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가을, 전혀 다른 색깔의 대작 드라마 4편이 최근 20~30% 안팎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시청률 경쟁을 벌이고 있다. 월요일과 화요일 밤 10시면 SBS의 <왕과 나>(유동윤 극본, 김재형·손재성 연출)와 MBC의 <이산>(김이영 극본, 이병훈·김근홍 연출)이 안방극장을 장식한다. 그리고 수요일과 목요일 밤 10시에는 MBC와 <태왕사신기>(송지나·박경수 극본, 김종학·윤상호 연출)와 SBS의 <로비스트>(주찬옥·최완규 극본, 이현직·부성철 연출)가 화려한 영상미를 앞세워 시청자를 유혹한다.

▲ MBC '태왕사신기' ⓒMBC
조선의 왕을 보필하면서 절대 권력의 중심에 자리했던 환관 '김처선'의 운명적인 사랑과 내시의 처세술이 돋보이는 <왕과 나>, 조선왕조의 부흥을 이끌어낸 '정조대왕'의 인간적인 면모를 애정 구도 속에 보여주는 <이산>은 물론, 만주벌판을 호령했던 한민족의 영웅 '광개토대왕'의 기개와 낭만적인 사랑이 살아 있는 <태왕사신기>와 냉엄한 국제 정치 무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무기 로비스트들의 화려하면서도 냉혹한 삶을 다룬 <로비스트>까지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소재와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이 펼치는 이야기의 재미가 만만치 않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야기가 전개되면 될 수록 대작 드라마들을 골라보는 재미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시간적·공간적 배경이 전혀 다른, 그래서 서로 다른 색깔을 자랑하는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어른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극적 구조의 유사성이 결정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다.

▲ SBS '로비스트' ⓒSBS
<왕과 나>는 도선사에 불공을 드리러 갔던 '소화(폐비윤씨)'가 독사에 물린 것을 '천동(김처선)'이 구해준 일을 계기로 오누이처럼 지내는 천동과 소화가 사가(私家)에 머물던 왕실 종친 '자을산군(성종)'과 함께 어울리면서 세 사람만의 추억을 쌓아가는 것으로 도입부가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김처선을 중심으로 성종과 폐비 윤씨의 엇갈린 사랑의 인연을 설명하기 위한 설정이다.

<이산>의 도입부 역시 '정조(이산)'와 후궁 '의빈 성씨(성송연)', 그리고 정조의 호위무사 '박대수'가 어린 시절 궁에서 만나 인연을 맺는 장면에 집중되어 있다. 세손 이산은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만나기 위해 몰래 시민당으로 가다 생각시 성송연과 내시가 되기 위해 삼촌을 따라 입궐한 박대수를 만나 운명적인 만남을 갖고 동무의 인연을 맺는다. 어른이 된 세손 이산이 세손궁의 내시 '남사초'를 시켜 성송연과 박대수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도화서 다모 성송연과 무예를 연마하는 박대수가 궁에 들어가 세손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도입부에서 보여준, 평생을 함께 하기로 했던 어린 시절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 MBC '이산' ⓒMBC
<태왕사신기>의 도입부 역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태백산에 내려온 '환웅'과 호족으로 불의 신녀인 '가진', 그리고 웅족으로 불의 힘을 지닌 주작 '새오'가 2000년 후에 각기 고구려 태자 '담덕', 화천회 신녀 '서기하', 거믈촌 현고의 제자 '수지니'로 환생하여 운명적인 인연을 맺는 과정을 보여준다. 어른으로 성장한 이후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도구로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로비스트> 역시 등장인물들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엇갈린 인연의 고리를 풀기 위해 도입부를 이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장식한다. '김주호(해리)'가 군인 아버지를 따라 해안가 마을의 학교로 전학 갔다가 그 곳에서 '유소영(마리아)'과 인연을 맺지만,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이들의 삶을 뿌리째 흔든다. 김주호의 아버지는 무장공비 손에 죽게 되고, 유소영의 아버지는 무장공비가 타고 온 잠수함을 최초로 발견하고 신고했다가 군 수뇌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미국 이민을 갔다가 강도의 총에 죽기 때문이다. 도입부에서 제시된 '김주호'와 '유소영'의 어린 시절의 아픈 상처는 '해리'와 '마리아'로 각기 달리 성장한 주인공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며 극적 상황을 만들어간다.

이처럼 4편의 대작 드라마는 전혀 다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극적 구조의 측면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어른이 된 지금 현재의 삶을 지배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물론 이 같은 극적 구조는 <모래시계>(송지나 극본, 김종학 연출)와 <가을동화>(오수연 극본, 윤석호 연출)에서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상당히 신선한 자극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이후의 운명적인 만남 혹은 인연의 안타까움을 강조하기 위해 공식처럼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것은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를 정형화시킨다. 이 때문에 색다른 소재와 긴장감 넘치는 극적 구성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색깔이 비슷해지는 것이다.

▲ SBS '왕과 나' ⓒSBS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을 비롯하여, 어떤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서사시와 같은 대작 드라마가 주인공의 출생이나 어린 시절의 이야기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구조'는 '등장인물'만큼 중요한 예술적 표현 형식이다. 만약 극적 구조가 하나의 공식으로 굳어진다면, 극적 재미는 그만큼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 어떤 예술 작품도 공식으로 설명되는 순간, 예술로서의 매력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예술이다.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경계해야 하는 것은 자기 복제이다. 인물의 유사성, 구조의 유사성을 되풀이하는 것은 예술로서의 생명력을 잃는 것이며 이것은 곧 시청자의 외면으로 이어지면서 그토록 오매불망하는 시청률을 깎아먹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드라마의 도입부를 '해외 로케이션 장면'으로 장식하던 경향이 유행처럼 지나간 자리에 찾아온 '어린 시절' 장면 설정이 공식으로 굳어지면서 영상예술로서의 드라마에 독약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윤석진 교수는 2000년 여름 한양대에서 <1960년대 멜로드라마 연구-연극·방송극·영화를 중심으로>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2004년 가을 <시사저널>에 '캔디렐라 따라 웃고 웃는다'를 발표하면서 드라마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김삼순과 장준혁의 드라마공방전> <한국 멜로드라마의 근대적 상상력> <한국 대중서사, 그 끊임없는 유혹> 등의 저서와 <디지털 시대, 스토리텔러로서의 TV드라마 시론> <극작가 한운사의 방송극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충남대 국문과에서 드라마 관련 전공 과목을 강의하면서 한국 드라마의 영상미학적 특징에 대해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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