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9일 국회에서 2015년도 예산안과 국정운영 기조를 설명하는 시정연설을 했다. 박 대통령은 작년 11월 18일 취임 후 첫 시정연설에 이어 두 해 연속으로 직접 국회를 찾아 새해 예산안의 의미를 설명하고 국회의 협조를 당부했다.

청와대는 대통령이 취임 후 두 해 연속 직접 시정연설은 한 것은 헌정사상 처음이라고 설명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국회를 존중하는 행위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박 대통령은 의회를 존중한다는 상투적인 발언은 많이 했지만 사실상 다수 여당인 새누리당을 배후 조종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선 양보한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 국회에 찾아와 연설을 하는 것은 고도의 상징정치라 볼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이 이토록 협조를 구하는데도 무시하는 야당이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하려는 정치적 감각의 발현일 것이다.
▲ 30일자 한겨레 1면 기사
안타깝게도 한국의 보수언론은 이러한 대통령의 상징정치를 비판하기는커녕 그에 적극 동조하는 입장이다. 30일 조간신문들의 편집을 봐도 그 사실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대통령의 시정연설에는 ‘경제’만이 강조됐을 뿐 세월호 참사나 교착에 빠진 남북관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진보언론의 기사 편집은 이 사실에 대한 지적이 많다. 30일자 <한겨레> 1면 기사 제목은 <“경제”만 59번…전작권·세월호는 쏙 뺐다>였다. 부제로는 <박대통령 시정연설…공무원연금 연내처리 강조도 / 여당 내부에서조차 “너무 경제 얘기만 했다” 혹평>이 달렸다. 같은 날 <경향신문> 1면 기사 제목은 <박 대통령 ‘남북’ ‘세월호’는 한마디도 안 했다>로 달렸다. 부제론 <시정연설 경제활성화에만 초점 / 민감한 쟁점은 전혀 언급 없어 / 공무원연금 “연내 처리” 요청도>가 달렸다.
중도언론이라 볼 수 있는 <한국일보>는 같은 날 시정연설 내용 자체보다 향후 정국을 문제삼는 기사편집을 보였다. 1면 기사 제목이 <연말정국, 순항-대치 다시 갈림길에>로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의 회동을 담았다. 중도언론의 시선에서 봐도 박 대통령의 시정연설과 그 처신은 향후 정국에서 야당의 협조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으로, ‘정치’의 역할을 방기한 것이었다.
▲ 30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
그러나 보수언론들은 박근혜 대통령 시정연설의 극단적이고 과격한 기조를 충실히 따라 ‘경제’를 우리 사회 다른 모든 문제와 대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일보>는 1면 하단 기사 제목을 <“재정赤字 늘려서라도 경제 살리겠다”>는 박 대통령 발언으로 뽑았다. 3면 탑 기사 제목은 <“경제” 59번 “財政” 16번 반복… 나라경제 절박함 표현>으로 가져갔다. 여야 반응을 다룬 3면 하단 기사 제목도 각각 <野, 대통령 입·퇴장 때 대부분 일어나 예의 갖춰>, <김무성, “연설 아주 감동적… 그대로 추진할 것”>으로 달렸다. <한겨레>에선 여당 내부에서조차 혹평이었단 연설이 여기선 나라경제의 절박함을 표현한 아주 감동적인 연설이 된다.
<중앙일보> 역시 1면 탑 기사 제목을 <“마지막 골든타임” 경제 59차례 강조>을 달았다. 역시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이 현실의 반영이라는 뉘앙스다. 여야 회동을 다룬 3면 탑 기사 제목은 <문희상 “개헌도 골든타임 있다” … 박 대통령은 미소만>으로 달렸다. 대통령은 민생을 우려하는데 야당은 권력이나 챙기고 있다는 편견을 강화하기 위한 편집 의도로 보인다.
<중앙일보>의 속내를 더 노골적으로 실천한 곳은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 1면 탑 기사 제목은 <대통령은 “경제” … 野는 “개헌”>이었다. 더 이상 설명도 분석도 필요하지 않는 저열한 반정치주의의 의도를 드러냈다.
▲ 30일자 동아일보 1면 기사
경제는 물론 중요하다. 그것이 민생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는 경제를 북돋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규율하기 위해서도 존재한다. 그리고 ‘규율’이 필요한 이유는 정치권력이 기업에 상납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위함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서 경제민주화란 구호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도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방치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고, 자신도 언제 사회적 약자가 될지 모르게 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고민을 많이 하는 대선정국에 나왔던 이성적인 슬로건은 사라지고, 하루하루 먹고 사는 걱정에 바쁜 평시에 사람들을 겁박하는 경제활성화란 구호가 들어섰다. 지금 뭔가 북돋지 않으면 우리 모두 망한다는 식의 겁박이다. 그리고 보수언론은 이 겁박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면서 정치를 파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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