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플레잉 게임의 제왕, 새 확장팩으로 돌아오다

게임 장르 중 롤 플레잉 게임(Role Playing Game)은 말 그대로 역할 놀이가 중심인 게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준비된 가상의 시공간 안에서 플레이어는 특정한 인물의 역할을 맡아, 그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극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역할극의 주인공을 맡는 이러한 RPG의 요소는 연극의 배역을 맡는 것과 유사한데, 대본을 외우고 극작가의 의도를 재현해 내야 하는 배우와 달리 롤플레잉 게임의 플레이어는 주어진 스크립트와 상황에 대해 자신의 선택으로 대응한다.

플레이어가 사건의 주체가 되어 서사의 흐름을 일정 수준 안에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이러한 역할극 게임은 그래서 재미와 몰입도가 무척 높은 장르다. PC게임의 등장 이전에 인류의 놀이문화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 로제 카이와는 <놀이와 인간>라는 책에서 놀이의 요소를 경쟁(Agon), 행운(Alea), 역할극(Mimicry), 환각(Illinx)로 정의한 바 있는데, 카이와가 의미한 역할극은 지금 우리가 언급하는 롤플레잉 게임은 아니었지만 연극의 배우나 아이들의 소꿉놀이와 같은 역할극이 주는 재미와 롤플레잉 게임이 주는 재미가 같은 근원을 가졌다는 점을 짐작케하는 부분이 있다.

롤플레잉 게임 장르는 시대와 환경에 발맞추어 나름의 진화를 계속 해 왔다. 그 발전과 성장은 21세기 초입에 들어서는 이른바 MMORPG(다중접속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장르가 게임산업 내 장르비중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는데, 그 중에서도 사실상 현 시대를 대표할 만한 MMORPG 게임 하나가 2014년 11월20일 새로운 스토리를 담은 확장팩을 출시했다. 블리자드의 대표작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드레노어의 전쟁군주>(이하 ‘WOW’’)이다.

현재까지 생성된 계정 수만 1억 개가 넘고, 2014년 11월 기준으로 유료이용자 수가 1천만이 넘는 초히트작 <WOW>는 2004년 그 첫 선을 보인 이래 10여 년의 세월동안 온라인 게임의 정상을 지켜 온 MMORPG이다. 10년의 세월을 거쳐 오면서도 새로운 확장팩이 출시될 때마다 큰 이슈와 관심을 불러모으는 <WOW>의 인기 원인을 살펴보려면, 우선 <워크래프트 1> 에서 시작해 20년을 넘게 이어져 온 <워크래프트> 프랜차이즈의 역사를 돌이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워크래프트> 프랜차이즈의 20년 역사

1994년 블리자드가 제작한 <워크래프트: 오크와 인간>이라는 실시간 전략시뮬레이션 게임(RTS)은 출시때만 해도 최고의 RTS게임이었던 <듄2>(1992)를 베꼈다는 비난에 시달렸고, SF소설인 <듄>을 원작으로 한 게임 <듄2>보다 세계관도 부실하다며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후속작 <워크래프트 2: 어둠의 물결>(1995)은 <듄2>를 넘어서는 비평과 인기를 한번에 얻었고, <워크래프트2>의 성공을 발판삼아 출시한 <스타크래프트>(1998)는 다른 설명이 불필요한 명작 RTS 게임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블리자드는 지금까지의 역량을 모아 시리즈의 3편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워크래프트 3: 레인 오브 카오스>(2002)는 워크래프트 프랜차이즈의 특징이 비로소 결실을 맺는 지점이었다. 1편과 2편의 설정과 세계관은 꽤 단순한 편으로, 인간과 오크가 서로 치고받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전략시뮬레이션이었다. <스타크래프트>에서 전략시뮬레이션도 나름의 세계관과 성격을 부여하면 서사적 성격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 3> 에서 본격적으로 워크래프트의 세계관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1-2편의 워크래프트가 보여준 휴먼과 오크의 대립은 J.R.R.톨킨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부터 시작되어 여러 판타지 장르를 거치며 확립된 선악 대립의 개념인데, 독자 또는 플레이어의 고유 속성인 인간과, 인간보다 흉포하고 짐승이나 괴물에 가까운 모습을 한 오크를 상정함으로써 선악 대립구도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형태였다. 많은 종교미술에서 천사와 악마를 다룰 때, 천사는 가급적 인간에 가까운 모습을 부여하고 악마는 뿔, 동물의 눈, 비늘과 같은 짐승의 성격을 강조할 수 있는 아이콘과 결합해 온 점과 동일한 맥락이다.

