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위기론은 언제나 ‘위기’를 과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기론 자체가 언제나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 아닌 땐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순 없는 노릇이다. 지상파 방송이 위기다. 저널리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됐다는 말은 오래됐다. 시사프로그램의 예리함 역시 둔탁해졌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이유라도 분명하다. 정권에 의한 순치, 낙하산 사장을 탓하면 된다.

하지만 콘텐츠에 이르면 좀 얘기가 달라진다. 지상파 경영진들은 “한류 콘텐츠를 지상파가 선도”하고 있지만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제작비가 턱없이 부족”할 뿐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지상파 방송의 콘텐츠들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잃어가고 있다. 의미성과 화제성 모두 부진하고, 과거와 같은 파괴력은 이제 그들 스스로도 기대하지 않는 상황이다. 타 장르에 대한 우월성 역시 상실해가고 있다.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 작가가 “지상파는 ‘러브라인 안 나오면 안 된다’라고 해 케이블로 갔다”고 말하는 것은 단적인 예이다.

공공플랫폼의 역할은 방기하면서 PP화 되고 있지만, 여전히 ‘슈퍼갑’ 시절의 양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지상파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미디어스>가 4회에 걸쳐 짚어본다.

[A씨의 TV시청기]분당에 사는 30대 중반 A씨는 현재 육아휴직으로 집에서 쉬고 있다. 그는 평소 TV프로그램을 즐겨보지 않는 편이지만 집에 있게 되면서 부쩍 TV를 자주 보게 됐다. 그가 즐겨보는 프로그램은 월요일 JTBC <비정상회담>과 금요일과 토요일 오후8시 30분 tvN <미생>, 금요일 8시30분 tvN <삼시세끼>, 금요일 10시 JTBC <마녀사냥>, 토요일 10시 OCN <나쁜녀석들>, 토요일 11시 JTBC <히든싱어> 등이다. 요즘에는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JTBC <뉴스룸>을 종종 보기도 한다. A씨는 요즘 일요일 KBS <해피선데이> 오후4시 30분 ‘슈퍼맨이 돌아왔다’ 정도가 아니면 지상파 쪽으로 채널을 돌릴 일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지상파 채널을 일부러 외면하는 건 아닌데 요즘 볼 게 없는 건 사실”이라고 이야기한다.

케이블 드라마·예능의 ‘전성시대’

tvN <미생>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어딜 가나 <미생>에 관한 얘기가 한 토막씩은 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순 시청률만 보면, 꼭 이런 반응이 적절한가 의문이 든다. 케이블 콘텐츠 치고는 물론 높다. <미생>의 시청률은 수도권에서 8.2%(TNmS, 유료매체 가입가구 기준)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미생>의 인기는 시청률로만 측정되지 않는다. <미생>은 한 회가 끝나면 생중계 수준으로 후속 기사 따라 붙는다. 포털에 관련 기사를 ‘줄 세우기’ 시킬 수 있는 가의 여부는 프로그램의 인기도를 측정하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준에서 <미생은> 가히 ‘올 해의 드라마’라고 할 만하다.

<미생>은 지난 주 ‘박 과장 비리 사건’으로 중단됐던 요르단 사업을 전개하면서 직장 내 균열을 세밀화로 묘사해 주목을 받았다. 최고 시청률을 또 갱신했다. 지상파 방송에선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리얼한 묘사였다. 러브라인 대신 현실성을 택한 드라마의 전략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기존에도 기업 드라마는 많았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미생>을 전혀 다른, 지금껏 없었던 기업 드라마로 인지하고 있다. 장그래가 회사에 적응하는 모습이 주를 이룬 전반부의 ‘워밍업’이 끝나고 본격적인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는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몰입도와 시청률은 더욱 가파를 것이다.

▲ tvN '미생'과 '삼시세끼' 포스터

<미생> 만큼은 아니지만 OCN의 <나쁜녀석들>도 화제다. 이 드라마는 특히 ‘찾아 본다’는 반응이 많다. 방송 광고주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적극적인 시청층’이다. 후반부 들어 덜해졌단 평가도 있지만 <나쁜 녀석들>은 미드를 방불케하는 꼼꼼한 서사 구조와 속도감 있는 전개로 마니아층의 지지를 샀다. 지상파 드라마에선 볼 수 없는 설정 자체도 매력적이란 평이 많았다. 지상파에서 할 수 없는 드라마, 한국 드라마의 경계를 묻는 드라마. 시청률 여부와 상관없이 의미가 있다.

예능 프로그램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나영석 PD가 연출을 맡은 tvN <삼시세끼>의 인기는 놀라울 정도다. 이 프로그램의 성공을 두고 방송계에선 대중의 예능 감각이 변했는가를 논하고 있을 정도다. 주인공인 이서진 조차 “이 프로그램은 곧 망할 것”이라고 했지만 상황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JTBC <비정상회담> 역시 마찬가지다. <비정상회담>은 최근 ‘기미가요’ 사용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는데, 그럴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역설적으로 이 프로그램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외국인을 토크의 전면에 내세워 사회문화적 이슈들까지를 포괄하는 포맷은 이제 지상파로 흡수될 정도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JTBC의 또 다른 프로그램 <히든싱어> 역시 뜨겁다. 8년 전 발매된 이승환의 9집 수록곡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가 <히든싱어>에 등장한 이후 음원 역주행으로 KBS <뮤직뱅크>에서 8위까지 올랐다는 점은 예능 프로그램의 역학 관계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야 한다.

