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iven by David Fincher

데이빗 핀처는 늘 이야기보다는 그 속에 있는 인물을 탐구하고 그것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몰두했던 감독입니다. 이를 새삼스레 느낀 게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를 보면서였습니다. 그는 시즌 1의 포문을 여는 1화를 연출하면서 아주 단호하고 명확하게 프랜시스 언더우드라는 인물의 성격을 보여줬습니다. 자신의 동네에서 개가 뺑소니를 당해 고통을 받고 있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꺾어 안락사시키는 장면에서였습니다. 이것만 봐도 프랜시스 언더우드는 무엇이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감행하는 인물이라는 게 단숨에 나타났습니다. 과연 데이빗 핀처답게 <하우스 오브 카드>를 시작부터 집중하고 몰입할 수밖에 없는 신의 한 수를 둔 것이었습니다.

다수의 영화에서 데이빗 핀처는 항상 인물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자신만의 애정을 담는 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근작인 <소셜 네트워크>와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두 영화에서 특별히 두드러졌던 것은 단순히 인물만 파는 게 아니라 저마다의 인물이 처한 사회적 배경과의 연계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소셜 네트워크>는 많은 사람을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온라인에서 은둔하게 만든 장본인도 결국 별 다를 바 없는 인물이라는 걸 보여줬습니다. 온라인 사이트 덕분에 엄청난 부자가 됐고 세상사람 모두를 이어줬지만 정작 그는 현실에서 친구를 하나둘씩 잃어갔습니다. '페이스북'을 설립한 마크 주커버그가 바로 그것의 부작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제목 그대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폭력과 억압에 시달리는 여자가 어떻게 살아남는지와 더불어, 리스베트를 실은 타의에 의해 고립된 인간으로 그렸다는 것에서는 <소셜 네트워크>와 일맥상통하는 바도 있었습니다. 길리언 플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나를 찾아줘>는 '여성'을 중시했다는 점에선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끔 했다는 것에서는 <소셜 네트워크>를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로 보면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묶었으면서도 두 영화 모두 각각 에이미와 리스베트를 중심으로 전체 이야기를 바라보게 한다는 것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가만 보면 데이빗 핀처야말로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나를 찾아줘>는 주제와 엮어서 영화 속 인물만이 아니라 관객까지 자신의 손으로 주무르고 있습니다.

Eye of the Beholder

결혼 5주년을 앞두고 홀연히 사라진 아내를 찾는다는 내용의 <나를 찾아줘>는 각 인물들을 따라 크게 두 가지 갈래로 이뤄져 있습니다. 경찰까지 포함하는 대중과 부부가 그 둘인데, 데이빗 핀처는 하나의 이야기에 자연스레 융화시켜서 영화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관객으로서 가장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건 역시 '대중' 파트입니다. 사실 두 가지 갈래의 위에서 <나를 찾아줘>를 이끌어가는 건 다름 아닌 제한된 사실을 너무나도 손쉽게 진실로 받아들이는 무책임한 '구경꾼의 눈'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이것을 조장하는 건 단연 진실보다 흥미를 전달하는 데 몰두하는 언론이고 데이빗 핀처도 <나를 찾아줘>에서 그들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는 일종의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아줘>는 남편인 닉의 시점에서 아내 에이미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때 "아내의 두개골을 박살내서 뇌수를 쏟아내고 그걸 뒤져서 답을 찾고 싶다"는 닉의 살벌한 내레이션이 더해집니다. 이어서 그는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기분은 어떠하며 두 사람이 대체 서로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궁금하다고 합니다. 이 짧디 짧은 오프닝이 관객에게 하나의 편견을 안겼다는 걸 알아차라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잠시의 등장 이후에 에이미가 사라졌고, 점차 용의자로 닉이 지목되는 걸 보면서 이 내레이션을 상기했던 관객이 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닉이 수상쩍게 보이도록 하는 데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아내를 찾고 있다는 기자회견 중에 나온 (습관적인) 미소, (선의를 갖고) 노숙자에게 베푼 친절, (본의 아니게) 여자와 찍은 사진, 에이미가 (의도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섞어 날조하여) 남긴 일기, 결정적으로 (잦은 갈등으로 티격태격하는 아내에 지쳐) 20대 초반의 제자와 불륜에 빠진 것까지 보여지면 관객 중 다수가 그를 범인으로 의심하는 걸 넘어 지목하기에 이릅니다. 괄호 안에 넣은 부연은 진실을 알려하지 않고 즉물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 즉 편견에 사로잡혀 눈에 보이는 것에만 감정적으로 반응하면 놓치기 십상인 것으로, '사실'이 아닌 '진실'을 가려내는 데 필수지만 으레 관심을 두지 않는 구경꾼의 눈은 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런 몇 가지 장치는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마녀사냥을 하려고 하는 대중의 속성을 간파하고 배치한 것입니다.

