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생존 문제를 다룬 이야기들이 영화나 웹툰 같은 대중문화장르의 외피를 입고 나오고 있다. 주목할 정도로 다수의 작품들이 등장했고, 대중의 인기를 구가했다. 얕게는 사무계약직 노동자의 분투를 다룬 <미생>부터 깊게는 대형마트 계약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과 점거 파업 과정을 다룬 <카트>까지 스펙트럼 역시 다양하다.

물론 직장인의 고군분투하는 일상을 다룬 드라마들은 이전에도 여럿 존재했다. 그러나 최근의 작품들은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정리해고가 만연해지는 현실의 냉혹한 토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내러티브들과는 상이하다.

지난해 폭발적인 열광 속에서 연재됐던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은 얼마 전부터 TV드라마로 리메이크되어 인기리에 방영을 시작했다. 든든한 학벌도, 빽도 없는 화이트칼라 노동자 장그래가 고군분투하며 난관들을 뚫고 나아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다룬다. 우스꽝스러운 선악구도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밋빛 해피엔딩이 펼쳐지는 여느 오피스드라마들보다는 훨씬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 tvN 드라마 <미생>. (사진=<미생> 페이스북)

미생 : 아직 완전하게 살아 있지 못한 자의 고군분투

<미생>의 미덕은 여느 오피스드라마처럼 정글과 같은 직장생활의 험난함을 하나하나 극복해나가는 좌충우돌 청년의 모험극으로 다루면서도 우리 사회의 냉정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초반부 장그래가 상사인 오과장의 안내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천막농성장에 들리는 장면은 반영 자체로 뭇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내기도 했다. 계약직 사무노동자 장그래의 고군분투 역시 장밋빛 해피엔딩이 아닌 냉정한 현실의 계약만료와 함께 ‘해고’되는 것으로 끝난다.

<미생>의 다른 매력은 작품이 지닌 스토리와 메시지도 탁월하지만 매 회마다 맨 위에 기재된 1989년 제1회 응씨배 조훈현(흑)과 녠 웨이핑(백) 결승대국 기보의 한 수 한 수와 스토리가 기묘하게 조우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조훈현의 43수는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모험적인 수다.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아무리 고수라고 한들 저러한 상황에서 절대 저렇게 두지 않는다. 그런데 조훈현은 판의 곳곳이 그리 탄탄하지 않은 불안정한 상황에서 중앙 돌 두 점에 우변쪽으로 힘을 실어주면서 중앙도 살리고 우변도 지키는 실리적인 선택하기보다, 한 발 더 적진으로 뛰어드는 위험한 수를 선택했다. 수가 너무 기묘해서 기보를 한참 들여다봤다.

<미생> 43화는 조훈현의 이 모험적인 한 수에 걸맞게 ‘원인터내셔널’ 과장의 승부사적이고 (여전히) 청년다운 기질을 보어주는 대목이다. “승진이나 개인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고 일 자체의 멋과 맛에 취한 남자…”라고 장그래가 묘사하는 말이 조훈현의 1989년 응씨배 결승대국 43수와도 잘 어울린다. 현실의 우리에게도 이런 “캬~”하고 감탄사 나오는 한 수 한 수들로 대국에 활기와 긴장을 불어넣는다면 어떨까? 사람들이 <미생>에 열광하는 이유는 권태로운 우리의 일상에는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 꿈틀거리는 지략과 전투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약속 : 어느 의지주의적 휴머니스트의 싸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어난 백혈병, 루게릭병 등 온갖 희귀질병에 대한 산재 문제와 그에 맞선 다윗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역시 올해 개봉한 ‘노동자’ 영화 중 하나이다. 영화는 현실에서 벌어진 싸움의 지난한 과정을 충실하게 다루면서도, 제작하고 배급하는 과정 그 자체도 자본에 맞선 하나의 ‘전투’를 수행해야 했다. 좀처럼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그래서 더 적은 예산으로 효율을 극대화해 영화를 만들어가면서 드라마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또 하나의 약속>이 모델로 삼는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영화 속 주인공 상구는 지극히 인간적인, 인간의 세계가 여전히 ‘아름답다’고 믿는 인간승리의 의지적 주체이다. 그는 끔찍한 절망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온갖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거대한 적에 맞서 싸워나간다. 만약 누군가 그람시가 인용한 소렐의 말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를 가장 처절하게 따르고 있는 이가 누구냐 묻는다면, 바로 ‘상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게다. 이는 분명 오늘날 전열에 서는 ‘용기’를 품는 것조차 머뭇거리는 우리들에게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 그 다음의 문제, 현실적 가능성과 구체적 전술의 문제는 이 영화가 다룰 대상은 아니다.