이 밖에도 M·net <슈퍼스타K>, JTBC <마녀사냥>, tvN <코미디빅리스>, tvN <한식대첩>, tvN <더 지니어스> 등이 고정적인 시청층을 넘어 대중의 리스트에 자리하고 있는 비지상파 콘텐츠들이다. 올해의 대세가 된 ‘의리’ 이국주는 지상파 바깥에서 인기를 모았고, 개콘의 구멤버에서 차세대 예능 주자로 위상을 바꾼 장동민 역시 케이블에서 시작된 돌풍이 지상파로 넘어간 케이스다. 이 둘 뿐만 아니라, 이제 그런 케이스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케이블과 지상파의 관계는 달라졌다.

더 이상 케이블 방송이 지상파의 동시간대 시청률을 앞섰다는 것이 의미 있는 뉴스가 아닌 시대. 지상파 방송은 무얼 하고 있는 것 일까. 정파가 되는 것이 아니고 지상파에도 나름의 전략, 전통의 강자들은 군림 할 텐데 왜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물론, 지상파의 일일 평균 시청률은 4~7%대로 케이블에 앞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흐름’이다. 지상파 방송프로그램은 더 이상 ‘화제’를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고, 뚜렷한 ‘타킷 오디언스’를 설정하지 못한 채 표류하는 프로그램이 여럿 그리고 자주 보인다. 한 방송계 관계자는 “<무한도전>을 제외하면, 지상파 예능은 내놓을 게 없다. 안전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변주에서 벌써 10년 째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상파 프로그램의 현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상파, ‘무한도전’말고 뭐가 더 있나?…지상파의 몰락

실제로 그렇다. 지상파 프로그램 가운데 화제성을 말할 수 있는 건 막장 드라마를 제외하면, <무한도전> 정도이다. ‘왜 지상파 프로그램은 안 보냐?’는 물음에 분당에 사는 A씨는 “일부러 안보는 건 아니다. 최근 MBC <왔다! 장보리>도 봤고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도 보고 있다”면서 “하지만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재밌는 프로그램을 보고 싶은데 지상파 드라마와 예능은 거의 진부하다. 대스타를 앞세우거나 여전히 사랑타령에 불륜에 빠져 있고 예능은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못 벗어난다. 그런 측면에서 케이블 방송프로그램은 신선하다”고 말했다. 전문가의 평가와 시청자의 시선에 차이가 없을 만큼 지상파 방송이 고여 있단 얘기다. 그렇다면, 왜 지상파는 ‘식상함’과 ‘진부함’의 상징이 되어 시청자의 욕구를 수용하지 못하는 프로그램만 내놓고 있는 것일까?

지상파의 진부함은 아침드라마와 일일드라마에서 최대화된다. ‘막장’ 드라마는 지상파가 창조해낸 장르라는 궤변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막장’ 드라마에는 공식이 있다. 주인공은 꼭 4명이 등장한다. 여 주인공은 착하고 순종적이며 불평불만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언제나) 그에게는 남편이 있지만 외도, 학대, 이혼으로 파탄난다.(강렬하게) 그리고 여 주인공에 대비되는 여성이 나타난다. 그 여성은 겉은 화려하지만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이다. 마지막 메인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그는 여 주인공에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연하남이다.(대체로)

▲ KBS '뻐꾸기둥지'와 SBS '피노키오' 포스터

현재 MBC 아침드라마 <폭풍의 계절>과 SBS <청담동스캔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여기에서 벗어남이 없다. 저녁 일일드라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방송 관계자는 “이 문법에 협찬을 보태고 비틀어 수백회의 드라마를 제작하는 것이 지상파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엇비슷한 구도이나 보니 경쟁은 더 자극적인 설정 싸움이 된다. 최근, 종영한 KBS <뻐꾸기둥지>는 복수를 위해 한 여성이 대리모를 자처하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MBC 일일드라마 <압구정백야>는 ‘막장’이라고 평가받아온 <왕꽃선녀님>, <신기생뎐>, <오로라공주>를 집필한 임성한 작가를 불러 대놓고 설계한 ‘막장의 막장’이다. 실패하더라도 고만고만한 시청률을 나눠먹을 수 있고, 어쩌다 운이 좋으면 대박으로 이어지는 ‘막장’ 드라마의 장르화는 지상파 방송의 오늘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물론, 주중드라마는 상대적으로 선택의 폭은 넓다. 지상파 월화드라마 편성은 KBS <내일도 칸타빌레>, MBC <오만과 편견>, SBS <비밀의 문>으로 제각각 다른 장르와 배우들에 연령대도 비교적 다양하다. 수목드라마 편성도 마찬가지이다. KBS는 <왕의 얼굴>과 MBC <미스터백>, SBS <피노키오>를 편성하고 있다.하지만 한계도 확실하다. 로맨스다. 사랑 이야기만큼 보편적인 것도 없겠지만, 너무 뻔하다는 게 문제다. 기자가 나오는 드라마도 사랑, 음악 하는 드라마도 사랑, 어떤 설정이라도 모든 것이 사랑하는 이야기인 지상파 드라마다.

tvN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 작가는 지상파의 ‘로맨스’ 집착이 퇴행의 단서일 수 있음을 고하기도 했다. 그는 ‘미생의 밤’ 행사에서 “지상파에서 찾아오셨던 분들은 앉자마자 하는 이야기가 ‘러브라인 안 나오면 안 됩니다’였다”며 “러브라인이 나오면 그만큼 이야기가 변질된다고 생각해 뉘앙스 정도로만 갔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지상파 관계자들은 포기를 못하더라”라고 말했다. 웹툰 <미생>이 큰 인기를 누린 가운데, 이를 드라마로 제작하고 싶은 곳이 많았지만 지상파에서 편성되지 못한 이유가 ‘사랑’이 빠져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만일, 지상파에서 러브라인을 배제하고 <미생>을 편성했다고 한다면 현재의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지상파는 그걸 반성은 하고 있을까. 쉽지 않은 이야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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