▲ <와우>의 호드 대족장 스랄. 이 멍해 보이는 오크를 지키기 위해 어떤 유저는 날밤을 새기도 했다.

<워크래프트 3>에서는 이러한 고유성을 벗어나 늘 공포와 악의 상징이 되었던 오크에게 새로운 개성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 3>에 등장하는 오크 종족에게 부족의 역사와 전통을 부여하고, 단순히 피와 전쟁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명예를 숭상하고 고대 주술로부터의 지혜를 이어오는 속성을 이어 붙인다. 전작까지 인간을 파괴하는 악마의 수괴로만 상징성을 가졌던 오크 족의 부족장들은 <워크래프트 3>의 오크 족장인 ‘스랄’ 에 이르러서는 지혜와 용기를 두루 갖추고 부족의 생존과 세계의 안정을 위해 싸워 나가는 영웅의 모습을 투영한다.

이렇게 구성된 세계관은 <WOW>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한 ‘얼라이언스’와 오크를 중심으로 모인 ‘호드’ 두 그룹간의 갈등을 각자의 정당성을 기반으로 한 투쟁으로 그려낼 수 있게 해 주었다. <WOW> 에 등장하는 인간보다 야수에 가까운 외모의 종족들은 더 이상 단순한 악마 군단이 아니다. 황소의 외모를 가진 타우렌 종족은 아메리카 원주민에서 모티브를 따와 대지모신을 숭상하고 자연과의 교감을 중시하고, 모든 판타지물에서 전통적으로 악역을 담당해 온 오크는 몽골 유목민족을 모티브로 한 늑대 숭상과 주술신앙을 기초로 명예와 고대지혜를 중시하는 고귀한 전사들로 묘사된다.

두 종족의 선악대립으로 표현되는 양자 구도를 벗어나 여러 종족들이 각자의 이해 관계에 얽혀 모였다 흩어지고, 그 하나하나의 입장이 절대가치로서의 선악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입장에 따른 상대가치로 나타나면서 가상대륙 아제로스의 역사는 세계의 시초가 되는 신화부터 현재까지의 연표를 보다 설득력있는 다자구도를 통해 새로 그릴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모든 플레이어가 각각의 종족에 자신의 관점으로 개입하여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MMORPG인 <WOW>를 플레이하는 이들에게 게임 내에서 치르는 모험과 전투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했다. 프랜차이즈의 첫 작품이 출시된 지 20년이 넘어가는 세월 동안 축적된 이야기는 <워크래프트> 프랜차이즈가 가진 게임성에서의 최대 자산이다.

이 역사성과 설득력있는 서사는 생각보다 높은 소속감과 몰입도를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2005년도의 <WOW> 게임 세계에서는 호드의 대도시 오그리마에 거주하는 대족장 스랄을 죽이러 얼라이언스 유저들이 단체로 침공해 오자, 한참 아이템 파밍을 위해 던전을 공략하던 많은 호드 유저들이 단체로 마을로 귀환하여 적의 침공에 맞서던 사례들이 많았다. 그냥 게임 내에 구현된 인공지능 캐릭터일 뿐이었지만, 플레이어들에게 스랄이란 캐릭터는 단순히 멀뚱하게 서 있는 허수아비가 아니라 호드 연합을 일궈내고 황무지에 새로운 터전을 세운 그들의 수장으로서 다가왔던 것이다. 스랄을 지킨다고 해서 레벨이 올라가거나 더 좋은 아이템을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스랄이라는 캐릭터가 게임 내의 다른 이득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된 것은 20년간 쌓여온 콘텐츠의 역사가 플레이어들에게 설득력을 발휘한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세계관과 설정만으로 <WOW>의 재미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세계관에서 제작된 <워크래프트 3>와 <WOW>는 그 인지도와 실제 플레이어수 면에서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워크래프트 세계관 하에서 출시된 여러 게임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높은 인기를 차지하는 <WOW>만의 강점은 MMORPG라는 장르적 특성에도 존재한다.