데이빗 핀처는 그걸 꼬집고 있는 <나를 찾아줘>를 보는 관객조차도, 아주 간단하게 사실을 진실로 속단한다는 걸 오프닝부터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하면서 영화 속 대중과 동일한 입장에 놓은 것입니다. 데이빗 핀처를 아는 관객이라면 영화가 단순한 치정극으로 끝나진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도 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찾아줘>는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에이미가 자작극을 벌였다는 걸 일찌감치 밝힙니다. 이걸 통해서 데이빗 핀처는 마치 관객을 조롱하고 추궁하는 것 같습니다. "어때? 당신들도 영화 속 우매한 대중과 별 다를 게 없었지?"라고 말입니다. 다소 불쾌할 수도 있지만 영화의 주제 중 하나를 전달하고자 관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에서 감탄하게 만드는 명석한 연출입니다. 그의 의도를 깨달은 관객이라면 오프닝과 동일한 장면으로 끝나는 엔딩을 보면서 소름이 끼치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한편 대중을 유린하고 현혹하기가 얼마나 쉬우며 반대로 진실을 알기란 또 매우 어렵다는 것도 절감할 수 있습니다. 닉이 아내를 찾는 중에도 찾아와 섹스한 장본인이 그걸 고백할 때는 요조숙녀처럼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나선다거나, 마지막까지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면서도 아내와 다정하게 인터뷰하는 닉, 남편에게 돌아가고자 에이미가 또 다시 자작극을 벌이고 비련의 주인공이 되는 과정, 그리고 모든 내막을 다 알고 있는 경찰과 변호사마저 닉을 도와서 진실을 알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떠나는 장면 등은 구경꾼의 눈을 구경꾼의 눈으로 머물 수밖에 없게 하는 현실을 대변합니다. 유일하게 이성적으로 대처한 사람은 닉의 쌍둥이 남매인 마고였으나, 누구보다 친밀한 가족이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현실과 동화를 구분하지 않는 세상

<나를 찾아줘>를 지배하는 구경꾼의 눈은 언론의 손에 놀아나는 것 같지만, 엄밀히 말하면 소위 말하는 '막장 드라마'의 질긴 생명력이 가진 원천처럼 구경꾼의 눈이 바라는 것을 언론이 보여주고 있는 것일 따름입니다. 종종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논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하고 세상을 왜곡하여 아름다운 동화로 포장한다"는 것입니다. 비단 디즈니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숱한 영화와 드라마도 이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있었던 마스터 클래스 중에 벨라 타르 감독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계기라고 말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목적 중 하나가 '현실도피'라는 것은 굳이 들먹을 필요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허구와 현실을 구분한다고 하지만 반복된 노출과 학습은 인간의 무의식에 깊게 자리하고 더 나아가 의식까지 관장합니다. 반박의 여지는 있으나 제임스 비커리가 일찍이 실험했던 서브리미널이나 간접광고 등은 이 무의식과 잠재욕구를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게끔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증명합니다. 이것은 곧 허구에 몰두하는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환상을 갈구하고 그 속에 갇힌 채로 머물려고 할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설사 허구와 현실을 구분하더라도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처럼 현실(진실)을 추구하지 않고 허구(거짓)을 추종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영화를 예로 들면 인도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뮤지컬과 판타지를 섞은 '맛살라'에 열광하지, 인도의 현실을 다룬 사트야지트 레이나 리트윅 가타 등의 영화에 대해선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나를 찾아줘>는 대중의 이런 성향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선 에이미의 직업 자체가 유명한 동화작가입니다.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실종을 근사하고 치밀한 각본으로 철두철미하게 구성했습니다. 이것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남긴 일기로부터 소설의 구성단계처럼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이뤄지고, 각 지점은 명확한 인과관계와 개연성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무분별하고 부화뇌동하는 대중은 닉과 에이미의 사연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걸로 에이미는 어떻게 해야 닉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지 궁리하면서, 현실 속 한 부부의 애정사를 한 편의 비극적인 동화로 맘껏 포장해 대중을 현혹하고 자신의 각본에 끌어들이기로 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설상가상 갑작스레 발생한 돌발변수까지 에이미의 각본을 수정하고 완성하는 데 더 없이 좋은 재료가 됐습니다. 완전히 농간에 보기 좋게 넘어간 대중은 단지 에이미가 주는 정보에 좌지우지 되면서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진실이라는 착각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에게 에이미는 아름다웠던 동화 속 비련의 공주고, 닉은 그 공주를 사랑했으나 머지않아 괴롭히면서 바람까지 피운 악당이었습니다. 과정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말의 관심도 없으면서 흑백논리를 따르는 동화의 인물구도처럼 선과 악을 구분짓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닉이 티비에 출연하면서 사정이 조금 달라졌지만, 여전히 대중이 원하는 건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다다르는 전형적인 동화의 결말인 'Happily Ever After'였습니다.

