 모습. 2008년 낙하산 구본홍 사장 퇴진투쟁 당시 노조위원장이었던 노종면 기자는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다. 상식적인 결과가 나올 거라 생각하고 재판에 임하겠다”고 말했으나 대법원은 이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사진=미디어스)

카프카의 예언, 소설 속 문지기의 경고가 딱 맞았다. 올라가 봐야 소용없다지 않았소? 헛된 일일 뿐이오. 더욱 무섭고 훨씬 더 비정하며 철저하게 관료화된 문지기 나리들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오. 지배 권력과 일체가 되어 있고, 스스로가 권력인 재판부 나리들이오. 하, 자본국가의 최종 문지기 어른들은 언론자유나 방송독립, 미디어공공성 따위는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소. 언론사를 일반회사처럼 생각할 것이고, 공정보도를 위한 싸움도 사기업의 노사갈등과 같이 취급할 거요. 맞다. 우리가 헛된 기대를 품은 것이다. 허물어진 한국 민주주의의 최종 문지기들은 우리 편이 더 이상 아니다.

2009년 1심 재판 때만해도 미련이 남아있었다. 이 하급의 문지기들은 그래도 상식이 있어 "공정보도 원칙 내지 정치적 중립이 저해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출근저지 농성을 벌인 것으로 인정돼 동기를 참작할 필요가 있다"며 판단했다. "회사와 근로관계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노 전 위원장 등에게 책임 있는 사유가 있다고 볼 수 없으므로 해고는 재량권을 남용한 것"이라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엄혹한 현실 속에서도 마지막 정의의 보루로써 살아있을 법! 우리가 순진했다. 권력의 해고자 처리의지는 강고했고, 권력과 훨씬 정통하는 겹겹의 높은 직책 문지기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사측의 항소심에서 그들은 실제로 "출근저지 농성은 근로자가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존중해 줘야 하는 사용자의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권리인 경영진 구성권과 경영주의 대표권을 직접 침해한 것으로서 사회통념상 고용관계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의 징계해고사유에 해당한다"며 말을 바꾼다. 노 전 위원장 등 3명에 대한 해고는 정당하다며 판결을 번복한다. 저널리스트를 ‘근로자’로 정리하고, YTN 사장 선임을 ‘사용자’의 정당한 권리로 정의하며, 미디어 공공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사회통념’을 위반한 악의적 행동으로 규정하면서다. 신자유주의 논리는 그렇듯 지배적 법의 언술에도 깊이 침투해 있었다.

신자유주의 속 현행의 사법부는 자본주의를 법리적으로 풀이하고 법률로서 관철시키는 관료적 기관일 뿐인가? 마침내 대법관들이 나선다. 언론의 자유, 노동의 권리, 방송의 독립을 둔 치열한 공방에 종지부를 찍었다. “원고 노종면 외 8인, 피고 주식회사 YTN.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회사 승리, 권력 윈! 노 전 위원장 등의 출근저지 농성이 비록 방송의 중립성 등 공적 이익을 도모하는 목적이 담겨있는 행동이라는 사정을 참작하더라도, 3명의 해고조치가 회사가 가진 징계 재량권을 일탈하거나 남용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논리이다. 인정상 안타깝지만, 법리상 어쩔 수 없다는 너무나 옹졸한 진술이고 비겁한 설명이다.

▲ 27일 오전 10시 24분, 30초도 안 돼 끝난 대법원 선고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노종면 기자가 눈물을 보이고 있다. (사진=미디어스)

YTN 사측의 손을 들어주고, YTN 저널리즘을 말살한 전 사장의 손을 들어주며, 무엇보다 그런 낙하산 사장을 계속해 송파하는 정권의 손을 들어준 최종 문지기들의 궤변일 뿐이다. 해고된 기자들을 두 번 죽이고, YTN의 정상화를 위해 싸워온 방송노동자들을 두 번 베어내며, 이들과 더불어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기원하는 시민 시청자들을 두 번 싹둑 잘라버린 진혹한 칼질이었다. MBC 노동자들의 복직, 미디어 공공성 회복, 한국 민주주의 복구의 가능성을 암울케 하는 망치질이었다. 법의 구제를 받을 수 있 있었으면 하던 우리의 환상은 비정한 현실 속에서 분노에 찬 배신감으로 이어진다. 나락 없는 환멸만 남는다.

현실의 각성. 진상의 인식. 세월호 사태가 대법원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국가에 대한 구원의 기대는 끝내 외면당했다. 수많은 인명이 몰살하는 참극이 이어졌다. 이번 재판도 정확하게 그러하다. 법은, 법정은, 법관은 인명을 보호하지 않는다. 정의를 구조하기 위해 뛰어들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자본국가가 지배하는, 뉴라이트와 우익 그리고 보수의 연합이 사회 곳곳을 지배하는, 파시즘의 전조와 전체주의의 징후가 스멀거리는 2014년 대한민국에서 법의 지배는 권력의 지배를 뜻할 따름이다. 정의의 법정은 권력의 법정으로 변질되었고, 양심적 법관은 정치적 대법관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러할 뿐이다, 친구여.

그대들 또한 법의 구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이 땅의 난쟁이들. 법은 해고되고 버림받은 인간, 무서움에 떨고 고통에 힘겨워 하는 벌레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결코 반기지 않소이다. 권력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를 외치고 야만에 항거하는 우리를 계속 배신할 것이오. 더욱 나락으로 내밀고, 비참과 절망으로 쳐 넣으려 할 것이오. 이 냉정한 현실이 면전에서 반복되었을 뿐. 부정한 법정에서 비정한 문지기들에게 의해 쫓겨난 우리에게 카프카는 소설 말미에서 문지기의 이런 말을 이미 전하지 않았던가? “문 닫을 때요. 당신은 이제 곧 죽을 것이고, 나는 당신을 위해 잠시 연 문을 닫아걸러 가야겠소.” 철거덕. 두렵소, 그대여?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