보드게임에서 MMORPG까지, MMORPG의 간략한 발전사

MMORPG, ‘대규모 다중접속 역할게임’은 롤플레잉 게임의 하위 분류 중 하나다. 그리고 그 롤플레잉 게임의 역사는 재미있게도 컴퓨터 게임의 역사보다 오래되었다.

최초의 롤플레잉 게임으로 불리는 <던전 앤 드래곤>은 컴퓨터 게임이 아니라 카드와 미니어처 모형, 주사위와 룰북으로 구성된 보드게임 형태였다. 게임 참가자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마스터가 제시하는 상황을 받고, 각자의 역할을 잡는다. 마스터의 상황제시는 대개 어느 성 근처의 동굴에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식이고, 나머지 참가자들은 전사, 마법사, 궁수 등의 역할을 정하고 장비를 갖춰 마을을 구하기 위해 나서는 식이다. 정해진 스토리는 없으며, 마스터와 참가자들이 끊임없이 상황을 제시하고 게임의 룰을 통해 이를 극복하며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형태다.

직접 서사를 만들어가는 창작의 재미와 서사 주체로서의 몰입도는 이러한 TRPG의 핵심인데, 문제는 생각보다 테이블 게임을 진행하는 데 필요하다는 부가 요소가 번거롭다는 점이었다. 공격과 방어의 성공을 체크하기 위해 주사위를 굴려야 하고, 누적되는 데미지와 체력은 별도의 기록으로 관리해야 한다. 어떤 마법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룰북을 열심히 뒤지기도 해야 하는 이 번거로움은 그러나 컴퓨터의 발전이라는 방식을 통해 극복된다.

최초로 컴퓨터를 통해 구현된 롤플레잉 게임은 <던전앤 드래곤>의 복잡한 전투를 전산계산으로 단순화시킨 형태의 수준으로, 지금 기준에서는 충격적인 비주얼을 자랑한다. 지금의 컴퓨터 게임과 비슷하게 나름의 시각화를 갖춘 게임으로는 PC 롤플레잉의 양대 비조 격으로 꼽을 수 있는 <울티마>(1980)와 <위저드리>(1981)가 대표적이다. 보드게임에서의 복잡한 처리절차가 단순화되어 손쉽게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는 역할극으로서의 재미가 기존의 TRPG 유저들을 사로잡았지만, 마스터와 참가자 간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던 서사가 전산 스크립트에 의해 고정되면서 스토리의 자유로움 부분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 테이블게임 <던전앤드래곤>의 캐릭터 시트. 캐릭터의 설정과 능력치, 히스토리를 저 시트 안에 기록하면서 게임을 진행한다.

이러한 PC 롤플레잉 게임의 한계는 네트워크가 보편화되는 시대를 맞아 변화의 기회를 맞이한다. 멀티플레이의 도입이 그것이다. 네트워크는 보드게임 롤플레잉의 그것과 같이 나 외의 다른 사람과 같은 게임에서 교류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했다.

초기의 멀티플레이 기술은 같은 게임을 가진 PC끼리 연결하여 서로 대전을 벌이거나, 같은 도전과제를 함께 수행해 나가는 형태로 보통 2-4인이 모일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러나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앞서 롤플레잉 게임의 시조로 언급된 <울티마> 시리즈는 1997년에 <울티마 온라인> 이라는 이름으로 중앙 서버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게임 세계에 모여 함께 참가할 수 있는 형태의 롤플레잉 게임을 제시했다. ‘최초의 MMORPG는 어떤 게임인가?’를 두고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울티마 온라인>은 MMORPG의 많은 주요 개념을 처음 제시한 프로토타입이라고 주장해도 전혀 무리가 없는 게임이다.

MMORPG는 기본적으로 개인이 아닌 대중이 플레이하는 집단 게임이다. 수백 명이 동시에 게임을 즐긴다는 것은 그만큼 처리해야 할 데이터의 양이 방대하다는 의미인데, 이러한 데이터를 처리하고 각 개인간의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 MMORPG게임은 개인의 PC가 아닌 서버에서 게임 내 세계를 구현하고, 개인의 PC는 최소한의 데이터만을 전송받아 화면을 그려내고 플레이어의 명령을 서버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보드게임 롤플레잉을 기준으로 설명한다면, 게임 마스터가 개인PC가 아닌 서버로 넘어갔다는 의미이다.

