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조선일보>는 1면 탑 기사 제목을 <민노당 文件에 '先軍사상이 지도이념'>으로 가져가면서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통합진보당의 전신(前身)인 민주노동당이 자신들의 존재를 '(북한의) 선군(先軍) 사상에 기초한 변혁적 전위 조직의 합법 형태'로 규정하고 '선군 정치를 지지하는 활동이 한국 변혁 운동의 첫째 임무'라고 밝힌 내부 문건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정당 해산 심판 사건의 증거로 채택된 사실이 23일 확인됐다. 이 문건은 다음 달 선고를 앞둔 헌재의 통진당 해산 심판에 중요한 판단 자료가 될 전망이다.”

이 기사 내용은 24일 아침 공중파와 종편과 케이블 뉴스채널을 막론하고 재생산되고 있다. 이어서 <조선일보> 기사는 “대전지검 천안지청은 지난 2011년 5월 당시 민노당 간부 주모씨로부터 '주체의 한국 사회 변혁 운동론'이라는 문건을 압수했으며, 법무부는 최근 이 문건을 헌재에 제출해 통진당 해산 심판 사건의 증거로 채택됐다. 이 문건은 통진당 창당 직전인 2011년 당시 민노당 당원 교육용으로 만들어졌으며, 문건을 차량 트렁크에서 압수당한 주씨는 현재 통진당 충남도당 부위원장으로 있다”라고 소개한다.

▲ 24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

그러나 <조선일보>의 논조는 사실을 몇 개 가져다 놓고 거기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추론으로 덧붙이는 식으로 되어 있다. 1면 기사에서 이어지는 10면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법원은 통진당이 강령으로 채택한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이적성(利敵性)을 인정했다”라고 끝난다.

또, <TV조선> 24일 아침뉴스의 한 꼭지를 봐도 “통진당 강령 ‘진보적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하겠다’, 김일성 45년 10월 ‘조선이 나아갈 길은 진보적 민주의주의의 길’, 김정일 90년 12월 ‘진보적 민주주의는 새형의 민주주의’라고 말한 부분과 일치합니다, 통진당이 말하는 이 진보적 민주주의가 결국 북한식 사회주의라는 게 법무부 판단입니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TV조선>은 “통진당 강령이 평화협정,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인데 이것 또한 북한이 주장하는 바와 일치합니다. 이렇게 북한 노선과 이상하리만큼 궤를 같이 하는 통진당에게 창당 이후 무려 160억원의 국가보조금이 지급됐습니다”라고 서술한다.

일단 ‘진보적 민주주의, 평화협정,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북한의 노선과 일치하기 때문에 종북의 증거가 된다고 하는 것은 궤변이다. 2011년의 민주노동당이나 2014년의 통합진보당이 일개 정파(NL 운동권 내지는 경기동부연합)의 정당이란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법무부가 문제 삼은 강령들은 이 정당에 북한 추종세력과 거리가 먼 여러 종류의 좌파 분파들과 연합세력일 때 만들어진 것들이며 북한 노선과의 연결고리도 필연적이지 않다.

▲ 24일자 조선일보 10면 기사

2013년 11월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주최한 '정부의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 긴급토론회'에서 한상희 참여연대 운영위원장(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진보적 민주주의라 하면 1915년 H.Croly가 출판한 'Progressive Democracy'라는 책 제목도 있다. 루즈벨트도 영향을 받은 책으로 알려져 있다. '진보적 민주주의를 위한 미국연구소'라는 이름의 단체도 있다. 김일성이 언젠가 한번 사용했다고 해서 이 단어를 쓰면 북한 추종이란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김종철 변호사는 “민주주의는 보편적 가치인데 북한이 뭐라고 발언했는지가 무엇이 중요한가”라고 되물으면서, “김일성이나 북한이 사용했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사상이나 정치적 견해를 금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북한의 주장을 반대로 하는 게 헌법이고 우리 헌법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황당한 결론이 가능한 논리가 된다”라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나 공안당국의 논리가 그들이 얘기한 바 ‘RO’ 조직원과 ‘민노당 간부 주모씨’의 행위를 곧잘 과거 민주노동당이나 현 통합진보당의 정체성을 확정하는 행위로 몰고 가는 것도 큰 문제다. 그들은 지시체계가 분명한 국가정보원 등 공적 조직의 선거개입 및 정치개입 의혹에 대해서는 ‘개인적 일탈’이라 칭해왔으면서, 권력구조가 제법 복잡한 정당에 대해선 거리낌없이 ‘개인적 일탈’이 아닌 ‘한통속’으로 몰고 가곤 한다.