<또 하나의 약속>은 <미생>과 다르게 골리앗과 같은 적이 존재하는 명확한 선악구도를 지닌 영화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성공할 확률만큼 실패할 확률도 높다. 그렇기에 영화는 지극히도 휴머니즘적으로 경도될 수밖에 없었을 게다. 영화가 다루고자 했던 이야기의 뼈대 자체가 그러했다. 그 때문에 이 믿기 어려운 ‘실화’의 주역들에게 동일시되지 못한다면 이 영화의 매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의 믿기 어려운 역경에 동참해보리라는 열린 마음으로 이 영화와 함께 해야 이 영화의 진정한 메시지에 다가갈 수 있다.

▲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중. (사진=포털사이트 다음 영화정보)

카트 : 아무것도 몰랐던 이들의 ‘급진적인 싸움’

2014년의 맨 앞에 <또 하나의 약속>이 있었다면 올해의 마지막은 매끄럽게 잘 만들어진, 그러면서도 노동자운동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카트>가 장식할 것으로 보인다. 오는 11월13일 영화 <카트>가 전태일 열사 기일을 맞춰 전국에서 개봉된다. 앞서 부산국제영화제와 몇번의 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바 있는 <카트>는 지난 2007년 이랜드-홈에버 대형마트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다루는 본격 '파업 영화'다. 대다수가 여성이면서 비정규직인 노동자들이 ‘계약해지’라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매장점거'라는 극강의 투쟁을 벌이는 드라마틱한 전개를 이음새가 훌륭한 이야기로 만들어냈다.

<카트>는 대중에게 유통되는 상업영화임에도 높은 수위의 정치성, 오늘날 노동자가 자신의 삶을 지키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정치가 이야기의 끈끈한 매듭과 제각각 생동하는 캐릭터들에 의해 어색하지도, 거북스럽지도 않게 채색되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카트>는 정치적인 것이 강렬해지면 대중성을 상실하기 마련이라는, 그래서 지난 시기 정치적 사건들을 소재로 삼는 몇몇 정치영화들이 범했던 반-정치의 오류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선다. 노동권의 문제가 몇몇 혁명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하는 것이다. 역사 속의 한 사건이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행동요령 혹은 교훈이 되어 남겨진다.

영화 <카트>의 주인공인 ‘더 마트’의 노동자들은 처음에 서로 친밀하지 않다. 그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세대별로, 직종별로, 남성과 여성으로, 살아남은 자와 해고된 자로 갈라져있고 그 때문에 극심한 갈등을 겪기도 한다. 이런 차이는 이들이 계약직을 전원 파견으로 돌린다는 낭떠러지 상황이 오기까지 계급적인 단결을 저해하는 조건으로 작용하고, 노조를 조직하고 파업을 시작한 이후에도 정규직-비정규직의 갈등은 현저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둘 사이의 갈등을 주되게 다루면서, 가족의 생계마저 떠맡게 된 여성-노동자라서 겪는 갈등을 드러낸다. 가사와 육아, 생계까지 도맡는 기혼 여성노동자들의 이중고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드라마와 캐릭터를 더 강렬하게 조형한다. 가장 현실적인 것이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카트>에는 청소년 아르바이트 노동의 현장이 ‘디오’(엑소)의 썩 괜찮은 연기를 통해 서브플롯으로 등장하는데, 이런 풍성한 내러티브는 영화를 더 탄탄하게 만든다. 이런 점이 평이한 플롯으로 구성된 <또 하나의 약속>과의 차이라 할 수 있겠다.

▲ 영화 카트와 웹툰 송곳의 실제 현장. 2007년 여름 이랜드-뉴코아 비정규직 투쟁.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최정기 조직차장)

송곳 : 어떻게 조직하고 싸울 것인가

그런가 하면 <송곳>은 보다 진일보한, 전쟁터를 그린다. <미생>이 지극히 개별화된 주체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또 성장해나가는 정글 같은 일터를 무대로 한다면, <송곳>의 시선은 그런 현실의 냉혹함 속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던 ‘송곳’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싸워왔는가, 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해 주목한다. <미생>에서 ‘노동자운동’이 스쳐 지나가는 한 풍경이었다면, <송곳>에서는 전면부로 등장해 테마가 되고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요컨대 <미생>이 노동이 마주한 ‘정치적 현실’을 스케치한다면, <송곳>은 실제로 존재했던 다양하고 스펙타클한 이야기를 끌어와 노동의 문제 자체를 정치화한다.