이 때문에 MMORPG는 기본적으로 플레이어가 게임을 종료해도 게임 내 세계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개인컴퓨터는 플레이어 하나만을 상대하므로 문제가 없지만, 서버는 한 번에 수백 명 이상을 응대해야 하므로 누구 한 사람이 게임을 종료하는 것이 큰 의미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MMORPG는 마치 일종의 가상세계와 같이 독립된 시간을 가지며, 게이머가 참가하지 않아도 그 시간의 흐름은 끊기지 않는다.

독립된 시간 안에 대규모 군중이 모인 게임이라는 특성은 MMORPG를 일종의 독립된 가상사회로 만든다. 동일한 시간에 접속해 있는 플레이어들은 게임 세계 안에서 서로 상호작용을 하게 되는데, 게임이 제시하는 퀘스트, 상황 같은 것뿐만이 아니라 각 게이머들이 스스로의 필요와 재미에 의해 만들어가는 상호작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필요한 아이템을 거래하거나, 막강한 적을 물리치기 위해 동맹을 맺는 등의 활동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작용은 거대 길드, 게임 내 경제생태계 등의 자생적 사회구조를 만들어내며 상호작용에 의한 재미를 선사하는데, 게임 제작사들 또한 이 대규모 상호작용의 긍정적 의미를 알고 있기에 게임을 가급적 설득력있는 가상사회로 만들기 위해 공을 들인다.

▲ PC 롤플레잉 게임의 조상격인 <울티마 1>의 화면. 가운데 보이는 사람 모양이 주인공이다. (이미지=엔하위키)

MMORPG로서의 근본에 충실해서 얻는 <WOW>의 즐거움

<WOW>의 개발사인 블리자드는 자신들의 개발 철학을 테마파크에 비유한 바 있다. 일정 금액을 결제하고 나면 플레이어는 제작사가 제공한 게임이라는 가상 사회에서 현실에서는 얻을 수 없는 새로운 경험과 도전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은 마치 테마파크의 자유이용권을 끊은 방문객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꼭 롤플레잉의 기초인 역할극이 늘 용사가 악당을 물리치는 중심 주제로만 흘러갈 필요는 없으며, 고개를 살짝 돌려보면 그냥 가상세계에 머무르는 자체만으로도 즐길 거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은 <WOW>가 가진 장점 중 하나다.

<WOW>는 기본적으로 고사양의 그래픽을 요구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벼운 만화 톤의 그래픽을 이용하면서도 풍광을 그려낸 면에서는 유저들로부터 높은 찬사를 받았다. 특별히 게임 내에서 퀘스트를 수행하거나 적과의 전투를 치르지 않아도 그저 신기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경치만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퀘스트와 레벨업 외에도 낚시, 애완동물 대전, 고고학과 같은 소소한 재밋거리를 10여 년 동안 꾸준히 추가해 왔고,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이런 요소들은 게임을 접거나 떠난 이들에게도 일종의 회고담처럼 남아 콘텐츠의 생명력을 더했다.

풍부한 콘텐츠의 생명력을 바탕으로 한 설득력있는 세계관, 그리고 MMORPG의 기본에 충실한 테마파크스러운 볼거리와 자유도. <WOW>는 분명 이러한 면에서도 독특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워크래프트 배경의 소설을 읽어도 무방하고, 훨씬 더 그래픽에 많은 투자를 한 최신 게임에서 얻는 즐거움이 클 수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두 요소는 <WOW>의 특징이긴 하지만, 롤플레잉 장르로서 갖는 <WOW>의 핵심 재미요소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많은 이들이 <WOW>를 끊을 수 없는 중독성 강한 게임으로 부르고 매번 새 확장팩이 나올 때마다 다시 결제창을 여는 주제는 ‘도전’과 ‘파밍’으로 부를 수 있는 두 재미 요소의 순환이 서사 콘텐츠와 자연스럽게 결합하면서 나오는 시너지 효과다.

▲ 내의 다양한 풍광과 세세한 즐길거리들은 플레이어에게 추억을 주는 또 다른 요소다.

