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이(강소라 분)와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직원이 쓰러졌다. 세 번째 임신으로 인한 과로란다. 그러자 같은 부서의 부장은 덕담은커녕 그로 인해 손실된 인원만 안타까워하며, 도대체 몇 번째 임신이냐며 볼멘소리를 한다. 이래서 여자들은 문제라고 툴툴거리고 부하 직원은 상사 말에 맞장구를 친다. 회사에서 가장 촉망받는 여자 직원 선차장(신은정 분)은 가사, 육아와 일의 병행에 짓눌리다, 후배 직원에서 말한다. '일 계속하고 싶으면 결혼하지마!'라고.

10월 15일 방영된 <미생>은 직장 여성들의 서로 다른, 하지만 결국은 여성으로서 봉착하게 되는 어려움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사법 연수원생 중 여성 비율이 2014년에 들어 40%를 넘어서는 등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들의 진출과 활약은 더 이상 새로운 이슈가 되지 않는 세상이다. 그녀들을 제약했던 '유리천장'은 그녀들의 독보적인 활약에 맥을 못 추는 기세인 듯하다. 심지어 교사직의 경우는 이제 남성 성비 보존을 운운할 처지에 놓여있다.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수치로 나타나는 여성의 성취와 다르게, 그 속에서 맞닥뜨리는 여성들의 현실은 <미생>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오죽하면 아들을 낳아 기르는 엄마들은 아들의 행복한 결혼을 꿈꾸지만, 딸을 낳아 기르는 엄마들은 결혼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딸들의 미래를 꿈꾼다는 우스개가 있을까?

일찍이 여성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여성의 신비]에서 베티프리단은 '아내, 어머니를 칭송하는 여성의 신비 문화가 여성을 가정에 머물며 아이나 키우며 물건이나 사대는 '주부'라는 직위에 머무르게 한다'고 성토했다. 1963년 당시 혁명적이었던 이 책이 모색해낸 이상적인 대안은 '가정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직장과 집안일을 성공적으로 병행하는 슈퍼우먼'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여성들은 '신비로운 여성'에서 자유로워졌을까? 베티 프리단은 여성들이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지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했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현재 대한민국에서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진 다수의 여성들은 맞벌이란 짐에 허덕이고 있다. 일과 가사의 병행은 그녀들을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그녀들을 '성공'이란 이름으로 혹사시키고 있을 뿐이다.

10월 30일 방영된 <미생>에서 아이를 맡기는 문제로 실랑이하는 선차장의 마음을, 역시나 아내가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게 된 오과장(이성민 분)은 헤아린다. 육아가 문제가 되면 언제가 그건 여자의 몫이라는 것을, 회사에서 차장이란 직위에 여자가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감내해야 하는지, 차장이란 직위 정도가 되면 그만큼 요구되는 것들이 많은지는 여자, 엄마, 아내라는 이름 앞에서는 무력해진다는 것을.

그래서 여자들은 늘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일과 결혼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 아이를 낳은 뒤 계속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아이를 키울 것인가 말 것인가.

베티 프리단이 '여성의 신비'를 외치며 가정 밖으로 나올 것을 외치던 1963년에는 '행복한 전업주부'가 판타지였다면, 2014년 현실은 일과 가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슈퍼맘'이 여자들을 들들 볶는다. 둘 다 성공할 수 있다고, 둘 다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다큐보다 더 다큐 같은 <미생>은 말한다. 인턴사원 중 가장 촉망받던 안영이는 처음 배치 받은 부서에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말할 수 없는 수모를 겪고, 선배 직원은 맘 놓고 아이를 가질 수 없다. 간부직이 된 선차장은 여전히 아이 때문에 남편과 실랑이를 벌이고,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한다. 늦은 밤 집에 돌아온 그녀에겐 밀린 집안일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녀의 아이가 그린 엄마는 얼굴이 없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향해 뒤돌아서 한껏 포옹을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에게 엄마의 얼굴을 보여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미생'인 그녀들의 완생은 이 사회에서 여전히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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