에이미와 어메이징 에이미

<나를 찾아줘>의 두 축 중 하나인 닉은 (실제로 많은 남자가 그렇듯이) 매우 단순한 인물입니다.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파렴치한으로 몰리지만 실은 에이미와 달리 멍청할 만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순진한 남자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관객은 에이미가 실종됐다는 신고를 받고 온 경찰과 대면한 닉의 반응을 보면서 그를 범인으로 의심했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내가 사라진 사람이라고 하기엔 믿기 힘들 만큼 침착하고 냉정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전혀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이 때문에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점점 드러나는 걸 보면 닉은 그냥 단순하고 솔직한 남자였습니다. 아내가 사라진 게 반가웠던 그는 에이미와 달리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위장할 줄 몰랐고, 아버지를 대하는 걸 보면 닉은 원래 매정한 타입의 남자였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반면 에이미는 미묘하고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물입니다. 데이빗 핀처야말로 진짜 페미니스트일지 모른다고 말한 것이나, <나를 찾아줘>가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과 유사하다고 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필시 에이미는 어릴 적부터 부모 - 특히 어머니 - 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에 짓눌리면서 훌륭한 '여성'으로 사는 공식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에이미의 부모가 기자들 앞에서 딸을 찾게 도와달라고 호소하던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이때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딸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공한 여성인지를 내세우기에 급급했습니다. 마치 "우리 딸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할 여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릴 지경이었습니다. 닉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에이미가 했던 말을 보더라도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동화는 자신이 현실에서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을 대리만족하려는 수단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요구에 부합하느라 노력하면서 자연스레 가졌을 열등감을 또 다른 에이미로 극복하고 가상 실현한 셈입니다.

철저하게 어머니의 시선에 갇혀서 살았던 에이미는 이런 성장과정으로 인해 남에게 자신을 어떻게 내보여야 하는지, 또는 그것을 어떻게 조작할 수 있는지를 무서울 만큼 잘 알고 있습니다. 큰 그림에서 실종과 탈출을 계획하고 실행한 방법은 물론이고, 그 일환으로 바닥에 흘린 피를 처리하면서 "어설프게 보여야 더 설득력 있다"는 것마저 훤히 꿰뚫고 있습니다. 마을을 떠난 직후에 에이미가 한 행동은 또 어떻고요. 과자와 햄버거 등을 잔뜩 사서 마구 먹어치우는 게 평생 몸매 관리를 해야 하는 여성의 스트레스로부터 탈출했다는 걸 만끽하려고 그랬던 걸까요? 천만에요. 에이미는 그렇게 본능과 욕구에 충실한 사람이 아닙니다. 닥치는 대로 먹고 머리카락을 잘라 염색한 건 자신이 은둔할 싸구려 모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입의 불행한 여자로 위장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대로 갔다간 의심을 살 수 있으니 옷만 갈아입는 게 아니라 몸까지 변화시킨 것입니다. 심지어 장도리로 본인의 광대를 때려 멍까지 만들 정도로 과감하고 치밀합니다.