<WOW>의 도전: 레이드

모든 게임에서 도전은 당연히 재미의 핵심 가치다. <테트리스>는 무작위로 떨어지는 블록을 끼워맞춰 최고점수를 올리는 것을 주요 도전과제로 삼으며, <스타크래프트>는 자원을 모으고 병력을 생산해 상대방을 제압하고 승리하는 도전과제를 갖는다.

롤플레잉 게임에서의 도전은 ‘상황’이다. 앞서 언급한 보드게임 롤플레잉은 마스터가 플레이어에게 상황을 제시하고 타개할 것을 주문하며, 플레이어들은 이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최종적으로 도전을 극복함으로써 성취감을 얻는다.

롤플레잉의 상황 제시는 MMORPG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형태를 띠는데, 바로 집단이 참여하는 MMORPG의 특성이 포함된 협력에 의한 도전 극복이다. 이른바 ‘레이드’(raid)라고 부르는 것으로, 혼자 또는 서너 명의 작은 규모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 아니라 10명, 때로는 수십 명에 육박하는 인원이 모이지 않으면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를 타개하기 위해 플레이어 간의 협력을 만드는 요소다.

<울티마 온라인>이 달성한 대규모 참여에 의한 새로운 가상세계 구현은 MMORPG장르의 또 다른 걸작인 <에버퀘스트>(1999)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데, 바로 레이드 개념의 등장이 그것이다. 몇 명이 모여서는 도저히 잡을 수 없는 거대한 몬스터가 나타나면 서버 내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뭉쳐 공략을 시작한다. 대규모 플레이어의 운집과 그 결과로서 도저히 공략이 불가능해 보였던 몬스터를 처치하는 과정은 플레이어들을 기존의 롤플레잉 게임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성취감으로 이끌었다.

수십 명이 모여 도전하는 레이드는 단순히 머릿수를 늘려서 물량전으로 끝을 보는 초기의 형태에서 조금씩 발전하여 전략적인 움직임을 요구하는 형태로 발전한다. <에버퀘스트>는 이 레이드 개념의 도입으로 사실상 21세기 MMORPG의 뼈대를 완성한 게임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WOW>는 바로 이 레이드를 게임 내의 핵심 스토리를 끌고 가는 메인 콘텐츠로 내세웠다.

20년 역사의 콘텐츠 흐름에서 <WOW>에 등장하는 주요 적 보스들은 당연하게도 설정상 엄청나게 강력한 힘을 자랑한다. 그런 보스들을 단순히 플레이어 몇몇이 손쉽게 잡아 버리는 것은 게임의 중심서사를 의심하게 만들 수 밖에 없기 때문에 <WOW>는 수십 명의 용사들이 공격대를 구성해 적의 중심부를 향해 전진하는 형태의 레이드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현재진행형인 가상 세계의 스토리를 플레이어 스스로가 만들어간다는 성취감을 얻을 수 있도록 게임을 구성했다. 하나의 시나리오 확장팩이 나오면 플레이어는 개인 퀘스트들을 하나하나 수행해 나가면서 새로운 세계에 닥쳐온 거대한 위협을 인지하면서 조금씩 레벨업이라는 과정을 통해 성장해 간다. 그리고 그 거대한 위협을 해결해야 할 시기가 도래하면 동료들을 모아 최후의 도전을 준비하며, 최종 보스를 쓰러뜨린 결과가 가상세계의 역사 흐름에 반영되면서 하나의 시나리오 확장팩이 종료되는 형태이다.

그리고 그 레이드의 과정은 단순히 개인 캐릭터의 성장과 좋은 아이템의 사용으로만 극복할 수 있는 형태로 제시되지 않는다. 레이드에 참가하는 인원들에게는 롤플레잉 게임 안에서의 또 다른 롤이 부여된다. 똑같이 동료들의 치유를 담당하는 사제라 하더라도 누군가는 보스의 공격을 최대한 몸으로 막는 탱커의 체력을 전담마크하고, 누군가는 다른 동료들의 체력 전체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는 등 각자의 역할이 발생하고, 이를 유기적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아이템을 들고 있다고 해도 공략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십 명이 모여서 주어진 임무를 유기적으로 수행하고, 협동을 통해 주어진 도전과제를 극복하는 이 과정은 현 시대 MMORPG의 대표적 특성이 되었고, <WOW>는 이를 메인 서사와 연결하면서 MMORPG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도전과 극복이 주는 즐거움은 그 한계효용이 긴 편은 아니다.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애니팡> 같은 퍼즐게임이라면 최고점수에 대한 도전이라는 긴 한계효용을 갖지만, 레이드의 성취감은 보스 킬이라는 단판성 과제의 달성에서 오기 때문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무료함을 낳는 결과를 가져 온다.