물론 경기동부연합이나 범자주파 운동세력이 민주노동당이나 통합진보당을 중심으로 사고하지 않았다는 정황증거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또, 통합진보당은 ‘이석기 녹취록’의 내용 상당수가 사실로 드러난 것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석기 등의 발언에 대해 통합진보당은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런 면에서 통합진보당의 대응 측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 24일자 조선일보 10면 기사

그러나 법 논리로 특정 인사들과 정당의 관계를 규명할 때는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어야 한다. 법무부의 주장은 이런 면에서 많이 미진하다. 한상희 참여연대 운영위원장은 지난 토론회에서 “통진당이 ‘RO’의 외곽단체임을 입증해야 법무부 주장이 최소한이라도 성립한다”라면서 “스페인이 바스크 정당이 위헌정당임을 입증하려 했을 때는 그 부분에 치중했다. 테러단체와 바스크 정당의 연계성을 규명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데 우리 법무부가 만든 논리를 보면 이 부분은 완전히 비어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심지어 <조선일보>는 법무부의 무리한 논변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엄연히 경기동부연합이나 범자주파 운동세력 외 다른 진보적 분파들도 연합해서 이루어낸 21세기 한국 사회의 진보정당 운동의 정체성 자체를 부인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지금이 어떤 때인가. 23일 북한 국방위원회가 유엔의 대북 인권 결의안 채택에 관련한 성명에서 “이 땅에 핵전쟁이 터지는 경우 과연 청와대가 안전하리라고 생각하는가”라며 우리 정부를 비난한 상황이다. 국방위가 “인권 결의를 전면 거부, 전면 배격한다”면서 “미증유의 초강경 대응 전에 진입할 것”이라며 핵실험 가능성을 시사한 때다. 북한은 또 우리 군의 호국훈련에 맞서 최근 공기 부양정 10여척을 동원 한 대규모 상륙·침투 훈련을 벌였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직접 훈련을 참관했다.

이 상황에서 한국의 정치권은 유엔의 대북 인권 결의안 채택에 발맞춰 북한 인권법 상정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24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번에 10년 동안 묵혀왔던 북한인권법을 반드시 통과시켜 인권보호에 대한 단호한 결의를 국회가 보여줘야 한다"며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도 저와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대화에서 북한인권법에 대해 우려를 많이 표명했고, 일부 수정을 통한 북한인권법 처리에 공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인권법이야 정치권에서 만들 수도 있는 사안이다. 인권에 대한 압박을 하면서 교류협력을 할 수도 있었는데 지난 세월 야권이 지나치게 조심한 측면도 있다고 본다. 문제는 북한 인권법을 반대하는 인사들을 ‘종북’으로 몰아가는 그 시선이다. 같은 날 <조선일보>는 <與野, 北인권법 합의 못 하면 북 협박에 굴복한 꼴 된다>란 제목의 사설에서 “우리 국회가 이번에도 국제사회의 대북 인권 공조(共助)에서 다른 행동을 취할 경우 대한민국 전체가 세계의 비난과 조롱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북의 협박에 굴복한 것처럼 비칠 위험도 있다. 지금 대한민국 국회는 북한 인권 문제에서 역사의 죄인(罪人)으로 기록될 것이냐, 아니면 북한 정권의 변화를 촉구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줄 것이냐 하는 기로에 서 있다”라고 주장한다. 외교전략의 문제를 윤리의 문제로 비판하면 시야가 협소해진다.

▲ 24일자 조선일보 3면 기사

다행히 유엔 북한 인권 결의안 이후의 험악한 정세에도 불구하고 나진·하산 프로젝트 등 러시아를 매개로 한 남·북 경제협력사업은 순항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24일 통일부에 따르면 코레일·포스코·현대상선 등 국내 3개기업 컨소시엄 관계자 12명과 통일부 당국자 1명로 구성된 점검단은 이날 ‘나진·하산프로젝트’ 시범운송사업을 현지에서 점검하기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하산역을 거쳐 북한 나진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마침 같은 날 <한겨레>는 <‘이희호 방북’과 ‘나진 경협’, 남북관계 전환 계기로>란 제목의 사설에서 “오랜 준비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나진-하산 프로젝트 시범운송 사업은 남-북-러 경협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캔 유연탄 4만500톤(400만달러어치)이 철도로 하산을 거쳐 24일 북한 나진항으로 온 뒤 중국 국적의 배로 옮겨져 29일 밤 경북 포항에 도착하는 내용이다. 이 프로젝트의 주체는 북-러 합작사인 나선콘트란스이며, 정부는 앞으로 이 회사의 러시아 지분 절반 정도를 사들이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세 나라가 모두 혜택을 볼 수 있는 새 경협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이 프로젝트 참여를 두고 5·24 조처의 예외라고 말하는 데서 보듯이 5·24 조처는 이미 현실성을 잃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또 <한겨레> 사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씨의 방북은 남북 당국의 대화 의지를 가늠해볼 좋은 기회다. 이씨는 육로로 평양으로 가 두 곳의 어린이집과 애육원을 방문하기로 지난 21일 남북 관계자 접촉에서 합의한 상태다. 방북이 이뤄지면 이씨가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만날 가능성도 적잖다. 남북 사이 대화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자연스런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남북 당국은 이씨의 방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도록 최대한 협력해야 할 것이다. 방북 시기를 아직 합의하지 못했으나 정세를 너무 의식할 필요는 없다. 이르면 올해 안, 늦어도 내년 초를 넘기지 않는 게 좋겠다”라고 주문했다.

<조선일보>가 국내정치만 쳐다보면서 남북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보지 않는 동안 한국 정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입지는 점점 더 줄어들어 가고 있다. <조선일보> 등의 비합리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의 합리적 대응을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라면, 북‘조선’이 아닌 남쪽의 <‘조선’일보>는 이 문제에 관한 한 한국 사회에 무슨 도움을 주고 있는지 궁금하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