이런 점은 작가로서는 모험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극화된 이야기의 현실반영이 크면 클수록 독자가 느끼는 피로감이나 불편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곳>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실제 현장에서 존재했던, 취재로부터 수확된 이야기들을 잘 조형하고 구조화해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이러한 이야기를 절실히 목 말라하는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송곳>의 주요한 독자들 중 하나인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의 많은 현장 조합원들은 <송곳>이 그려내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라고 말하거나, “현장에서 매일매일 지긋지긋하게 싸워야 하는 우리에게 용기를 줘서 너무 고맙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노동자운동의 한복판에서 싸웠던 주역들로부터 수집된 이야기가 ‘웹툰’의 형식을 갖춘 이야기로 조합되어 다시 현장의 주체들에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송곳>은 앞서 소개한 <카트>와 몇몇의 장면들을 공유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더 마트’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해나가는 과정이라든지, 노동조합 결성 후 교섭을 요청했는데도 지속적으로 테이블에 나오지 않는 사측의 빈 자리, 교섭 과정에서 부딪히는 노사간의 대립 등의 모습들은 영화 속 ‘강대리’(김강우 분)와 <송곳>의 ‘이수인’을 대조하면서 모종의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송곳>은 분명 <카트>와 다른 내러티브 구조와 ‘성격’을 갖고 있는데 우선 구조적으로는 구고신 상담소장과 이수인 과장 두 사람을 축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점이 다르다. <카트>가 확실히 ‘해고된’ 여성-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송곳>은 이 싸움의 주체에 남성인 이수인과 구고신을 세워놓았다. <카트>에서 ‘강대리’가 무척이나 감정적인 대처로 인해 어리석게 감옥에 갇히고, 싸움의 한복판에서 사라져버리는 반면 연재가 지속되고 있는 <송곳>에서는 여전히도 전쟁의 중심에 서 있고, 이보다는 더 냉철한 캐릭터로 보인다. 더구나 <송곳>엔 이수인의 감정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전환해주는 구고신이 존재하는데 그는 실제로는 ‘상담자’이지만 자신의 과거로부터 묵혀온 고통과 히스테리를 숨기지 못하는 신경증적 운동가이기도 하다. (실제 노동운동판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존경스러운 활동가들처럼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구고신은 히스테리증의 소유자지만 그만큼 무수한 투쟁을 거친 경험의 화신이다. 그는 자신이 만나는 여러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조직하고 싸울 것인가에 대한 길을 제시하는, 전술에 대한 훌륭한 선생님, 혹은 상담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한다. 한마디씩 툭툭 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후 이야기의 전개에 대한 예고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이야기 속에 적극적인 주체가 되어 이수인과 함께 난관을 극복하는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이런 교리문답식의 이야기 구조가 가능한 것은 <송곳>이 웹툰이라는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이나 영화, 소설 따위의 형식을 띄고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직, 아니 아주 눈꼽만큼도 웹툰이라는 장르의 형식적인 특성에 대해 살펴보지 못했지만, 웹툰이야말로 프로파간다적 성격을 강하게 지닌 대중예술 매체가 아닐지 확인하게 된다. 문학, 혹은 미술이나 음악이 아니라 굳이 웹툰을 통해 이런 이야기들이 분출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미생> 속 장그래의 진지하고 절박한 고군분투 속에서 삶의 용기를 배우고, 또 <또 하나의 약속>의 상구에게서 오래도록 불타오르는 작은 불씨같은 용기를 얻었다. <카트>는 이런 용기를 얻고 자신의 인간다운 삶, 노예가 아닌 노동자로서의 삶을 위해 가장 격렬한 투쟁의 자리로 내몰렸던, “아무것도 몰랐던”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노동권’의 문제를 대중적으로 각인하고 기억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게다. 그리고 모든 일하는 사람들의 교리문답이 된 웹툰 <송곳>에게서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서두의 저 유명한 문구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막장으로 치달아가는 자본주의의 오늘이 배태한 예술 혹은 그냥 ‘이야기’라고 해도 좋은 작품들 사이의 불협화음을 보며 예술과 정치의 충돌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생각해보았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