* <WOW> 레이드던전 '오그리마 공성전투' 의 보스 중 하나인 공성기술자 블랙퓨즈의 하드모드 공략 영상. 25명의 공격대원이 약 10분에 걸친 전투를 치르며, 보스인 공성기계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조립라인에서 쏟아져 나오는 부하들을 없애는 '라인조'가 별동대로 움직이며, 중간에 땅을 뚫고 나오는 미사일을 피해야 함과 동시에 날아오는 전기 톱날을 피하는 등의 움직임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만 공략이 가능하다.

도전의 한계효용을 극복하는 파밍의 의미

이를 보완하는 것이 두 번째 주제인 ‘파밍’(farming)이다. 단어 뜻 그대로 일종의 농사를 짓는다는 의미인데, MMORPG에서는 특정한 아이템을 얻기 위해 그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레이드 공략을 마치 농사짓듯이 계속 진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WOW>나 다른 MMORPG를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게 무슨 재미냐며 의아해할 수 있겠지만, 정작 <WOW> 플레이어들에게 ‘와우의 재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이템 먹는 재미죠.”

롤플레잉 게임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더욱 강하게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레벨업과 아이템 장만이라는 두 방식이 널리 쓰인다. <WOW>의 경우에는 핵심 콘텐츠인 레이드가 각 시나리오별 최고레벨에 도달해야만 열리므로 레이드 단계에서는 레벨업이 의미가 없고, 좋은 갑옷과 무기를 갖추어 능력치를 올리는 형태가 캐릭터 성장의 핵심이다. 그리고 최고 품질의 아이템은 높은 난이도의 레이드 공략에서만 보상으로 주어진다.

앞서 이야기한 도전으로서의 레이드가 플레이어에게 익숙해지면서 더 이상 도전이 아니게 됨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가 레이드에 참가하는 것은 최고 품질의 아이템을 획득하는 파밍 과정이 레이드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레이드 도전이 끝나면 서비스 패치를 통해 그보다 더 어려운 난이도의 레이드 던전이 등장하는데, 더 어려워진 만큼 기존보다 좋은 스펙의 캐릭터만이 공략 성공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레이드 공략을 멈추지 않는다. 꾸준히 레이드 플레이를 진행하면서 자신의 캐릭터를 성장시켜 다음 레이드 공략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파밍은 도전과제의 달성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자기과시로서의 만족감도 제공하는 기능도 포함한다. 단순하게는 최고의 아이템을 들고 있는 내 캐릭터에 대한 만족감도 있겠지만, 실제 레이드 공략에 들어가서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강력한 공격력을 뽐내기 위한 용도로서도 의미를 갖는다. 현실에서라면 유치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게임은 재미를 얻기 위해 현실로부터 분리된 영역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의 과시욕과 자기만족은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니다.

파밍은 이렇게 플레이어에게 부가적인 만족감과 성취감을 제공하는 의미를 갖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이를 통해 콘텐츠의 생명력을 늘려 레이드 던전의 한계효용을 늘린다는 생산자 관점에서의 효율 문제에 있다. 만약 파밍의 단계가 없다면 공들여 제작한 레이드 던전은 일회성의 콘텐츠로 전락하게 되는데, 이는 게임계의 블록버스터라 불릴 정도로 막대한 자본과 인력이 들어가는 MMORPG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같은 비용을 들여 제작한 레이드 콘텐츠가 오픈 후 한달을 못 버틴다면, 플레이어의 이탈 방지를 위해 제작사는 또다시 높은 비용을 들여 끊임없이 새 콘텐츠를 공급해야 한다. 한계효용의 지점을 뒤로 밀어내는 파밍의 요소는 그래서 MMORPG의 존속 자체에도 관여하는 중대한 요소다.