소녀가 소녀이지 못하는 현실

그렇다면 에이미는 왜 이리도 사악한 사람이 된 걸까요? 바로 어머니가 아니라 남성 중심의 세상이 특정한 여자를 노골적으로 원하고, 언론을 비롯한 대중매체가 그것을 하나의 표상으로 내세우면서 대중을 끊임없이 세뇌하는 악순환 때문입니다. <나를 찾아줘>는 이 특정한 여자를 에이미가 줄기차게 쏟아내는 내레이션에서 'Cool Girl'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쿨한 여자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잣대가 있는데, 그 모든 게 다 남자의 요구에 맞추려는 둔갑이지만 결국 여자는 마지막에 섹스의 도구로 전락하는 게 고작이라고 말합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여자는 남성 중심의 세상이 원하는 기준에 부합하려고 발악만 한다는 것이고, <나를 찾아줘>에서 이것을 상징하는 소품으로 로봇 강아지와 꼭두각시가 등장합니다. 이것의 의미를 파악하면 왜 데이빗 핀처를 진정한 페미스트라고 추켜세웠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전에 먼저, <나를 찾아줘>는 동화의 큰 틀을 차용하면서도 핵심사상만은 전복시키고 있습니다. <슈렉>의 이야기처럼 사악한 용이 지키고 있는 성에 갇힌 공주에게 백마 탄 왕자가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대신, 들어갈 때도 그랬듯이 나올 때도 공주가 스스로를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왕자의 품으로 돌아간 공주는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전사야!" 이 말인즉슨 "여자는 백마 탄 왕자를 만나서 팔자 고치는 게 짱이다!" 따위의 한심한 사고관을 송두리째 거부하면서 여자 또한 고난이 어렸을지라도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고자 싸운다는 걸 역설한 것입니다. 별장을 빠져나오려고 에이미가 벌인 행동을 한번 보세요. 고등학생 때부터 자신을 짝사랑했던 남자가 마침내 섹스로 자신을 정복하고 지배하려 할 때 가차 이 목을 그어 여버렸습니다. 이건 살인인 동시에 폭압적인 남성성에 대한 극단적인 반항이자 부정입니다.

이전까지 에이미는 여느 여자처럼 남자에게 맞추면서 살았습니다. 닉은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개수작(Bullshit)을 부리고 악랄해(Villainous) 보이는 인상도 감추려는 노력에 호감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이내 입장은 반대가 됐습니다. 에이미는 닉 또한 '쿨 걸'을 원한다는 걸 알고 음모까지 밀면서 그런 여자로 옆에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노력이 무색하게 닉이 새파란 여자와 바람을 피우자 복수를 벌였는데, 이 복수란 건 다름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역학을 완전히 뒤집어서 자신이 닉을 조종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누군가의 잠재적 강요로 인해 조종을 당하면서 살았다면 이젠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서 조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선언이 담긴 것이 바로 로봇 강아지와 꼭두각시였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차선에 맞춰 달리던 두 대의 자동차를 추월하고 지나간 장면도 에이미의 각성과 변화를 나타냈습니다

여기서 제목을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나를 찾아줘>는 원제인 <Gone Girl>만큼이나 모처럼 번역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원제는 왜 'Girl'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을까요? 보통 소녀 내지는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단어인 것과 맞지 않게 에이미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말입니다. <Gone Girl>이라는 제목은 에이미의 성장과정 및 환경을 통해서 소녀가 소녀로 지낼 수 없게끔 하는 부당한 현실을 상징합니다. 즉 여자이기 이전에 독립적인 한 명의 사람으로서 자라지 못하고 남성 중심의 사회가 강제로 덧씌운 기준에 맞추려고 하면서 '사라진 소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줘>라는 한제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내가 아니라 남이 원하는 나로 살아왔으니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디서 찾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에이미는 마지막에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면서 그것을 찾는 데 성공했습니다.

순수에게 작별을 고하라는 결말

<나를 찾아줘>를 보면서 결정적으로 "과연 데이빗 핀처!"라는 감탄사가 나오게 한 건 결말부였습니다. <나를 찾아줘>는 흔하디흔한 스릴러의 구조와 공식에서 탈피하면서 세 개의 파트, 즉 닉이 범인으로 의심을 받기까지의 전반, 실은 에이미의 철저한 자작극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중반, 두 사람이 본의 아닌 본의로 재결합하는 후반을 모두 탄탄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밑천을 모두 탕진했을 법도 한 상황에서마저 긴장을 끝까지 유지한 건 원작과 더불어 데이빗 핀처의 연출과 절묘한 편집이 이룬 성과였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에필로그에 가까운 결말이었습니다.

