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29일 시정연설을 하러 국회에 방문했다. 대통령이 지나가야 할 국회 본청 앞에는 넉 달 가까이 농성을 이어오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국회 본청 앞에서 농성 중인 유가족들을 그냥 스쳐지나갔다. 여야 원내지도부와의 만남 후 국회를 나올 때에는 그나마 유가족들에게 눈길을 주었으나 잠깐이었다.

그러나 지상파를 비롯한 방송뉴스에서는 “살려주세요”라고 울먹이는 유가족들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대통령의 모습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MBC와 SBS의 메인뉴스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입장, 퇴장 장면이 없었고 KBS, JTBC, YTN, 뉴스Y 등은 국회를 나올 때의 박근혜 대통령 모습만 내보냈다.

JTBC, 뉴스Y는 피켓 시위 중인 유가족과 그 곁을 지나가는 대통령의 모습이 함께 담겼고, KBS는 “대통령님, 약속하셨잖아요!”라는, YTN에서는 “우리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주세요”라는 유가족의 외침이 등장했다.

▲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KBS, YTN, 뉴스Y, JTBC 보도 화면

세월호 유가족들이 특별법 제정과 문제 해결을 위해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과 대통령이 한 공간에서 잡히는 것은 보도 가치가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유가족들이 대통령을 향해 '절규'하는 장면도 있었다. 그런데 주요 방송사들이 이 화면을 무시했다. 뉴스 가치와 화면의 보도 가치를 고려할 때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다. 관련해 ‘대통령과 세월호 유가족이 함께 찍은 화면을 쓰지 말라’는 청와대 풀기자단의 요청 때문에 해당 화면이 방송되지 않았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YTN노조, “청와대 풀기자단 요청으로 화면 뺀 것인가” 공개질의

전국언론노동조합 YTN지부(지부장 권영희, 이하 YTN노조)는 30일 낸 성명에서 “국회 시정연설을 마치고 돌아가는 과정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던 세월호 유족들과 마주쳤지만 이를 외면한 채 떠나면서 유족들과 야당의 비판을 받았다”며 “현장에 나가 있던 YTN 취재기자가 이 상황을 대통령 시정연설 중계 원고 마지막 질문 답변으로 기사를 작성했지만 데스킹 과정에서 삭제됐다”고 밝혔다.

YTN노조는 “당시 상황을 담은 화면이 들어와 있었지만 영상편집부 데스크가 청와대 풀기자단의 요청이라며 대통령과 세월호 유가족이 함께 찍힌 화면을 쓰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고 주장했다. 청와대 출입기자는 출입기자, 상근기자, 풀기자 3종류로 나뉜다. 대변인실 허가를 받아 춘추관에 상주하는 상근기자 가운데, 대통령 순방 등의 취재에 동행할 수 있고 대통령과 청와대 취재 관련 영상, 글을 공유하는 기자를 이르는 말이 ‘풀기자’다.

YTN노조는 정치부 국회팀 담당 데스크에게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지나친 상황에 대한 중계기사가 방송되지 않은 이유’를, 영상편집부에는 ‘청와대 풀기자단의 요청이라는 이유만으로 핵심 화면을 쓰지 말 것을 지시한 이유’와 ‘청와대 풀기자단’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밝혀달라고 요구했다.

보도국장에게는 ‘공정하고 정확한 보도를 통해 시청률을 올리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보도하지 않고 기사를 삭제한 행위가 옳다고 생각되는지 보도국장으로서의 입장’과 ‘YTN 영상편집부가 자체적 생각과 판단보다 풀기자단 요청에 따라 방송 화면을 결정하는 것이 온당한 것인지 보도 책임자로서의 입장’을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YTN노조는 “답변이 없거나 해명이 뚜렷하지 않다면 이는 YTN이 대통령만을 위해 사실을 감추고 왜곡하는, 언론사로서의 자격을 상실케 하는 행태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작업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YTN 보도국은 노조의 공개 질의에 아직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 29일 시정연설을 마치고 돌아가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 (사진=YTN뉴스 캡처)

화면 빼달라는 청와대의 요청 있었던 것으로… "정확한 설명 곤란하다"

YTN의 성명 내용을 바탕으로 청와대 풀기자단에 취재한 내용을 종합하면 청와대 쪽에서 ‘대통령과 유가족이 한 화면에 잡힌 모습’을 쓰지 말아 달라는 요청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출입기자단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 요청을 기자단이 받아 각 사에 전달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청와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엠바고를 요청한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몇몇 기자들이 (농성하는 유가족을 외면하는 대통령 모습을 담은) 앵글을 찍자, 그걸 보고 경호실 관계자가 현장에서 ‘이 사진은 안 썼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어떤 형태가 됐건, 청와대 측에서 언론사에 '화면을 쓰지 말아줄 것'을 요청했고, 이를 언론들이 수용했단 얘기다.

이에 대해 과거 풀기자단에 속해 있던 또 다른 기자는 “화면을 검수해 보낼 때, 원본을 안 보낼 수도 있다. 보냈어도 (방송사의) 각 반 반장들이 영상 편집 담당자에게 ‘이 화면은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가 고참급 기자로 구성된 1진 기자들에게 '보도 자제' 협조를 구하고, 이를 각 사별로 알아서 판단해 화면을 뉴스에서 제외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한 확인을 요청하자 청와대 풀기자단에 속한 한 기자는 "정확한 설명은 곤란하다"며 "조금 다르지만..."이라고 말 끝을 흐렸다.

풀기자단은 취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보도할 부분과 안 할 부분을 자의적으로 결정해 합의하는 기구는 아니다. 청와대 풀기자단에 속한 기자들도 “당연히 그런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풀기자단에서는 (그런 지시들이) 관행처럼 돼 있는 면이 있다. 주요 출입처에만 풀단이 구성돼 있는데 각 반 반장들의 결정이 편집부나 영상편집부, 촬영기자 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가족을 스쳐 지나가는 화면이 왜 뉴스에 나가지 않았는지, 보도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청와대로부터 어떤 형태이건 요청이 와서 이를 풀기자단이 혹은 각 사들이 알아서 판단한 것인지, 확인이 필요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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