도전과 파밍의 순환으로 이뤄내는 자연스러운 서사와의 접목

파밍은 도전과 맞물리면서 캐릭터의 성장과 콘텐츠의 위압감을 만들어낸다. 캐릭터의 능력치가 숱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라면 메인 서사인 최종보스로 접근해 가는 길로서의 설득력이 떨어진다. 기승전결의 일반적 서사 흐름에서 최종보스가 위치하는 최절정의 단계는 게임에서는 아무나 도전할 수 없는, 준비된 자만의 것이라는 주장이 이루어져야 하고, 플레이어가 바로 그 준비된 자라는 이야기가 타당성을 가져야 한다. 1단계의 레이드를 돌파하고, 파밍을 통해 점점 성장한 캐릭터가 2단계의 레이드에 도전하는 이 과정이 순환하면서 <WOW>의 메인 서사는 각 단계별로 알게 모르게 진행되는데, 이를 통해 장르적 재미 요소가 서사적 재미 요소와 결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다.

수많은 MMORPG 중에서도 <WOW>가 독보적인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이다. 성장과 메타서사를 접목시켜 플레이어가 자연스럽게 게임 내 역사의 중심에 서게 만드는 이 방식을 <WOW>는 성공적으로 게임에 구현했다.

<WOW>의 등장 이전 MMORPG의 대세를 구축했던 <리니지>를 중심으로 한 한국형 MMORPG들과의 비교는 <WOW>의 장점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방식이다. 최고레벨을 달성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던 <WOW>에 비해 한국형 MMORPG들은 레벨업에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형태를 유지했었다. 게임의 중심 콘텐츠도 제작사가 만들어가는 스토리의 흐름보다는 플레이어 간의 상호작용과 ‘사냥’으로 대표되는 무한 몬스터 잡기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실시간으로 시간이 흐르는 MMORPG에 거대 서사를 집어넣기에는 게임의 설계 자체부터가 무리였던 점이 있었다. 하지만 <WOW>의 성공 이후 벤치마크가 이루어지면서 이제 거의 모든 한국의 MMORPG들도 <에버퀘스트> - <WOW>로 이어지는 레이드 중심의 서사 콘텐츠 형태를 가져가는 추세다.

2014년 11월에 오픈한 새 시나리오 확장팩 <드레노어의 전쟁군주>는 전작 <판다리아의 안개>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결말을 이어나감과 동시에 워크래프트 프랜차이즈의 초반 이야기가 평행세계 개념으로 함께 들어오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신작의 유저들을 끌어감과 동시에 <WOW>의 올드 유저들이 열광할 수 있는 옛 주제를 꺼낸 이 선택은 상당히 주효하여 한때 750만 명으로 떨어졌던 유료이용자수는 오픈이후 다시 1천만 명을 회복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WOW>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는 표현에 걸맞은 상황은 아니다. 신작의 평행세계 시나리오는 오히려 워크래프트 프랜차이즈가 끌고 온 콘텐츠가 다 소모되어 억지로 들고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플레이어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실제로 <워크래프트 3>에서 확장된 세계관과 등장인물, 스토리는 <WOW>의 세 번째 확장팩 근처에서 대부분 결말을 맞았고, 그 이후의 확장팩들은 기존과는 달리 스토리상의 큰 진전이나 감동을 이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장르 자체의 흥행도 예전 같지않다. 게임은 MMORPG만 남는 것 아니냐는 우려 속에 대흥행을 거두었던 시절은 지나가고, 이제는 <리그오브레전드>를 필두로 한 팀제 전략액션(장르의 호칭이 아직 불분명하고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장르가 대세를 이끌고 있다.

<WOW>에 자주 나오는 유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를 가리키는 단어인 ‘필멸자’는 <WOW> 스스로에게도 적용되는 단어다.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 게임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WOW>에 본인의 계정을 만든 적이 있는 1억 명의 사람들은 설령 게임의 수명이 다하더라도 어딘가에서 자신의 와우 시절 추억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가상 세계를 구현하고 그 안에서 역할 놀이를 수행하는 장르만이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은 어쩌면 게임이 끝나고 시간이 지난 뒤에야 느낄 수 있는 추억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아스트라나르에서의 공성전이 생각나고, 크로스로드에서 음식을 나눠준 주술사가 생각나고, 친구와 그냥 낚싯대나 드리우고 떠들던 생각이 나고, 소금 평원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생각이 나는 것이 그 생각의 근거이다.

▲ 게임이 제공한 가상 세계가 추억으로 남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지만, 실제로 추억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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