만약 이 영화를 단순하게 본다면 에이미는 닉의 말마따나 싸이코패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남편을 살인용의자로 몰고 다른 남자를 서슴없이 죽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캐릭터 운용에 강한 데이빗 핀처는 에이미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상과 연계하고 아주 아슬아슬한 경계에 놓으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묘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은 에이미의 응징을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선이 아니면 악만 존재하는 흑백논리를 가진 동화(영화, 드라마)에 익숙한 관객에게 에이미는 반드시 무찔러야 할 마녀입니다. 실제로 <나를 찾아줘>도 그런 의지를 슬며시 드러내면서 관객을 마지막까지 집중하게 유도하지만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나를 찾아줘>의 이 결말은 두 가지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사는 현실은 동화처럼 명확한 선악구도를 가지지 않고 그에 기반한 권선징악이 이뤄지지도 않습니다. 막 불륜을 저지른 게 탄로난 닉이 곤경에 처한 채로 가진 인터뷰에서 했던 말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아내를 찾고 싶어 한다고 해서 내가 나쁜 놈이 아닌 건 아니다" 아마 에이미가 돌아와야 혐의를 벗을 수 있으니 새빨간 거짓말은 아닌 고해성사일 것입니다. 예컨대 닉의 말은 "바람은 피웠지만 너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단지 도덕과 윤리가 양심적인 규제를 걸어서 그런 것이지, 무형이고 추상적인 감정의 정의를 하나로 고정시킬 순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내와 함께 자리했던 인터뷰에서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우린 서로에게 솔직하고 공범이다" 정말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구경꾼의 눈에 불과한 대중에게는 여전히 동화 같은 부부의 은유적 사랑 고백으로 비춰지겠으나, 이 사단의 원인은 양자 모두에게 있음을 시인한 것입니다.

저는 첫째의 연장선상에 있는 둘째로서의 결말이 더 좋았습니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라서 선악을 쉽사리 판별할 수 없고 함부로 속단해서도 안 되는 것처럼, <나를 찾아줘>는 사회가 요구하는 결혼이라는 '제도적 관계'도 <우리 결혼했어요> 따위가 전시하는 것과 달리 아름다운 건 결코 아니란 걸 보여줬습니다. 파국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붙잡으려는 에이미에게 닉은 "열렬히 사랑했지만 지금은 서로에게 고통과 상처만 주고 있다"고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이걸 들은 에이미의 대응이 압권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결혼이야!" 맞아요, 이게 바로 사랑이고 결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순수와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입니다. 현실은 동화와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사랑은 숭고하고 고결하며 일편단심이어야 아름다운 감정의 교류라는 착각도 버려야 하며, 설사 정점에서 결혼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언제고 바닥을 드러내고 만다는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라건대, 제 요지는 "세상이 엿 같다"는 게 아니라 "환상을 버리고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보이후드>로 말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낙담하기보단 마음의 준비를 하고 태연하게 마주하자는 것입니다. 세상이 순수하고 사랑이 순결하며 결혼이 사랑의 결정체로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은 버리세요.

대신 <나를 찾아줘>에서 닉의 선택처럼 그걸 모두 감수하고라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결혼(관계)'입니다. 닉은 마지막까지 에이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에이미를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곧 태어날 아기 때문인진 모르겠으나, 그가 에이미에게 길들여졌다는 건 틀림없습니다. 샤워 중에 샴푸를 달라고 했더니 얌전하게 건네는 것이나, "예전처럼 당신의 역할을 해줘야 해"라고 했더니 조용히 턱을 가리는 것만 봐도 닉이 에이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린 이렇게 누군가를 길들이고 누군가에게 길들여지면서 간신히 사랑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그렇게 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옆에 머무르고 싶을 정도로 지독하게 고독하고 처량한 존재일 수도 있겠습니다.

★★★★☆

덧 1) 트렌트 레즈너와 아티쿠스 로스는 데이빗 핀처와의 궁합이 환상적입니다. <소셜 네트워크>나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과 분명히 다르면서도 <나를 찾아줘>의 사랑도 증오도 아닌 애매모호한 감정을 음악에 녹였습니다.

덧 2) 데이빗 핀처가 어떻게 에이미와 닉이라는 인물을 설계하고 완성하는지를 유심히 보세요. 그에게는 사건을 전개하기 위해 인물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건이 필요합니다. <나를 찾아줘>도 모텔에서 에이미가 당하는 것이나 닉의 인터뷰를 볼 때 에이미의 행동, 에이미가 가지고 있던 볼펜과 같은 소품 등으로 에이미가 어떤 인물인지를 차곡차곡 쌓아갑니다. 위에서 말한 닉과 에이미의 설전도 두 사람의 관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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